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mund Clowney's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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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s Mission VS Our Mission
Roland Allen
로랜드 알렌은 19세기 전환기에 중국에서 짧은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일하였고, 영국에 돌아와서 그 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 교구사제로 일하였다. 그는 교회, 선교, 학문분야에서 요직을 맡은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교 선교에 있어서 개혁과 갱신운동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예언적 메시지가 당시에는 거의 소홀하게 취급되었지만, 후대 세대에선 재발견되고 재평가되었다.
1. 로랜드 알렌의 생애
로랜드 알렌은 1868년 12월 29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성공회 사제였다. 하지만 로랜드 알렌이 어렸을 때 죽었다. 옥스퍼드 성 존 대학에 다녔고 다시 리즈 성직자 사관학굥서 앵글로 카톨릭 전통에 심취한다. 그리고 1892년 리즈 학교에 있을 때 그는 복음 반포회에 지원한다.
잠시 달링턴에서 사제로 사역하다가 1895년 북중국 선교회에 합류하게 된다. 북경의 작은 학교에서 원주민 사역을 위한 인재훈련의 책임을 맡았고, 또한 그 시기에 영국 공사관의 담당 목사로 있으면서 중국어 공부를 했었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에 모든 외국단체들이 외국군대들의 도움으로 벗어날 때까지 그는 영국 관할지에서 포로로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는 사건들을 직접 보면서 이에 대한 책도 쓰게 된다. 그 책이 ‘베이징 공사관의 포위(1901)’이다.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때 메어리 탈턴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후에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다. 1902년 북중국으로 다시 돌아와 용정에서 지방선교 목회직을 맡게되었다. 그러나 로랜드 알렌은 건강이 나빠져서 오래 사역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다시 귀국하게 되었다.
1907년 버킹험셔의 챌폰트 성 베드로 교회의 교구 목사직을 맡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양심상의 문제로 사임하게 된다. 이유는 영국 교회의 유아세례 규칙 때문이었다. 영국 교회의 규칙은 그리스도인인 부모들의 위임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성직자가 유아세례를 베풀도록 되어 있었다. 로랜드는 그것을 교회가 신앙 확신이 없는 부모들에게 성례전을 확대한 옳지 못한 견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회업무나 선교임무 같은 어떠한 직분도 맡지 않고 약 40여 년 동안 글을 쓰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고 자발적인 목회자로 섬겼다.
1932년 로랜드는 아들이 있는 케냐의 탕가니카로 아주 이사하여 사역했었고, 거기서 스와힐리어를 배워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임종 시까지 책을 쓰고 비평했으며,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은 늘 잊지 않고 있었다.
2. 로랜드 알렌의 책들
알렌은 짧은 선교사 경험과 교구목사로서의 체험을 토대로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면서 책을 냈다. 하지만 당대보다는 후대에 재평가를 받은 점이 많다.
1912년 알렌은 세계선교대회가 에딘버러에서 개최되고 2년 지난 후, 서방 선교 정책에 대한 짧지만 고민하고 관찰하여 쓴 책을 내놓는다. 그 책이 ‘선교 방법들: 사도 바울의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것인가?’이다. 이 책은 당시의 선교 정책과 실행에 대하여 깊은 안목과 관찰로 비판한 내용이 담아져 있고, 토착적이고 자급적인 교회의 세우는 것에 있어서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는 ‘선교 원리들’을 출판하였다. 1914년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시드니 클락을 만나게 된다. 시드니 클락은 로랜드를 월드 도미니언 출판사 내 조사 응용 신용부와 출판부에서 일하도록 고용하게 된다. 여기서 로랜드가 속해서 일한 이 조사 그룹은 한 선교단체에 매이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복음전파를 수치화하는데 공헌한 단체였다.
이때부터 책을 쓰고 기고문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다. 1917에 ‘오순절과 세계: 사도행전의 성령의 계시’를 출판했고, 1919년에는 ‘교육 원리들과 선교 방법들’을 내놓는다. 그리고 1927년에는 ‘자발적인 교회성장과 그 방해하는 요인들’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1930년에 유명한 작품 ‘자발적인 성직자의 사례’를 출판하게 된다.
3. 로랜드 알렌이 주장한 내용들
알렌의 사후에 편집권과 출판권을 가진 데이빗 페이턴은 로랜드 알렌의 기본 사상들을 이렇게 요약했다.
첫째, 복음 전파의 결과로 생긴 그리스도교 단체에 성경, 신조, 사역과 성례전을 양도해야 한다.
둘째, 사제와 목사는 성만찬을 인도하고 교인의 영적 은사들과 욕구를 조직하는 책임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말씀과 목회양육은 감독이 해야 한다.
셋째,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이웃 사회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삶과 메시지를 공유하도록 요청된다.
넷째, 현지 지도자들의 인간적 재능은 성령님이 충분히 이끌어 주신다. 현지 지도자들을 너무 많이 훈련시키지 말고 의존적이도록 이끌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외부에서 자본을 끌어 들이지도 말아야 한다.
다섯째, 이러한 일들을 아직 할 수 없는 교회는 아직 교회로 세워지지 않은 것이며 선교 대상지로 여겨야 한다.
여섯째, 감독과 그의 직원들은 다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가시적인 연결고리로 섬기고 감독할 중대한 책임이 있다.
로랜드 알렌은 그 당시 만연하고 있던 선교 패권주의와 식민지 확장 시대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구문화의 우월성과 그리스도왕국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시대에 있어서 급진적인 관념이었다.
그 당시 선교 관념은 강한 정신력과 교육을 받은 개척자들이 지배 성향을 가지고 전반적인 선교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신생 교회가 이교도와 미신에 변질되는 것을 막고 순수한 교리를 본존하기 위하여 신생교회를 통제하고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렌의 생각은 신생교회에 책임과 주도권을 양도하고 성령을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선교사들이 보았을 때는 무책임하고 너무 급진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알렌이 교회와 선교단체들의 구조와 정책을 비판한 것은 바울의 방법을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보여주었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와 선교 정책은, 하나님이 이끄시며 성령이 교통하심으로 연합시키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책임과 회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바라보는 시각과 우선순위가 다른 것 뿐이다.
다시말해 알렌이 생각한 교회 지도자들의 임무는, 교회가 성령을 식별하여 율법의 지배자가 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성령의 지배에 복종하도록 돕는 것에 있다.
알렌은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비판하고 책을 쓴 주제들은 성령의 은사들의 식별, 평신도 사역의 갱신, 평신도와 성직자를 위한 신학적 교육을 다르게 구성함, 세례 의미의 재고, 선교를 위한 회중들의 구조와 감독들의 역할 등의 주제들이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들이 사는 현지 문화와 사회를 그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이 있는 곳의 차이를 살펴보도록 자극하였다.
알렌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하기를 원했다. 스스로 돕는 신약시대의 자기 의존모델로 돌아갈 것을 제시한 것이다. 해외 자금에 의존하던 신생교회가 경제적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이 그의 방향이었다.
그래서 알렌은 의료사역과 교육에서부터 시작한 모든 전반적인 확장과 지원의 형태는, 결국엔 서구 선교사들을 거부하게 되고 추방되게 될 것이라고 예언까지 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비성경적인 것에 의존하는 교회, 특히 서구식으로 잘 양성된 전임 목회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가 생각한 성경적 교회는 바울이 모델이며, 이것은 현지 성도들이 스스로 선출한 ‘자원하는 목회자’가 재정과 정책을 스스로 결정해서 현지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알렌은 선교단체들이 교회개척보다는 교육과 의료기관을 세우는데 인력과 재원 규모를 늘리고 투자함으로써, 현지인들이 서구의 것을 수용하도록 하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리고 예배 중심이 교회 건물에서 성도의 가정으로 되돌려지게 될 때, 평신도 사역이 촉진되고 최고로 발휘될 수 있다고 급진적인 제안까지 한다.
또한 알렌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정에서 성만찬을 나누었던 것을 교회가 바꾸어 놓았고, 의식적인 것으로만 치우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알렌은 케냐에서 지내는 동안 성만찬을 그의 가정과 친구, 이웃과 더불어 향유했었던 것이다.
알렌의 현지인에 의한 삼자원리와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생각과 사상은, 후에 신학교와 선교훈련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도널드 맥가브란이 주도한 교회성장운동으로부터, 로마 카톨릭 교구 전도자인 빈센트 도노반이 주도한 동아프리카 마사이족 가운데서의 개척사역에까지, 폭넓고 다양한 운동과 사역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국의 등광순 감독은 중국에서의 삼자운동은 알렌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진술할 정도이다. 여기에 미국에서의 학생 자원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고 에콰도르의 성공회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알렌은 성경적인 선교원리를 선교현장에서 실현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만 주력할 것을 강조한 것이며, 교단 선교부와 독립 선교 단체들의 공생을 강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