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통화정책의 이해
통화정책은 국민경제에 적정량의 돈이 흐르도록 함으로써 지속성장과 공정분배에 기여하는 정책이다. 통화정책은 복잡하고 전문적인 영역이지만 기본 원칙은 돈의 양을 잘 관리해 돈의 값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돈인 시중 총유동성은 앞서 설명한 대로 측정하기도 통제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여러 중앙은행들은 통제가 가능하면서도 현실경제와의 관련성이 큰 통화지표를 찾아 이를 중점적으로 관리하거나, 금리 조정을 통해 돈의 양을간접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통화량 중심의 통화정책)
중심 통화지표를 설정하고 이를 조절 관리하는 통화정책은 1970년대 후반 많은 나라가 사용했다. 여기에는 통화가 중요하다는 프리드만 등 통화주의자들의 영향이 컸다. 사용한 중심 통화지표는 나라와 시기마다 다르다. 한국은 현금통화, 요구불예금, 정기예.적금 등이 포함된 광의통화(M2)를 주로 사용하였다. 현금통화(본원통화)와 요구불예금만 포함된 협의통화(M1)나 본원통화는 통제하기는 쉽지만 한국처럼 경제가 빠르게 변하는 나라는 불안정하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범위가 넓어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높고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M2를 중심 통화지표로 사용했다.
중앙은행이 통화량 관리대상인 중심 통화지표를 M2로 운용하더라도 직접 공급량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본원통화이다. 따라서 통화량 관리 통화정책은 본원통화의 변화를 통해 광의통화(M2)를 변화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조절하는 정책수단은 대출정책, 지급준비정책, 공개시장조작 세 가지가 대표적이다.
대출정책은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대출하는 금리와 조건을 변경해 본원통화의 양을 조절하는 정책이다. 대출금리를 올리거나 대출조건을 까다롭게 하면 금융기관이 빌려가는 돈이 적어진다. 이는 금융기관이 신용창조를 할 수 있는 재원이 적어지는 것으로 결국 통화량 축소로 이어진다. 반대로 대출금리를 내리면 통화량이 늘어난다. 중앙은행의 대출방식이 초기에는 금융기관이 기업에 할인해준 어음을 다시 할인(재할인)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대출정책을 재할인정책이라고도 부른다. 현재의 중앙은행 대출은 국공채와 어음을 담보로 하는 담보대출 형식으로 많이 이루어진다.
다음으로 지급준비정책은 금융기관이 예금의 일부를 예금자의 지급 요구 등에 대비해 현금이나 중앙은행 예치금으로 보유해야하는 비율, 즉 지급준비율을 조정하는 정책이다. 지급준비율을 올리면 앞서 설명했듯이 금융기관의 신용창조능력이 줄어 본원통화의 변화가 없더라도 통화량이 줄어든다. 또한 일반적으로 지급준비금은 수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급준비율을 올리면 금융기관의 수익도 줄어든다. 반대로 지급준비율을 내리면 금융기관의 대출가능 규모와 통화량이 늘고 수익도 좋아진다. 지급준비정책은 금융기관의 자금운용 규모와 수익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정책의 탄력성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정책이다.
공개시장조작은 중앙은행이 단기 금융시장이나 채권시장과 같이 다수의 시장 참여자에게 공개된 시장에서 국공채 등을 사고팔아 본원통화의 양을 조절하는 정책수단이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하면 채권가격이 올라 시장금리가 떨어지고, 채권매입 대금이 금융기관에 지급되므로 본원통화가 공급되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팔면 반대로 금리가 오르고, 본원통화와 통화량이 줄어든다.
채권을 매매하는 방식을 단순매매와 환매조건부매매 두 가지가 있다. 단순매매는 채권의 소유권이 완전히 이전되는 거래로 통화량을 기조적으로 늘리거나 줄일 때 사용한다. 환매조건부매매는 일정기간 후 정해진 가격으로 다시 매입하거나 매각할 조건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이는 채권을 담보로 일정기간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것과 비슷하고 통화량을 단기적으로 조절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으로 30일 환매조건부로 채권을 매입했다면 30일 동안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채권을 담보로 대출한 것과 거의 같다.
공개시장조작은 다른 정책수단에 비해 장점이 많다. 첫째, 시장에서 주어진 조건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장 친화적이면서도 중앙은행이 능동적으로 통화량과 시장금리를 조절할 수 있다. 둘째, 공개시장조작은 본원통화의 양을 미세하고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필요한 규모에 맞추어 채권매매를 하면 되고 실시 시기와 횟수, 조건 등을 수시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중앙은행이 채권매매 과정에서 시장참가자들과 계속 정보를 교환할 수 있어 정책 판단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개시장조작의 긍정적 효과는 금융시장이 발달되었어야 제대로 기대할 수 있다. 즉 중앙은행이 거래할 수 있는 채권의 종류와 만기 등이 다양하고 거래량도 많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공개시장조작 여건이 좋지 못해 한국은행이 직접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하여 거래채권의 부족 문제 등을 해결해 왔다.
통화량 중심의 통화정책은 1980년대 들어 급격한 금융혁신의 진행으로 새로운 금융상품이 등장하고 금융기관 간 영역이 무너지면서 유효성이 크게 저하되었다. 중심 통화지표가 시중 총유동성을 대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물가와 성장 등 실물경제와의 관계도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중심 통화지표를 바꾸어도 개선되지 않았다. 즉 돈의 역할을 하는 금융상품이 다양해지고 계속 변해 돈의 범위가 불안정해진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통화정책을 통화량 중심에서 금리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1990년대 중반이후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은 금리 중심 통화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