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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브라질월드컵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축구에 관한 발명 3가지입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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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창안
고대 그리스시대 시작
기원전 7∼6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시대에 행한 에피스키로스라는 공을 차고 던지는 간단한 형식의 게임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대 중국에서는 이보다 먼저 축구형식의 공놀이가 행해졌다는 설도 있다.
그 뒤 로마시대에는 군사경기로 널리 보급되었고, 로마가 영국을 침공하였을 때 하르파스툼이라는 경기를 보급시켜, 이것이 영국에서의 근대 축구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800년대 영국에서의 풋볼은 무질서한 가운데 행해졌기 때문에 1863년 12월 8일 개최된 제6차 회의에서 협회가 규칙을 통일하고, 공인된 규약과 경기규칙을 인쇄하여 발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협회가 인정하는 경기규칙에 의한 축구가 생겨났으며, 이것이 어소시에이션 풋볼의 탄생이다.
‘association’의 ‘soc’를 빼내어 사커(soccer)라고도 부르며, 풋볼이라고도 한다.
축구는 세계적인 열광 속에 1904년 국제 관리기구로서 국제축구연맹을 탄생시켰다.
신라시대 축국도 축구와 유사
우리나라에 축구가 전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기 말이다.오늘날의 축구와는 조금 달랐겠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먼 옛날 신라시대에도 축국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가 전파된 것은 1882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호스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 외국어 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서 채택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공개 축구 경기는 1905년 6월 10일 서울훈련원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간의시합이라고 할 수 있다. 1921년에는 제1회 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조선심판협회(조선축구협회의 전신)가 창립되었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성(서울)과 평양의 경평(京平) 대항전은 축구에 대한 관심을 크게 증폭시키며 전 민족이 즐기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동시에 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축구는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여자 축구는 1996년 제26회 애틀란타 올림픽 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추가되었다.
한편, 남자 축구는 1951년 제1회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여자 축구는 1990년 제11회 북경 아시아경기대회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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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의 발명
소나 돼지의 오줌보
공은 선사시대부터 아이들과 어른들이 돌멩이나 기타 자연적으로 동그란 물체를 놀이에 썼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공에 관한 기록은 고대 문헌이나 조각에 나타나 있다.
축구가 처음으로 시작된 중세시대와 19세기까지만 해도 소나 돼지의 오줌보에 바람을 넣은 것을 비롯하여 동물 가죽에 털을 넣은 공과 새끼줄을 둥그렇게 말아 만든 공 등 지역에 따라 축구공도 각양각색이었다.
최초의 축구공 발명은 1862년 영국에서 인도산 고무공과 바람을 넣는 펌프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양쪽 끝에는 고무를 묶어주는 단추가 달려있었다. 이때까지 규격화되어 공인된 공은 없었다.
최초의 공인 축구공은 1866년 3월에 열린 런던축구협회와 셰필드협회 대표팀 경기에 쓰인 `릴리화이트 NO.5'였다. 이 축구공을 영국에서는 축구협회 공인구로 인정했다.
한편, 오늘날 축구공의 원조는 1872년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축구공은 가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면서 태어나게 됐다. 이후 축구공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축구공의 역사는 월드컵의 역사
20세기 축구공의 역사는 곧 월드컵축구대회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축구공이 발명된 것은 1963년으로, 국제축구연맹의 공식 파트너인 아디다스에서 제작한 산티아고가 그 시초이다.
현대적 의미의 이 축구공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축구대회에서 사용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는 공식구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때 사용된 공이 바로 아디다스의 ‘텔스타’이다. 1974년 서독(독일) 월드컵에서는 ‘칠레 텔스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사용된 탱고와 함께 축구공 디자인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다. 탱고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선 ‘탱고 에스파냐’로 이름을 바꿔 사용됐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합성수지로만 이뤄진 ‘아스테카’가 태어났으며,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공식구는 ‘에투르스코-우니코’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쓰인 ‘퀘스트라’는 축구공은 첨단 과학이 합쳐진 발명품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프랑스 국기가 빨강, 파랑, 하양 3가지 색인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세 가지 색깔의 ‘트리콜로’가 태어났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때는 ‘피버노바’가 선보였는데, 스피드와 반발력을 크게 향상시킨 발명으로 평가되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공식구 ‘팀가이스트’는 구형에 가까운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공인구 자블라니는 남아공의 토착어로 '축하하다'라는 의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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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화의 발명
최초의 축구화는 발목까지 보호
축구화는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탄생했다. 영국의 왕 헨리8세의 지시에 따라 왕실의 의상관리인이 발명하였다. 당시 축구화는 두꺼운 가죽으로 길게 만들어 발목까지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1900년대는 기존의 축구화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0년대에서 1960년대 축구화의 특징은 다양한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축구화가 경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축구화로 거듭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남아프리카 사람에 의해 제작된 축구화는 무척 가볍고 유연했다.
축구화의 역사에서 아디다스의 역사는 곧 축구화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수많은 명품을 탄생시켰으며, 아디 다즐러가 발명한 축구화는 그중의 으뜸이었다. 아디 다즐러는 장시간 발로 뛰는 축구는 축구화가 승부를 좌우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곧바로 베른 올림픽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아디 다즐러가 선보인 축구화는 잔디와 날씨 상태에 관계없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어 선수들에게 더 없이 좋았다. 스터드는 잔디와 날씨 상태에 따라 바꿔 달 수 있도록 했고, 재료는 무거운 쇠 대신 가벼운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다즐러 형제의 발명
상황이 이렇다보니 1966년 월드컵 결승에서는 75%의 선수가 아디다스의 축구화를 신을 정도였다. 이에 따라 아디다스 축구화는 순식간에 세계적인 명품이 될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1970년대에는 코파 문디알을 선보였다. 재료는 캥거루 가죽이었다.
캥거루 가죽은 인간의 피부와 가장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데서 시도한 것이다. 아디 다즐러의 시도는 적중했다. 무엇보다 공을 찰 때 터치 감이 좋아 선풍적인 인기였다.
아디 다즐러의 활발한 연구에 뒤질세라 아디 다즐러의 형 루돌프 다즐러 또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루돌프 다즐러도 시야를 세계로 돌렸고, 그 일환으로 브라질의 펠레를 후원했다. 이때 푸마 축구화 킹 모델을 발명해내는데 성공했다. 킹 모델은 현대 축구화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요즘은 ‘꿈은 이루어 진다’는 말이 현대축구화를 두고 한 말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최초로 시도된 로토사의 끈 없는 슬립온 형식의 축구화 그라비티시리즈, 축구화 최초로 인조가죽을 이용해 경량성의 극대화 시킨 나이키의 머큐리얼 베이퍼시리즈 등이 바로 그것이다.(*)= 글 왕연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