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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우리나라 생활수준은 1990년대 중국의 연변지역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논에서는 모두 엎드려 김을 맸고 밭에서도 아낙네들이 수건을 쓰고 호미 만으로 잡초를 제거하면서 농사를 지었을 뿐 아니라 시장의 갖가지 장사꾼들 모습,장사의 종류등이 거의 비슷했다.
물론 중국도 1990년도 이후 경제 발전의 속도가 무척 빨라 불과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해 졌지만….
1998년도에 연길시장에 갔더니
우산을 고쳐 주는 사람,고무풀로
신발을 수선해 주는 사람,
리어카에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고기, 소고기를 아무런 덮개장치 없이 싣고서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 골목길로 운반하는 사람,
하얀 알루미늄 솥(내가 어릴적엔
‘백솥단지’라 불렀음)에 칼국수를 끓여 파는 사람,참기름 값보다 그 것을 담는 플라스틱 통값이 더 비싼 기름가게.
영락없는 우리나라 60년대 시장 풍경이었다.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공산품을 무척 좋아해서 접는
이중우산 하나 주면 장뇌삼 세 뿌리는 얻어먹을 수 있었다.
운전기사 팁을 우리가 쓰던 - 그것도 "ㅇㅇ회사"등 홍보 문귀가 새겨진 볼펜을 거두어 열댓 자루
주는 것으로 대신했었다.그 것들은 고가로 중국 국민들에게 팔릴 것이고 그 볼펜을 산 사람은"이
볼펜 한국제야!"라고 자랑하며 쓸 것이다.우리가 과거 "이것 일제야""이것 미제야"하면서
자랑했듯이~
우리동네에 기와공장과 벽돌공장이 있었지만 없어진 지가 40년 가까이 됐을 것이다.
5원 하던 팥칼국수가 먹고싶어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순천 아랫장에는 긴 막대기에 검고 노란
고무줄을 늘어뜨려 세워서 들고 다니면서 “고모줄이요 이모줄이요”하며 외치던 고무줄 장사가
있었다.또 손재주가 좋은 사람은 당시 귀했던 쇠로 만든 살에 나일론 천을 씌운 운산이나 양산을
고쳐주며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다.그 때는 대부분 비닐우산이나 종이 우산이었다.우산 살도
대나무를 깍아 만든 것 들이었다.따뜻한 불을 피워 놓고 아교를 녹여 집에서 쓰던 상다리를
붙여주거나 하얀 고무풀을 비치해 놓고 구멍뚫은 양철을 동그란 원형 나무토막에 감아
고무조각이나 가죽조각 면을 그것으로 문질러 풀이잘 붙게 한 다음 고무신이나 구두를 수선해 주던 수선 전문 장사도 있었다.
또 요즘 약봉지만 한 비닐에 라이타 돌 10개씩 포장하여 길게 늘어뜨린 채
“돌,돌,돌 라이타돌이요!”하고 외치는 라이타돌 장수도 있었다.지금은 모두가 1회용 라이타를
쓰기에 라이터돌을 따로 구입하는 사람이 없다.
그 라이타돌 장수는 라이타용 소형 휘발유통도 함께 팔았다.
그 때는 가스라이터는 없었고 오로지 라이타 돌과 휘발유로 붙여지는 지포 라이타 뿐이었으며
라이타는 하이칼라나 부잣집에서만 쓰는 물건이었다.대개는 화랑표 통성냥이나 비사표 휴대용
갑성냥을 썼고 70년대 까지만 해도 홍보용 선장품으로 작은 갑성냥이 많이 활용됐을 정도로
라이타는 귀한 물건이었다.불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기에 지금의 1회용 라이터도 선장품으로
활용도가 높다.
교통 수단은 오로지 소나 말이 끄는 구루마나
두 발 뿐이던 시골 사람들에게 장을 보는 일은
하루를 써야 하는 날이었다.
돈도 귀하고 물건도 귀했지만 돈이 많다
하더라도 필요한 물건을 갖는데는 시간과 품이
많이 소요되었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른다는 시장원리에 따라 농사일을 해야하는 품을 아껴야 하는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방문 판매가 공급되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엔 움직이는 장사가 많았다.
요란한 가위 소리를 내는 엿장사.땡그랑 종치며 다니는 두부장사.리드미컬하게 육성으로 외치는
아이스 케키장사는 기본이요 가끔 오는 사주 보는 사람,하풍단을 파는 돌팔이 약장사,
가발 재료로 쓰기위해 여자들 비녀꽂은 낭자 머리를 잘라가고 돈을 주는 달비장사.보따리로
이고 다니면서 생필품이나 옷을 파는 방물장수 아주머니등등 거의 모든 생필품은 방문하는
장수들이 공급해 줬던 것이다.
대부분 나무를 때서 취사도 하고 난방도
했으므로 주기적으로 굴뚝 청소를 해 줘야 불이 잘 들어 방도 따뜻했다.
소위 말해 열효율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이 직업이 고래 구멍 뚫는다는 ‘굴뚝 청소부’였는데 이 일을 하는 아저씨들이 가끔 긴
막대기와 걸레조각 뭉치를 지고
“뚫어~~”하고 외치면서 지나갔다.
또 뒤에는 화장품 상자를 지고 앞에는 작은 북을 멘채 ‘둥둥둥’
북을 치면서 다니는 소위 ‘동동 구리무 장사’ 도 있었다.동동동
북을 친다 해서 ‘동동’이고 영어로 크림을 구리무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했기에 굳이 해석한다면 ‘’북치는 크림 장수’를 우리는 ‘동동 구리무 장수' 라고 불렀다.화장품이라 해봐야 분,크림,
볼연지가 전부였다.입술을 칠하면 술집여자라 부를 정도로
폐쇄적이었던 사회였는데 예뻐지고 싶어하는 여자 마음에 돈이
없어 못사는 여자들의 질투가 그런 말을 만들어 냈지 싶다.
화장품 장사들은 장터에서도 뒤에 북을 지고 북채를 끈으로
연결하여 발을 밟으면 북을 치게 만든 장치를 하여 손으로는 꽹과리를 치면고 발을 굴러 북을
치면서 입으로는 노래를 하거나 멘트를 날려 주의 집중을 시켜 물건을 팔았다.
의료 시설이 발달 안된 터라 대부분 병 치료는 민간 요법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민이나 도시 서민들은 병원에 간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큰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날이나 평일에도 공터에는 돌팔이 약장사들이 많았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증상’을
나열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되는 말을 하기에 결국 사고 말게 된다.보통 서민들은 복합적인
보약은 비싸서 못 먹기 때문에 단일 품목으로 싸게 달여 먹는 이른바 ‘몸에 좋다’는 약재를 사게
되는데 이상한 약초 뿌리를 파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연 인기를 끄는 것은 뱀장사였다.
지금도 저음으로 목소리를 깔고 ‘애들은 가라’하면서 ‘화초밑에 땀차는 분.마누라 샤워 소리가
두려우신 분.일단 한 번 잡숴봐.내일 아침 밥상이 달라져~!”하는 코메디 소재로도 많이 쓰인다.
그 때 본 모습은 숱불위에 특수 제작한 솥을 걸어 두고 뱀을 올려놓으면 그 뱁이 익어가며 까만
액체가 삼겹살 불판에서 기름 떨어지듯 방울방울 떨어지는데 이 액을 작은 병에 담아 팔았었다.
70년대에는 찹쌀로 만든 캅셀에 모아 즉석 제작한 알약으로 판매를 했었다.
'약장사'하면 시골 장터를 돌아 다니는
유랑극단인 "나이롱 극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국악인이요 국극단인 예술가들의
집단이었지만 그 때는 그저 광대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하얀 무명천으로 대형
천막을 만들고 그 안에는 멍석(덕석)을 깔아 손님을 양반자세로 앉게 한 다음(그 때는 의자가 엄청 귀해서 개념 자체가 없었음) 앞에 간단한 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했다.
공연은 장화 홍련이나 심청전 같은 연극도 했고 간단한 서커스도 했으며 판소리,민요등 창을
불렀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예술인으로 대우해 줘야할 사람들이었다.공연 사이사이에 많은 종류의약을 판다.이를 없애는 이약부터 무좀에 바르는 두꺼비 기름,여자들 머리 손질용 동백 기름,구충제,입으로 불어 뿌리는 파리약등등....내 기억에 남는 약은 "만병수"라는 약이었는데 민속극이나 민요를 무척 좋아하시는 아버지께서 나이롱 극장 공연을 보시고 사 오신 그야말로 만병에 좋다는 보약
개념의 약이었다.2리터 들이 병으로 기억되는데 먹어보면 활명수 맛이 났고 먹을만 해서 심심하면 조금씩 몰래 마셨던 기억이 난다.
직업은 시대의 변천에따라 쇠락하고 또 생기고 그러는 것이다.
60년대에는 농업을 함에 있어서도 소와 쟁기로 남의 논을 갈아주고 품을 받기도 했고 ,
소나 말이 있는 집에서는 고가 이지만 타이어로 된 두 바퀴가 달린 구루마(수례)를 장만하여
유용하게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진흙을 기와공장에 운반해 주거나 황토 흙을 벽돌공장에 운반해
주거나 연탄을 운반해 주고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고, 도시의 재래식 변소를 퍼주고 돈을 받고
그 인분은 농촌에 거름용으로 팔아 돈을 받는 일거양득의 장사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는 일이 많았던 그 시대에는 초기에 땅을 비옥하게 하는 데는 인분만
한 게 없었다.또 시골에서 여자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삼베나 모시를 짜는 길쌈을 하는 일이
있었고 가마니를 짜서 내다 팔거나 새끼를 꼬아서 파는 일이 있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일본은 고부가가치 생산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노동력이 필요한 소비재는
임금이 싸면서 솜씨가 좋은 우리나라에 노동집약적인 일을 시켜
일본으로 들여 갔는데 60년대 대표적인 것이 가발공장과 시보레였다.
시보레는 일본 전통의상에 넣는 무늬를 수 놓듯이 하는
작업으로 우리나라 아가씨들이 많이 동원 됐었다.
후진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인건비가 저렴한
여자들의 일자리는 많은 반면, 남자들의 일자리는 적다.
해서 집안을 부흥시킬려면 남자들을 가르쳐야 했고
그 뒷받침은 그 집안의 딸이 해야 했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자들은 돈벌이에 동원돼야 했다.
각종 공장은 물론,식모,다방레지,니나노 술집 색시.
목욕탕 때밀이등 정말 힘든 일,지저분한 일,위험한 일에
우리들의 언니 누나들이 동원 됐었다. 한 집안을 일으키는데 딸들의 희생이 필요했기에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생겨 났을 정도다.공부하고 싶은 여자들은 어떻게는 공부를 했는데
시골에서 농사지어 여자를 대학보낸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어찌어찌해서
고등학교는 집안 도움으로 졸업 했지만 대학 등록금은 도저히 감당이 안되니까 기생관광을 온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호텔을 드나들며 몸을 팔아 공부한 당시 여대생들이 많았었다.
지금의 필리핀이나 러시아가 그러는 모양이다.
얘기가 다른 데로 흘렀는데 고향을 뜨지 못한 우리들의 누나들은 가내 수공업이라 할 수 있는
양잿물이라 통칭됐던 화공약품을 써가며 비위생적으로 만드는 과자공장에 다니거나 편물이라고
기계로 쉐터를 짜는 공장에 나가기도 했고 양송이 재배소나 통조림 공장에 나가기도 했다.
60년대는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됐던 시절이라 상의 용사가 많았다.성한 몸으로도 벌어먹을
길이 없었고 나라의 경제사정이 좋지않아 변변한 치료나 의료보호장구조차 마련해 주지 못했기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친 상이용사들은 거의가 동냥질로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민들도 삶이 녹녹치 않아 인심이 박할 수 밖에 없게되고 그러다보니 상의 군인들은
오기와 깡밖에 안남아 불량스럽게 변해간 모양이라 우리 어렸을 때 갈쿠리 달린 팔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상의 군인을 보면 무서워서 숨거나 도망을 갔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가 유공자 삶은 비참 그 자체다.
하여튼 그런 저런 이유로 거리에 동냥치가 많았는데 정부에서는
“보호소”를 만들어 이런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다 감옥 같은
보호소에서 생활하게 하였다.말이 보호소지 감옥 같은 생활에
제대로 먹지못한 사람들은 우두머리에게 맞기도 하고 병을
얻기도 하여 많이 죽었고 순천의 경우 하루 한,두구씩 가마니에
싼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연동부락을 지나 비례 근방에 있었던
공동묘지에 묻기 위해 3명이 1조가 돼 운반을 했다.
그들은 매 번 운반하는 도중 지나가는 차 앞에 시체 리어커를
들이 대고 돈을 뜯어 내는 것을 봤는데 하루는 택시 기사 아저씨가 내리더니 그 3명을 죽사발나게
패는 것을 봤었다.정말 펄펄 날아 3명을 모두 쓰러뜨리고 가버렸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누가 잘못했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지만 시체를 들이대는 것을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었을 듯 하다.
못먹던 시절이라 그 때는 거지도 많았지만 병자도 많았다.
신풍의 결핵 요양원이나 고흥 소록도의 나병환자 수용소는 공식적인 곳이었고 순천에도 현재
성가롤로 병원이 있는 곳에 폐결핵 환자들이 모여 살았고 광양쪽으로 연동을 조금 지나면 오른쪽에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다.나병은 사람 간을 먹으면 낫는다 하여 동네 어린애들을 잡아 보리 밭으로 끌고가 간을 꺼내 먹는다는 흉흉한 말이 돌아 나병환자가 지나가면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나환자 촌에서는 주로 양계장을 운영하거나 농작물을 길러 내다 팔았는데 처음엔
꺼림직하여 주민들이 잘 사먹지 않았다.
전쟁 고아들은 도시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농촌의 빈민 출신들도 도시로 들어가야 그나마
동냥이라도 얻어 먹고 살 기가 쉬웠던 모양이다.요즘도 재활용품 수집을 하며 먹고 살아가는
도시 빈민이 많지만 당시에는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바구니를 등에 지고 손에는 길다란 집게를 들고 다니며 폐지와 고물을 줍는 “넝마주의”가
있었다.일명 “양아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즘의 “양아치”는 비겁하고 몰상식한 양심이
없는 껄렁패를 의미하지만 그 때는 종이를
주워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폐품만 줍는게 아니라 좋은 물건을 동작 빠르게 ‘휙~'’하고 뒤에 진 바구니로 던져버리면 주인은 나중에야 잊어버린 줄 알게 돼 넝마주의는 경계대상 1호가됐다. 아마도 이런 양심없는
넝마주의들 때문에 '양아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60년대는 목화를 많이 심었고 그 목화는 중요한 방한재로 수확 후 말려서 솜을 뽑은 다음 솜틀집에 가 틀어서 이불을 만들었다.물론 수집상에게 팔면 그 수집상은 방직공장으로 가지고 가 무명실을 뽑고 무명베를 만드는데 쓰이기도 했다.
목화는 그 때는 참 중요한 생산물이었다.새색시 시집갈 때 필수품이 이불이었고 가난한 집에서는 아궁이에 불도 못 때고 오로지 이불로만 겨울을 나야 하는데도 솜이불마저 돈이 없어 충분히
덮고자지 못했었다.
자전거는 참으로 귀한 물건이었다.리어카 한 대가 6천원이었고 자전거 한 대는 8천원이었다.
중고가 4천원 했다.자전거는 공무원처럼 고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것으로
지금의 자가용 차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모든 통제를 가하는 공무원들이 무서웠고 부러웠다.
밀주 단속 나온 세무공무원,나무 한다고 시비 거는 산감,불법 의료행위 한다고 조사 나온 보건소
직원들 모두가 무서운 공무원들이었다.이렇게 힘이 있어 보이고 또한 나라에서 세금 거두어
꼬박꼬박 봉급을 주니 그보다 좋은 직업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그래서 당신 자녀중 한 사람이라도 공부를 잘해서 공무원이 됐으면 하는 바램을 모두 갖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직공’’머슴’’품팔이’
이런 단어들을 달고 살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시내에 있는 가게의 간판은 통일성이 있었다.
그 때는 양복은 무조건 맞춰 입었다.
와이셔츠까지 맞춰 입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봉급을 받는 중류층 이상이 주된
고객이었다.
여자들도 외출복은 맞춰 입는게 대세였다.
그만큼 인건비가 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양복점 간판은 "ㅇㅇ 양복점"이었고
좀 세련된 게 “ㅇㅇ라사”였다. 여자들의
맞춤옷 가게는 대부분 “ㅇㅇ 양장점”이었다.
지금은 “헤어 샵”이니”까끌래 뽀끌래”니
세련된 이름이 많지만 당시에 여자들이
머리를 손질하는 곳은 거의 모두가
“ㅇㅇ미장원””ㅇㅇ 미용실”이였다.남자들의 이발소는 지금 까지도 “이발소””이용원”이다.
잡화점이나 기타 가게는 “ㅇㅇ상회”라는 이름과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통일 되었다.
앞에 붙이는 “ㅇㅇ”도 몇가지 이름으로 한정되다시피 즐겨 쓰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제일라사’’화신라사’’시민라사’'명품 양복점'등이 있었는가 하면 '뉴스타일 양장점''노라노 양장점'등 양복점이나 양장점 이름은 어디가나 비슷했고 “풍덕 미장원’’‘덕암 이발소’”조례 이용원”등
동네 이름을 따는 게 보통인 이발소나 미장원 이름도 비슷했다. 장대다리 옆에서 아버지를 비롯
두 형제가 상투를 튼 채로 잡화 도매점을 하여 ‘상투쟁이 집’으로 통하던 곳의 공식 명칭은
”인덕상회”였고 웃장에 옷과 부엌 용품을 파는 큰 가게 이름도 “한창상회”였다.
생목 박인호 선생님 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가게는 그냥 간판 없는 “생목 박센 집”이었고 조금
내려와서는 “욕보함씨”가게는 “협동조합”이라 불렀었다.
구두를 만드는 양화점은 주로 외국 도시 이름을 많이 땃는데 얼핏 기억나는 것이 '뉴욕 제화점'이나 '이태리 양화점'이다.
60년대는 진공관식 라디오에서 트랜지스터식 라디오로 바뀔 때 였으나 라디오가 무척 귀했다.
그래서 동네에 라디오 소리를 들려주는 스피커 집이 생겨났고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라디오를 구입했는데 라디오 연속극 시간이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같이 듣곤 했었다.섬마을 선생"이나
납양 특집극인 "하얀 얼굴"이라는 연속극이 인기가 있었으며 어린이 연속극으로는
"태권동자 마루치,아라치"가 인기가 있었다.라디오를 만드는 회사는 현재 LG전자 전신인 금성사가 대표적이었는데 대개는 조립품이 많았다.전자제품의 편리함을 알게된 국민들 속에서 수요가 늘어나자 수리와 판매를 동시에 하는 "ㅇㅇ전파사"나 "ㅇㅇ 소리사"간판을 단 가게들이 생겨났다.
귀금속 가게는 "정금당""명문당"등주로 세글자로된 간판들이 많았다.
의원이나 병원은 ”김은수 외과””지영철 치과”처럼 실명을 많이 썼고 한약방에는 끝에 ‘당’자를
많이 붙였다.”장수당 한의원””명신당 침술원”등의 간판이 많았는데 간판은 대개 목제나 함석에
흰색으로 바탕색을 칠한후 챠트사 정도 되는 글씨 잘쓰는 사람이 검은 색 페인트로 직접 쓴
것들 이었다.
요즘의 커피숍도 당시에는 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름도 어느 지역이나 거의 같았다.”역전다방””중앙다방”
”터미널 다방””장미 다방” 아무튼 열 가지 이름 중 하나였을
것이다.그 때 다방에서는 쌍화차가 제일 비싸게 팔렸고 아침에
마시는모닝 커피에는 어김없이 날계란을 줬다.저녁에는
“티”라고 하면서 양주를 한 잔씩 넣어 팔았다고도 한다.
그 때는 인건비가 싸서 그랬는지 여자 값(?)도 참 저렴했다.
차 한잔만 시켜주면 다방 아가씨들 가슴을 만져볼 수 있는
시대였으니 말이다.국민소득과 인건비는 비례한다.
특히 여자 값은 더더욱 밀접한 것같다.
그나마 다방 수는 이용객과 비례하기에 도심에 몇군데
있었으나 일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많았으니 다방
한 개소에 여종업원이 대여섯씩 있었다.그 중 얼굴이 제일
예쁜 아가씨를 홀에 고정으로 앉혀두고 좀 못생긴 아가씨는
배달 전문으로 뛰게 했다.70년대에는 산업화로 돈을 버는 인구가 많아져 유흥업소도 비례적으로
늘었지만 60년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끼니마저 제대로 못 채우는 사람이 많았기에
다방은 정말 사치스러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