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 중앙일보 2024년 9월2일 기사 '서울대·의대 합격이 목표? “그러다 무너져” 1%의 경고 [최상위 1%의 비밀 ⑤'를 3회에 나누어 올립니다.
👊 공부에도 의리가 있다
한승연(서울대 영문학 22학번)씨는 어릴 적부터 주관이 뚜렷했다. 좋고 싫은 게 명확해 무엇이든 단순했다. 공부도 그랬다. 좋은 건 파고들고, 싫은 건 쳐다도 안 봤다. 호불호 강한 한씨가 공부에 빠져든 이유는 간단했다. 그건 바로 재미다.
부모님은 그런 한씨의 특성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그래서 늘 한씨에게 선택권을 줬다. 뭔가를 강요하면 그가 반항할 거라는 걸 알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세 식구가 자주 도서관에 갔는데,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책을 권하거나 골라주지 않았다. 스스로 고른 책을 보게 했다. 그렇게 책을 골라 보다 어느 날 우연히 영어 원서를 집어 들었는데, 하필 오디오북이었다. 오디오북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재미가 있으니 시키지 않아도 반복해서 듣고 읽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영어에, 공부에 빠져들었다.
국제고에 진학하기로 한 것도 한씨였다. 중학교 3년간 객관식 시험으로 평가하는 수업 방식에 도무지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국제고에선 과제 해결력을 높이 평가했다. 관심 분야를 탐구하고, 그 과정을 평가받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문학을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좋아하는 공부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났다.
한데 막상 고등학교 진학 후 복병을 만났다. 바로 불안이었다. 전국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였지만, 그의 성적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교 3등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완벽주의에서 비롯된 강박이 문제였다. 특히 시험 기간이 되면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0.01점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상황에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답안 마킹 하나도 조심해야 하는 객관식 평가가 있으면 그는 더 예민해졌다.
강박은 자책으로 이어졌다. 하나라도 틀리면 자책이 떠나질 않았다. 더 꼼꼼히 외우지 않아서, 성급하게 답을 골라서…. 끝이 없었다. 그럴수록 더 완벽해지려고 애썼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쉼표 하나까지 모조리 외웠다. 그렇게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시험 기간만 되면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끼니를 거르고 잠을 자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승연아,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던 한씨를 일으켜 세운 건 부모님이었다. 시험 기간이면 매일 불안에 떨며 우는 한씨에게 부모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 자신을 믿으라”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그 말 한마디가 그에겐 동아줄 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진정되자 그는 공부하는 이유를 다시 돌아봤다. 그제야 불안 때문에 보이지 않던 영어가, 영문학이 눈에 들어왔다. ‘맞아. 나 영어 너무 좋아했지’ 하고 깨닫자 불안한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공부에, 성적에 압도돼 수렁에 빠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어릴 때부터 너무 좋아하던 영어’였다.
한씨는 미국이나 영국으로 연수를 가 문학을 공부하려고 준비 중이다. 영문학을 바탕으로 예술 작품을 기획하고 창작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더 깊이 있는,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면 해야 할 것들만 보여요. 그것들에 압도되면 불안에 빠지고요. 그러지 않으려면 늘 공부하는 이유를 생각해야 해요. 결국 내가 즐거우려고 하는 거잖아요. 나와의 의리죠.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4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