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1]
1-1. 헛힘(?) 쓰지 마세요
축구 경기에서 득점 없이 0-0 무승부를 기록한다면
선수들은 90분간 아무 소득 없이 힘만 낭비한 꼴이 된다.
이런 경우 선수들은 ‘헛힘’을 썼다고 해야 할까,
‘헛심’을 썼다고 해야 할까. 헷갈리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힘’이라고 한다.
‘힘’의 사투리는 ‘심’이다.
따라서 보람 없이 쓰는 힘을 의미하는 단어로 ‘헛힘’이 표준어,
‘헛심’이 사투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헛힘’은 ‘헛심’의 원말로, ‘헛심’이 표준어다.
‘등힘, 손힘, 안간힘, 황소힘’ 등은 ‘힘’이,
‘뒷심, 뚝심, 뱃심, 입심’ 등은
‘심’이 붙은 형태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힘’이 표준어이고 ‘심’이 사투리라면
‘심’이 뒤에 붙는 말은 모두 사투리가 돼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심’의 본딧말은 ‘힘’이다.
‘힘’은 세월이 흐르면서 구개음화를 거쳐
좀 더 발음하기 쉬운 ‘심’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지역에서는
‘심’이란 말이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서울을 중심으로는 ‘힘’이 주로 쓰이고 있다.
표준어는 서울말을 기초로 해 정해지다 보니
‘힘’은 표준어가 되고, ‘심’은 사투리가 됐다.
그러나 서울말에서도 합성어의 경우 ‘심’이 쓰이는 것이
적지 않아 이를 표준어로 인정하는 경우가 늘었다.
어떤 때에 ‘힘’이 붙고, 어떤 때에 ‘심’이 붙는지
일정한 규칙을 찾아내긴 힘들다.
‘헛힘/헛심’의 경우도 헷갈려 ‘헛힘’이라 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헛심’이 훨씬 발음이 편하므로 발음이 편리한 형태가
표준어라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최근 제정된 표준어는 ‘밥심’과 같이 발음의 편리를 좇아
‘심’이 붙는 경우가 많다.
1-2. 왜 밥을 않(?)먹을까
인터넷에서 검색하다 보면
“아이들이 왜 이리 밥을 않먹을까요”
“않아픈 수술” “오늘은 실수 않했다” 등과
같은 문장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작성한 뉴스에서조차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
유류세 인상 검토 않하고 있다” 등과 같은 사례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런 문장들은 ‘않다’의 ‘않-’과 ‘안’을 구별하지 못해 생긴 오류들이다.
‘않-’과 ‘안’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않다’는 ‘아니하다’의 준말이고,
‘안’은 부사 ‘아니’의 준말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않다’는 “그는 사흘째 말을 않는다”에서처럼 혼자서 동사로 쓰이거나
“그는 식사 때 물을 먹지 않는다”
“그는 그리 키가 크지 않다”처럼 동사(먹다)나 형용사(크다) 뒤에서
‘-지 않다’의 형태로 쓰여 앞말의 내용을 부정한다.
‘않다’가 ‘아니하다’의 준말이므로 결국 ‘않-’은 ‘아니하-’다
앞에 나온 문장들에 이를 바꿔 넣어 보자.
“왜 밥을 아니하먹을까요”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밥을 아니 먹을까요”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때는 ‘않먹을까요’가 아니라 ‘안 먹을까요’가 옳은 것이다.
이때 ‘안’은 부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않아픈 수술’ 역시 ‘아니하아픈 수술’이 아니라
‘아니 아픈 수술’이고 ‘실수 않했다’도
‘실수 아니하했다’가 아니라 ‘실수 아니 했다’이므로
줄이면 ‘안 아픈 수술’ ‘실수 안 했다’가 된다.
뉴스에서 인용한 ‘검토 않하고’도 똑같은 이유로
‘검토 안 하고’로 쓰는 게 옳다.
1-3. 그러다 / 그렇다
‘그러지 않다’와 ‘그렇지 않다’는 많은 사람이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것을 알려면
‘그러다’와 ‘그렇다’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러하다’의 준말로
‘상태, 모양, 성질 따위가 그와 같다’는 뜻이다.
뜻풀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하다(=그렇다)’는 품사가 형용사다.
‘그러다’는 ‘그리하다’의 준말로
‘상태, 모양, 성질 따위가 그렇게 되게 하다’
곧 ‘그렇게(=그러하게) 하다’는 뜻이니 품사는 동사다.
‘그리하다’나 ‘그러하다’로 사용하면
혼동을 일으키지 않다가도 ‘그러다’나
‘그렇다’로 쓰면 헷갈리는 이가 많다.
다음 예문을 보자.
“이 학습법으로 그는 서로 다른 모형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해서
무엇이 효과가 있고 무엇이 효과가 없는지,
어떤 것이 함께 어우러지고 어떤 것이 그렇지 못한지,
현실의 혼돈에서 벗어나 우뚝 서는 것이 어떤 기분이고
그렇지 못할 때 어떤 기분인지 깨달을 것이다.”
예문에는 ‘그렇지’가 두 번 나온다.
앞의 ‘그렇지’가 가리키는 것을 밝혀 쓰면
‘함께 어우러지지’이고,
뒤의 ‘그렇지’는 ‘우뚝 서지’를 대신하고 있다.
‘어우러지다’와 ‘서다’가 동사이므로 이들을 가리키는
‘그렇다’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예문 앞의 ‘그렇지 못한지’는 ‘그러지 못하는지’로,
뒤의 ‘그렇지 못할’은 ‘그러지 못할’로 고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다’는 ‘그렇게 하다→그리하다→그러다’로,
‘그렇다’는 ‘그러하다→그렇다’로 줄어든 사실과 함께
‘그러다’는 동사고 ‘그렇다’는 형용사라는 점을 기억하면 알기 쉽다.
1-4. 불은 댕기셔야죠
“저쪽에선 안 되지만 길 건너 이쪽에서는 불을 당겨
담배를 피워도 단속하지 않아요!”
“담배에 불을 댕기려다 서초구청 직원의 금연 안내에 따라 껐어요!”
서울 강남대로를 중심으로 서초구 구간은 금연구역,
강남구 구간은 아직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데 따른 혼란이다.
큰길 하나를 두고 금연구역과 비금연구역으로
나뉜 혼란만큼이나 ‘불을 당기다’와
‘불을 댕기다’도 혼동하는 표현 중 하나다.
어떻게 쓰는 게 맞을까?
“담배에 불을 댕기려다”와 같이 사용하는 게 맞다.
“불을 당겨”의 경우 “불을 댕겨”로 바루어야 한다.
불(火)과 관련해 ‘당기다’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불이 옮아 붙다 또는 불이 옮아 붙게 하다는
뜻의 동사는 ‘댕기다’이다.
“서성이는 그의 모습이 내 호기심에 불을 댕겼다”
“누군가 부싯돌로 불을 댕겨 주면 언제든지
불이 붙을 태세다”처럼 사용한다.
‘당기다’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것이 당긴다”와 같이
입맛이 돋우어지다는 의미로 쓰인다.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 저절로 끌리다,
밀다의 반대말로 물건 따위를 힘주어
일정한 방향으로 가까이 오게 하다,
정한 시간·기일을 앞으로 옮기거나 줄이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발음과 어형이 비슷해 혼동하기 쉬운 말로 ‘땅기다’도 있다.
“건조한 날씨 때문인지 피부가 땅긴다”처럼 몹시 단단하고
팽팽하게 되다는 의미로 쓰인다.
불과 관련한 말에는 ‘댕기다’, 상처·신체 부위가 아프거나 켕기는
느낌이 들 때는 ‘땅기다’, 그 외엔 ‘당기다’가 쓰인다고 생각하면 쉽다.
종종 ‘땡기다’는 말도 사용하지만 이는 표준어가 아니다.
1-5. 가시 돋힌(?) 말 마세요
악성댓글은 어떤 대상에 대해 모욕감과 정신적 충격을 주고
개인의 생명을 앗아 가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이야기한다는
특성 때문에 가시 돋친 말들이 오가기도 한다.
말 속에 상대를 공격하는 뜻이나 내용이 들어 있을 때
이처럼 ‘가시 돋친 말을 한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가시 돋힌’이라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속에서 생긴 것이 겉으로 나오거나 나타나다’는
의미를 지닌 ‘돋다’에 접사 ‘-히-’를 붙여 피동 표현을 만든 것이
‘돋히다’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잡다’에 ‘-히-’를 붙여 ‘잡히다’,
‘먹다’에 ‘-히-’를 붙여 ‘먹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돋히다’도 맞는 말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돋히다’는 잘못된 표현이다.
‘돋다’는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타동사가 아니라 동사가 나타내는
작용이 주어에만 미치는 자동사이므로 ‘-히-’를 붙여
피동 표현으로 만들 수 없다.
‘가시 돋힌 말’은 ‘가시 돋은 말’ 또는 ‘가시 돋친 말’로 바꾸어 써야 한다.
‘돋치다’는 ‘돋다’의 피동 표현이 아니라 ‘돋다’에 ‘강조’의 의미를 더하는
접사 ‘-치-’를 붙여 만든 단어로, ‘돋아서 내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넘다’에 ‘-치-’를 붙여 ‘넘치다’, ‘밀다’에 ‘-치-’를 붙여
‘밀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용법이다.
“매서운 추위에 전기장판이 날개 돋힌 듯 팔렸다”에서와 같이
‘날개 돋힌 듯’이란 표현도 흔히 사용되고 있으나
이 역시 ‘날개 돋친 듯’으로 써야 바르다.
- 중앙일보"우리말 바루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