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생각해 보는 말씀: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0절 말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1. 교회 안에서 성경을 함께 묵상하고 그 내용을 나누는 것의 중요성
2. 성경을 문맥 가운데서 보려는 노력의 중요성
3. 마태복음 18장 15절~20절 안에서 본 위 구절
4. 마태복음 18장 전체 안에서 본 위 구절
5. 공동체 안에 계셔서 일하시는 하나님
1. 교회 안에서 성경을 함께 묵상하고 그 내용을 나누는 것의 중요성
먼저, 교회 안에서 성경말씀을 서로 나누는 것은 언제나 유익한 일이며 권장할 일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감동을 나눌 때 우리는 함께 유익을 얻습니다. 그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는지를 소그룹 가운데서 나누는 일은 우리 모두를 한 마음으로 묶어줍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대한 궁금한 내용을 발견했거나 우리의 일상적인 나눔 속에서 또는 메시지를 전하는 분의 말씀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에도 서로 나누는 것이 우리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며 그 말씀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반성적 생각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 가운데서 모이고 서로를 대한다면 성경말씀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진리의 문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성경에 대한 해설이나 이해 그리고 전달과 적용에 대한 타당성을 깨어 있는 생각으로 나눈다면 우리의 모임은 더욱 풍성해지고 점점 맑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관찰하고 깨달은 성경말씀이 모이면 한 두 사람의 것보다 더 풍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다양성의 아름다움으로 생명을 보존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사회는 더욱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바이러스나 도전에 대한 단 하나의 처방이 아니라 다양한 처방을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약농업으로 한 종류의 식물로 획일화된 들판과 다양한 생명으로 가득한 들판은 관점에 따라서 그 풍성함이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도 목회자나 한 두 사람의 관점만으로 운영되고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용기를 내어 생각을 공동체와 나누려는 이주훈 집사님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그 본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이런 시도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을 문맥 가운데서 보려는 노력의 중요성
글이든 말이든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말도 어떤 상황 가운데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을 문맥 가운데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사실 설교를 준비할 때도 가장 먼저 할 일이 그것입니다. 전후 사정을 살피고 더 큰 맥락을 살피고 그리고 성경 전체 메시지 안에서 그 구절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성경을 대할 때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전후 맥락을 충분히 살피지 못하고 말씀을 인용하다 보면 다른 맥락 가운데로 그 말씀을 가져다가 문자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오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오류가 중간에 교정되지 않는다면 그 오류는 개인의 삶에서 그리고 우리 공동체 가운데 그릇된 전통이 됩니다. 개인의 삶에 일어난 오류는 편견으로 굳어지게 되며 공동체에 일어난 오류는 집단지성의 마비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 교제하고 생각을 수용하고 검토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성숙하며, 공동체도 다른 생각을 수용하고 검토하며 공동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건강해집니다.
위의 구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도 우리 적은 무리가 모인 곳에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위로의 말씀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개개인과도 함께 계십니다. 벧엘에서 돌 베개 베고 자면서 두려움 가운데 있던 야곱 한 사람에게 주님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모세에게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신앙의 신실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물론 두 세 사람과도 함께 계시며, 나아가 그런 개인과도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위 구절에서 ‘두 세 사람’이라는 말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마태복음 18장 19절의 말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는 구절도 합심기도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생각해 볼 대목입니다. 즉, 합심기도는 더 응답이 잘된다는 것입니까? 하지만 엘리야의 기도는 850:1의 경쟁에서 이긴 한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그 본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마태복음 18장 15절~20절 안에서 본 위 구절
위 본문에서 다루는 주제는 ‘공동체 안에서 범죄한 어떤 사람에 대한 대응’입니다. 그 사람의 범죄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의 범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경우일 것입니다. 그것이 윤리적인 것이든 개인에게 피해를 준 것이든 그 범죄를 그냥 두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을 만나라고 합니다. 뒷담화나 비방을 만들어 소문을 내지 말고 직접 그 사람을 만나서 권면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이 돌이키면 그 형제를 얻은 것입니다. 즉, 그를 죄에서 건져내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가운데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직접 권면하는 것을 듣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려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 때는 다시 온 공동체에 소문을 내거나 뒷담화를 하지 말고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그 사실에 대하여 하나씩 증명하라고 합니다. 즉,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니 너는 그 길에서 돌이키라는 권면입니다. 즉, 권면하는 사람이 어떤 사적인 감정으로 이렇게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권면한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이 마음을 돌이키면 다시 한 형제를 얻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두 세 사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는 교회에 말하여 교회의 권위로 그 사람에게 다시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사람을 불러 자세히 말을 듣고 한 사람이 사적인 감정으로 두 세 사람을 부추겨 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인지 살피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다시 교회의 권위와 사랑으로 그 사람을 권면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을 출교하라는 말입니다. 즉, 세리와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치리(治理)입니다.
그렇게 한 형제를 바로잡고 그를 거짓과 불의에서 구원하려고 할 때 교회가 땅에서 결정하면 하늘에서도 그 결정대로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입니다. 이는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권세입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매고 푸는 권세를 위임 받았습니다(마 16:19). 그것은 다시 요한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 20:23)
그런데 주님은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그 형제를 권면하는 자리에도 함께 계십니다. 교회의 권세를 인정하실 뿐 아니라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두 세 사람이 한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그 곳에도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임이든 형제를 권면하는 자리든 서로에게 사랑과 진심을 가지고 대한다면 그곳에는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이나 일이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4. 마태복음 18장 전체 안에서 본 위 구절
이제 마태복음 18장 전체를 살펴봅시다:
1~4: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다.
5~10: 어린 아이처럼 작은 자 하나라도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소중히 대하라. 거기에 상급이 있고 거기에 심판이 있다. 차라리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할지언정 연약한 한 영혼을 해하지 말라.
12~14: 일백 마리 양을 가졌어도 잃은 양 하나를 아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중의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15~20: 한 사람이 범죄하여도 세 단계의 과정을 걸쳐서 그 영혼을 구하고자 노력하라. 쉽게 그 사람을 단죄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21~35: 돌이키는 형제를 끝까지 용서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너희도 회개할 때 그렇게 많이 용서를 받지 않았느냐?
마태복음 18장은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사실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사람 때문에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어린 아이처럼 약한 사람이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하트마 간디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한 나라의 위대함은 가장 약한 사람들을 그 나라가 어떻게 대우하느냐로 드러난다.
A nation’s greatness is measured by how it treats its weakest members.
Mahatma Gandhi.
그러므로 마태복음 18:15~20은 교회 공동체가 연약한 영혼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삼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 영혼을 구원하라는 권면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서라도 그 양을 찾으러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교회의 권세 또는 교회의 치리권을 보장하는 말씀으로도 인용됩니다. 교회에게 그런 권세가 있지만 18장 전체적으로 보면 교회 공동체가 어떤 마음과 목적으로 그 권세를 행사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교회의 치리는 그 영혼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요 살리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5. 공동체 안에 계셔서 일하시는 하나님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일깨워줍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을 하여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세우라고 권면합니까? 가장 연약한 영혼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범죄한 영혼이라도 세심하게 살피고 권면하여 구원함으로 공동체가 세우라는 권면입니다. 그 영혼이 공동체 가운데서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동역자 관계에서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을 좇아 하되 서로의 의견이 상충할 경우에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다툼과 허영으로 일하지 말고 원망과 시비가 없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일하라는 권면입니다(빌 2:3~5). 특히 이 권면은 주 안에서 동역자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향합니다(빌 4:2).
우리가 소그룹 모임을 가질 때 공동체를 세우는 교훈을 기억합시다. 가장 약한 영혼을 대하는 법을 말씀하는 마태복음 18장, 동역자 간에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는 권면인 빌립보서 2장~4장을 늘 생각합시다. 그것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늦은 밤 평안을 기원합니다.
조해강 목사 드림.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