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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김근주
목사
교회에서 나고 자란 ‘모태 교인’ 나성장 씨는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충실히 살아 왔다.
“록펠러처럼 십일조를 열심히 해서 복을 받으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얼마 전 열린 춘계 심령 대부흥회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라’(말 3:10)에서도 큰 은혜를 받았던 나 씨는 최근 고민이 하나 생겼다.
우연한 기회에 얼마 전 숭실대 조성기 교수가 출판한 책 <십일조는 없다>(평단문화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교회에 속으며 살아 왔단 말인가. 당장 십일조 내는 걸 그만 두어야 하는 건가. 끙끙 앓던 나 씨가 애매한 것을 정해 주는 신학자, 김근주 교수를 찾았다.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십일조
나성장: 미치겠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십일조를,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해 왔는데, 조성기 교수가 십일조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교수님, 뭐가 맞는 말인가요?
김근주: 간결한 문제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척이나 만만치 않은 질문이군요. 십일조와 관련한 구약 본문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세세하게 말씀드리고 싶지만, 조 교수를 비롯하여 많은 분이 이미 의견을 제시하셨으니 일단 꾹 참고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사항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십일조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구약성경에 여러 차례 언급된 규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구약의 규례를 지켜야 할까요?
예수님 안에서 구약의 율법은 폐지되지 않았나요? 아니, 완성된 것이던가? 아무튼 구약 율법 규정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같은 윤리적 명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것 같긴 합니다.
그래요? 칼뱅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비롯하여 그간 교회는 구약 율법을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이라는 세 가지로 나누어 이해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의식이나 제사와 연관된 의식법은 신약 시대에 폐기되었습니다. 정치적 통일체로 존재하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시민법 역시 이스라엘 국가의 종결과 함께 효력이 사라진 것으로 여깁니다.
오직 도덕법은 영원히 보편타당한 가치와 구속력을 지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일면 타당해 보이면서도 만만치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개별 율법 규정이 세 범주 중 어디에 속하는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십일조 규례는 이 세 범주 중 어디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성전제사제도와 연관되었다는 점에서 의식법에 속하지 않을까요? 제사에 사용되는 다른 제물이나 헌물과 연관된다는 점에서도 그럴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십일조가 기업을 받지 않고 성전에서 근무하는 레위 지파를 위한 용도였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체제와 존재를 기반으로 한 시민법에 속하는 규례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아하, 그러고 보면 십일조 규례가 의식법이든 시민법이든, 신약 시대에는 그 효력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오늘날 십일조를 강조하는 일은 이른바 개혁교회의 전통과는 무관하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십일조와 더불어 그렇게 강조하는 주일 성수도 마찬가지겠지요.
구약의 안식일을 고스란히 신약에 적용하는 것인데, 안식일 법 역시 의식법인지 시민법인지 구분하기가 애매합니다. 어떤 이들은 안식일 법이 십계명에 있으며, 십계명은 도덕법이라는 이유로 안식일 법 역시 영원불변한 도덕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 역시 너무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주일에 적용하여 강력하게 강조하는 한국교회가 안식일의 확장인 희년에는 지극히 작은 관심조차 없다는 점에서도, 우리 교회의 안식일 강조는 원칙에 입각했다기보다는 교회의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온 논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약 율법을 셋으로 구분하는 방법에 수긍할 만한 점이 있긴 하지만, 이렇듯 어떤 규례를 무엇으로 분류할 것이냐를 판단하는 일은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은 율법을 전혀 그런 식으로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율법의 삼 구분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예수 안에서 구약 율법 전체는 그 효력이 다하여 폐지되었으며, 예수 안에서 구약 율법 전체는 그 의미가 새롭게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영역에 해당하는 규례이든 의식과 제의적 차원에 속한 규례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구약 말씀을 볼 때마다 그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적용될지를 계속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얘긴데, 이게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요?
그럼에도 구약을 읽을 때마다 궁리하고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구약을 정말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판단을 교역자에게 미루거나 맡겨 버리지 말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함께 나눌 때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올바로 세워지지 않을까요?
음, 십일조 문제에 관한 해답을 물었던 것인데, 혹 떼려다 혹 붙이게 생겼습니다.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십일조
다시 십일조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십일조는 예수 안에서 폐지되었고,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먼저 구약 시대에 십일조가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는지 살펴본 후에 오늘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민수기와 신명기에 언급된 말씀들을 보면,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기업을 받지 않은 채 성소 혹은 성전에서 복무하는 레위인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민 18:21~24)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었고,
그것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민 18:25~32) 이에 관해 민수기 본문은 십일조를 그들의 ‘보수’라고 명백히 적고 있기도 합니다.(민 18:31)
그런 점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기업 없이 살아가는 레위인들을 위한 구조적인 배려 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레위 지파가 기업을 받지 않는 대신 다른 지파들의 십일조를 통해 성전 봉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구조였군요.
그렇지요. 레위 지파 덕분에 사실 다른 지파들에게 돌아가는 기업의 양이 더 많아졌지요.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관계는 현실 속에서 땅 없는 레위인과 땅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외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고,
많은 경우 레위인들은 이리저리 떠돌고 방황하게 되어 성전 봉사의 직무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었습니다.(삿 17~18; 대하 29:5~7; 느 13:10) 레위인들은 언제든 가난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흔히 언급되는 가난한 자들의 목록에 레위인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가 이런 맥락이었을 것입니다.
신명기가 이 점을 잘 보여 주는데요, 민수기나 레위기와는 달리 신명기의 십일조 규례는 조금 독특합니다. 우선 신명기 12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개인은 하나님이 정하신 성소에 나아갈 때, 번제와 화목제 같은 다른 제사와 더불어 십일조를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드리고 즐거이 그 음식을 함께 나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즐거운 나눔에 가족뿐 아니라 노비도 함께하게 하고,
특히 기업 없는 레위인을 참여케 하는 일을 잊지 않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신 12:12, 18~19; 14:22~27) 곡식의 추수와 연관된 칠칠절과 초막절의 경우, 절기 때에 함께 즐거움에 참여할 이들로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신 16:9~15) 십일조를 드릴 때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마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매 삼 년째의 십일조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저축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신 14:28~29)
십일조도 추수한 소산에서 드리는 것이니, 신명기의 십일조 규례는 추수하는 날의 기쁨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나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이 되게 하라는 명령인 셈이군요.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 점에서 오늘날 우리 예배와 드림이 우리 이웃들에게도 기쁨과 즐거움의 날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특히 매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저축해 두도록 규정된 십일조였습니다. 신명기 26장에서는 토지소산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이스라엘이 유념해야 할 사항을 다시 한 번 일러 주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와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이 구절은 3년째 되는 해를 일러 “십일조를 드리는 해”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그해의 모든 십일조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인 칠십인경은 “두 번째 십일조”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3년째 십일조 외에 또 한 번의 십일조를 거두어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칠십인경을 따르자면, 3년째 해 이스라엘은 두 번의 십일조를 거두어야 하는 셈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점은 신명기에서의 십일조는 명확하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제도였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의 십일조 규례가 성전 봉사자인 레위인의 ‘보수’로서 그 성격을 보여 준다면, 신명기의 십일조 규례는 기업 없는 레위인을 비롯하여 성중에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배려로서 십일조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레위기에도 십일조 규례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레위기에도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요, 27장에서만 세 번 언급됩니다.(레 27:30~32) 레위기는 십일조를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규정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것이니, 거룩한 것이며 제사장을 포함한 레위인들에게 돌아감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그날이 오면 시체와 재가 있던 골짜기조차 여호와께 거룩한 곳이 될 것이며(렘 31:40), 말에 달린 방울과 고기를 삶는 솥에까지 ‘여호와께 거룩’이라는 글이 새겨질 것입니다.(슥 14:20~21) 이는 거룩의 정도가 일상과 삶의 온 영역으로 확장됨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므로 십분의 일만이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거룩하며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만 거룩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영역이며, 우리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소유입니다. 심지어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말방울까지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것이라는 진술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눈이 훨씬 더 넓어져야 함을 일러 줍니다.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 모두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여호와의 성물”인 십일조가 레위인과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거룩과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나눔이 놀랍게 결합되지 않습니까?
과연 무엇이 거룩일까요? 무언가 접근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 신성함, 삼엄함 등을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구약의 말씀은 여호와의 성물과 이웃을 향한 나눔을 단번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거룩한 것은 참으로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비극은 지속적으로 거룩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성물’이 이렇게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 십일조의 근본정신을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이르신 것(마 23:23)은 참으로 합당한 해석이지 않나요?
그렇군요. 거룩과 사회적 실천은 하나이군요. 음… 그래도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이 남아 있지 않나요? 말라기를 보면 분명히 십일조의 축복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십일조와 축복
좋습니다. 이제 말라기를 차근차근 다루어 봅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 3:8) 그 유명한 ‘도둑질’ 본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는 데서부터 출발해 봅시다. ‘봉헌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트루마’는 어원을 그대로 살리자면 ‘들어 올려진 예물’을 의미하고, 레위기에서 빈번하게 ‘거제’로 번역되곤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트루마’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몫이 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출 29:27; 레 7:34; 민 6:20; 31:29, 41, 52; 겔 45:6, 7; 48:10, 18) 앞서 이야기했듯이,
십일조 역시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십일조와 봉헌물’은 성전 봉사자들을 위해 드려진 예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십일조 역시 ‘트루마’로 표현됩니다.(민 18:24~29; 느 10:38~39) 이 점은 말라기의 본문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말라기는 레위인과 세운 언약에 대한 언급(말 2:4~6),
그리고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깨끗하게 하셔서 그들로 공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겠다는 말씀(말 3:3)을 통해 레위인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말라기는 제사장들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말라기 1장 6~14절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며 아무런 성의 없이 더러운 떡을 진설하고 병든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이 교회 회중을 향해 무성의한 예물을 책망하는 설교에 인용되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회중이 아닌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성전 문을 쾅쾅 닫아 버려서 저들이 제사 드리러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말 1:10) 제사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은 2장에서도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얼굴에 똥을 바르겠다고 선포하십니다.(말 2:3)
제사장에 대한 강력한 책망과 레위인에 대한 강조에 이어 등장하는 내용이 3장 7절 이하의 십일조와 관련한 언급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정결케 된 레위인들이 드리는 공의로운 제물은 기쁘게 받으시되, ‘너희에 대해서는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 선언되고 있는데,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말 3:5)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죄인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과부, 고아, 나그네는 구약의 십일조를 사용해야 하는 중요한 대상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 뒤이어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는 점은 우연은 아니겠지요.
그러므로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하였다는 것은 레위인과 이웃을 돌보는 데 사용해야 할 십일조를 소홀히 하는 이들, 그리고 그렇게 드려진 십일조를 제대로 분배하지 않는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인 셈이지요.
비슷한 시기를 다룬 느헤미야 13장을 살펴봅시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 사이에 당시 제사장이던 엘리아십은 레위인들에게 줄 십일조를 저장하는 방을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주었습니다.(느 13:4~9) 이것은 단지 도비야를 위해 방 하나를 마련해 준 데 그치지 않고, 레위인들에게 줄 십일조로 가득 채워졌어야 할 방이 텅 비어 있거나 혹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 주는 일을 등한시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은 십일조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레위인들이 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을 거론하고 있지요.(느 13:10) 이를 생각하면, 십일조를 올바르게 드리고 창고에 저장하는 일에 관해 말하고 있는 말라기서의 구절들은 일반인을 향해 제대로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이기 이전에 제사장을 향하여 과연 십일조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잠깐만요, 이 말씀이 십일조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십일조를 제대로 사용하라는 말씀이었다는 건가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십일조의 바른 분배와 사용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또 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 이하를 보면 십일조를 바르게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부어 주시고 토지소산을 풍성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는데, 십일조로 인해 하나님이 주실 복에 관한 말씀은 이 본문 외에는 신명기의 십일조에 관한 말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신 12:28; 14:29; 26:12~15; 참고. 16:15) 그리고 저축하는 십일조는 신명기의 3년째 드리는 십일조에서만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는데, 말라기 3장 10절 역시 창고에 저장하는 십일조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관됩니다.
아울러 가난한 자를 섬기는 십일조 규례가 ‘네 하나님 경외하기’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도 신명기와 말라기의 공통된 특징입니다.(신 14:23; 말 3:5) 그런데 신명기의 십일조는 이미 밝혔듯,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는 십일조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말라기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에 드려져서 레위인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저축하여 사용되어야 할 “모든 십일조”가 그 본래의 목적에 쓰이지 않게 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 제가 보는 성경에는 “모든 십일조”라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온전한 십일조” 아닌가요?
개역성경에 “온전한 십일조”(말 3:10)로 번역된 히브리말을 직역하면 ‘모든 십일조’입니다. 번역이 만들어 낸 의미의 발전이 놀랍지요?
충격적입니다. 비공개 1급 보안 문서를 열어 보는 듯합니다.
계속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것, 그래서 가난한 이에게 분배되어야 할 소유를 도둑질하는 행위가 일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9절의 말씀은 제사장 계층 내에서 비롯된 도둑질이 온 백성에게로 확산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모든 십일조가 올바르게 행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지키시고 그 땅을 아름답게 하십니다.(말 3:11~12) 그런 점에서 십일조 말씀은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대하는 삶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말라기의 시대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가지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제사는 그저 종교적인 의식에 불과했고, 정의로운 삶 역시 무의미할 뿐이며, 그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되고 번성한 삶을 사는 것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향해 말라기는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이 여전히 유효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때, 크고 두려운 날이 올 것임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십일조 말씀이 가난한 자에 관한 말씀과 함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십일조 말씀을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는 축복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완전히 새로운 날을 이루실 역사의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십일조를 제시하기 때문이지요.
말라기의 말씀을 오해하는 일이 유독 극심하군요.
이제까지의 긴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이스라엘의 소산 중에서 성전 봉사자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게 배분하도록 따로 떼어진 하나님의 성물이 바로 구약이 말하는 십일조군요. 이를 오늘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자면, 우선 우리에게 있는 재물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 사역자들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재물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 정도로 원칙을 세울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사역자를 세울 때에도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고 나눌 수 있는 정도에 맞추어 결단하고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흔히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더라 하는 식의 간증이 많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는 십일조로 인한 축복이라기보다는 재물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 이웃과 함께 나눈 이들이 누리게 된 은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십일조는 단지 개인을 향한 윤리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온전한 십일조가 공동체를 살리고, 우리 안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살리며, 이렇게 회복된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세한 문제들도 대략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오늘날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일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십일조의 용도가 사역자들을 위한 것이며 말라기 본문이 그 바른 분배에 관해 다룬다는 점에서,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사이의 사례비 격차야말로 말라기에서 이르는 ‘도둑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그렇게 모은 십일조를 가난한 이웃을 위한 일에 제대로 쓰는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십일조 사용은 비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요즘 십일조를 자신이 속한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 혹은 개인적으로 아는 선교사님에게 보내거나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러한 점도 원칙을 생각하면 답이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속한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가 과연 공동체 사역자들과 이웃의 가난한 자를 섬기는 데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미 충분하다면 당연히 다른 교회나 다른 단체에 보낼 수도 있겠다 싶네요.
좋은 생각입니다. 세전 십일조냐 세후 십일조냐 하는 고민도 있습니다만, 이 역시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하고, 그를 통해 사역자들을 세우고 이웃을 섬기는 데 쓰는 물질입니다.
그만큼 각자가 속한 공동체가 그러한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해야 함은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책임을 함께 나누어 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전이든 세후이든 내가 우리 공동체에서 어떻게 책임을 나누어 질지를 생각하며 결정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너스라든지 부수입 역시 중요한 원칙을 기억하고 각자 결정하면 되겠지요. 내가 누리는 기쁨을 모두의 기쁨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울이 이야기하는 ‘균등하게’ 하는 원리, 즉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 원리(고후 8:14~15)겠지요.
오늘 교수님을 만난 김에 그간 궁금했던 것을 다 여쭤 봐야겠습니다. 주일 헌금, 감사 헌금, 절기 헌금, 선교 헌금, 건축 헌금, 기타 특별 헌금…. 교회마다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성경에는 이렇게 많은 종류의 헌금이 나오지 않는 것 같은데요?
굳이 비교하자면, 구약 시대에도 번제가 있는가 하면 화목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목제 안에서도 감사제, 자원제, 서원제 같은 종류가 있었으니, 구약 시대에도 예물을 드리는 다양한 경우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제물의 공통된 특징은 예배자가 원하여 드리는, ‘자원하는 마음’이 기본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자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와 상통하는 마음이겠지요. 이와 더불어 이러한 재물은 대개 이웃과 나누는 ‘연보’로 표현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신약의 교회는 이웃을 섬기는 ‘연보’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사실 이렇게 명확한 바울의 말씀이 있는데도, 오늘날 교회에서 은근슬쩍 혹은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정성으로 드리는 헌금을 강조하는 행태를 보면 이 교회들이 과연 신약의 교회인지, 아니면 구약 시대의 성전에 거주하는 사람들인지 헷갈립니다.
성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요즘 하나가 이른바 ‘성전 건축’이 한국에서 유행하지 않습니까? 은행에 빚을 얻어 건축을 시작하면 교우들이 드리는 건축 헌금으로 변제해 나가는 오늘의 상황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우리 교우들이 이 힘겨운 세상에서 얻은 소득의 일부를 정성으로 드리는데, 어떻게 그 돈을 은행에 이자로 갖다 바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옛날 분들은 헌금을 ‘성도의 핏값’이라고도 부르던데, 어떻게 그것을 은행 이자로…. 더 다룰 가치조차 없는 얘깁니다. 교회 건축이 투자입니까? 수익을 내자는 활동인가요?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왜 하나같이 은행 빚을 내서 건물을 짓는 걸까요? 신약의 교회 정의가 있는데도 되지도 않게 구약의 성전을 운운하면서 교우들에게 헌금을 거두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질을 거두어 내는 방편의 하나로 주보에 십일조와 헌금을 한 사람의 이름을 싣는 일도 벌어지고 있지요.
너무 열 받으신 것 같은데요. 이건 어떤가요? 연말 정산 시에 교회에 헌금한 내역을 기부금 공제 서류로 떼어 제출하면 얼마간 환급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환급받는 금액이 쏠쏠하고 남들도 다 하니까 저도 그렇게 했지만, 늘 마음에 걸렸어요. 하나님께 드린 물질에 대해 공제를 받는다는 게 신앙적으로 옳은 일인지요?
국가가 만든 기부금공제제도 자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좋은 목적을 위해 재물을 사용한 일에 대해 국가가 세금을 거두지 않겠다는 취지가 아닌가요? 우리가 사사로이 이익을 거둔다기보다는 국가가 기부금을 낸 액수만큼은 세금을 덜 거두겠다는 것이니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환급받은 보너스 또한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공동체와 나누면 되지 않을까요?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이 없다면 공동체를 운영하기란 무척 어렵겠지요. 이 헌금 덕분에 교회는 사역자를 세울 수 있고, 그들을 통해 교우들이 든든히 세워지면서 세상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십일조로 대표되는 헌금은 꼭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를 지키지 않을 때 벌을 받는 율법 조항은 아니지만 공동체가 기쁨과 자원함으로 함께 참여함으로써 공동체를 세우고 이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게 하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주님 안에서 공동체를 생각하며 우리가 참여할 분량을 고민하고 결정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만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근주 느헤미야 연구위원, 푸른뜻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