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 가지 드러난 영적인 현상(靈的三顯)
고린도후서 5:10-19
人常欲誇肉身, 不欲誇靈魂. 靈內也肉外也. 人務外故常誇肉也. 求實言之, 則肉身無可顯之價値, 而但受主光而後, 有可誇也. 吾鄕有讚子翁, 子無可讚之實, 而父讚之, 人皆厭聞, 故言讚子翁也. 子善則父欲誇, 徒賢則師欲誇, 人若有善, 則何待誇而後顯也. 幽蘭在谷, 不以無人不芳. 子曰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人常敗於欲顯之地, 實卑而位高, 識淺而敎高, 才薄而任重, 皆危道也. 故主曰 勿坐高座, 故東洋老莊哲學, 以無我爲主. 深藏若虛, 名可名非名, 道可道非道云也. 我太宗大王, 欲見元天錫往雉岳山, 元天錫避而不見, 引避草西面, 太宗不得已, 使畵工模雉岳山而歸, 此皆惡顯之故也. 此謂之謙德, 而惡顯實非謙德也. 我仁祖大王反正時, 諸臣推仁祖入景福宮, 使登龍床, 仁祖再三讓之, 李适登床示範云. 适以不謙取禍, 仁祖以謙成, 然此所謂讓酒目射也. 今此惡顯者眞情也. 我所取之道, 比所讓之位, 尤有貴焉. 許由所讓之天下, 反不貴於許由所守之道. 與今世拜金拜偶者, 比之則何等天壤也? 吾等當愼不義之貴也. 今吾信徒之顯現, 當在何處也. 有三種先知顯于主前, 保羅言已顯者, 言神無所不在也. 人欲避神得乎? 욥曰 入地神亦在, 入海神亦在, 無處不在云. 古人聞道不信神存在, 其業泳海採物, 故一日入于海底, 拾一蚌, 則蚌一書出而見之, 乃聖書也. 乃悟曰 神爲我投書于海中, 而使我見之乃信主云. 故神無不在也. 由此觀之人可避神乎? 故保羅言己顯主, 常以此意訓徒, 非一非再, 入汨房祈禱言于隱密, 如升聖殿告云, 卽救吾首一髮也. 故吾人當思吾在神房, 神在吾房, 凡事祐神後可無愆也. 吾曷爲妄言妄行, 皆神所在故也. 故吾所行如寫眞, 笑則笑寫之, 怒則怒寫之, 吾之顯于神前如寫眞也. 吾之祈禱何故也? 卽認神聽之故也. 我之心靈與神交通, 信念方篤, 若不交通則皆僞也. 僞神不如不信, 其人不爲信用萬事皆僞也. 其所顯于人之良心也. 我之甘甘言行, 無不顯于人之良心何也? 人責己則暗責人則明故也. 我對人, 人常以良心對我, 而善惡無不知之, 有惡卽知有善卽知, 非但卽知, 至後數十日或數十年, 記人之善惡也. 言可不愼乎? 最不可誣者良心也. 保羅曰 愛者何也? 卽出乎淸潔之良心也. 良心不淸潔而何謂精潔也? 良心雖潔而蔽良心者物欲也. 物欲一蔽而良心亦混, 故不能發現其良能也. 人幼而呼母良心也, 壯而敬兄亦良心也. 我常顯于如此之良心, 鑑懸于空, 姸媸在彼, 我黑則黑照, 我白則白照, 人皆見雪而謂白者我白也, 見血而謂紅者我紅也. 故我白乎我紅乎, 昭不可掩, 故十手所指十目所視其嚴乎. 故曰 莫隱乎隱也. 人雖惡也, 視人則以良心也. 可不愼乎? 其次則顯于基督之坮前, 此指審判而言也. 黙示言 前三年半, 後三年半大亂, 而主臨空中, 已寢者現存者, 皆被入雲中而見主也. 非但後日審判也, 現世亦有審判也. 猶京甚惡, 故主後六十年主臨審判也. 法老(Pharaoh,파라오)甚惡, 故主臨宮中而審判, 災及埃及之長子, 阿伯(Abraham, 阿伯拉罕)謂妻謂妹, 故其子亦謂妻謂妹, 야곱欺父故, 亦見欺于其子, 요셥亦皆報其所報也. 不可一毫差錯, 謂之無審判可乎? 故人顯于坮前, 人有罪顯于裁判長之坮前, 亦皆視其一例也. 人有善不得報, 有惡不免報, 是豈眞理乎? 眞理毫理不差, 主以洪水審判, 노아時之人, 亦一例也. 요나入于巨魚腹中, 亦一例也. 然則吾人可避神乎? 神不可避, 吾之言行合于眞理, 則自可合神之意, 此與主之三顯, 信者之三顯, 互相照左無至爽實.
사람은 늘 육신을 자랑하려고 하면서 영혼은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안에 있고, 육체는 밖에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표현하려고 힘쓰므로 늘 육체를 과시합니다. 진실을 구하기 위하여 말한다면 육신은 가히 드러낼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빛을 받은 후에라야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고향에 자식 자랑을 일삼는 늙은이가 있는데 그 자식이 그리 칭찬할 만한 내용이 없는데도 그 아버지는 칭찬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자식 칭찬하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찬자옹(讚子翁)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식이 착하면 아버지가 자랑하고 싶고, 학생이 훌륭하면 스승이 자랑하고 싶습니다. 사람에게 만일 훌륭한 점이 있으면 어찌 자랑하기를 기다려 드러나겠습니까? 옛글에 ‘향기로운 난초가 깊은 골짜기에 있으면 사람이 없어도 향기가 난다[幽蘭在谷, 不以無人不芳]’라고 하였고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데서 실패를 합니다. 실속은 낮아야 하는데 지위만 높고, 지식은 모자라면서 학벌만 높으며, 재능은 모자라는데 중한 임무를 맡는 것은 모두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동양의 노자와 장자의 노장철학(老莊哲學)은 무아사상(無我思想)을 주장하여 자신의 존재를 마치 텅 빈 곳에 감추어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名可名非常名]이고, 도는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태종대왕이 고려 말의 은사(隱士)인 원천석(元天錫)을 만나려고 치악산에 갔으나, 원천석은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원천석이 초서면(草西面)으로 숨어들어가자 태종은 부득이 화공을 시켜 치악산을 그려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드러나기를 싫어한 까닭입니다. 이를 일러 겸손의 덕[謙德]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나타나기를 싫어하는 것은 실로 겸손의 덕이 아닙니다.
우리 인조대왕이 반정(反正)할 때에 여러 신하들이 인조를 모시고 경복궁에 들어가서 용상에 올려 앉히려고 하자 인조는 제삼 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괄이 용상에 올라 시범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괄은 겸손하지 못하여 뒷날 역적의 화를 당했고 인조는 겸손으로써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른바 술을 양보하면서 눈총을 준 것[讓酒目射]과 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타나기를 싫어하는 것은 진정입니다. 내가 취하려고 하는 도가 양보한 지위보다 더욱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은사인 허유(許由)가 요임금이 주려는 천하를 양보한 것은 허유가 지키려는 도보다 천하가 덜 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돈을 중시하는 배금(拜金)사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배우(拜偶)사상을 가진 자들과 비교해 볼 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닙니까?
우리는 마땅히 의롭지 못하게 얻은 귀한 신분을 신중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도가 드러나 보일 곳은 마땅히 어디 있어야 합니까?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먼저 주의 앞에 나타남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주께서 자기에게 나타났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게 되겠습니까? 욥이 말하기를 ‘땅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며, 바다에 들어가도 거기 계셔서, 하나님은 없는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종교적 도리를 들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직업은 바다에서 해물을 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바다 밑에 입수했다가 조개 하나를 주웠는데 그 조개에는 책이 있었습니다. 밖에 나와서 보니 그것은 <성서聖書>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깨닫고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책을 바다에 넣어서 나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바울은 주께서 자기에게 나타났다고 말하며, 이 뜻을 가지고 신도들에게 가르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히 기도하기를 마치 성전에 올라가서 고하듯 하여 자신의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고 다 구하도록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도와야 허물이 없습니다. 내 어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겠습니까? 모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모두 사진과 같습니다. 웃으면 웃는 모습이 찍히고, 성내면 성낸 모습이 찍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은 사진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곧 하나님이 들어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 마음속의 영혼은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신념이 돈독하였는데도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였으면 모두 속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믿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그 사람을 신용할 수 없으면 만사가 다 거짓입니다. 사람의 양심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나의 달콤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양심 속에 나타나지 않는 게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은 자신을 나무랄 때는 어둡지만 남의 잘못을 나무라는 일은 밝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상대할 때 사람들은 늘 양심을 가지고 나에게 대합니다. 그러니 나의 선악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악한 일이 있어도 곧 알고, 좋은 일이 있어도 곧 알게 됩니다. 알 뿐만 아니고 그 뒤 수십 일 또는 수십 년까지도 나의 선악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신중하게 안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속일 수 없는 것이 양심입니다. 바울은 ‘사랑은 무엇인가? 바로 청결한 양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양심이 맑고 깨끗하지 못하면 어떻게 순수한 결백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양심이 비록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 양심을 가리는 것은 물욕(物欲)입니다. 물욕이 한번 가리면 양심이 혼탁해 집니다. 그러므로 그 양심의 능력을 나타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어릴 때 어머니를 부르는 것도 양심이고 자라서 형을 공경하는 것도 양심입니다. 나는 늘 이와 같은 양심에 드러나 있습니다. 공중에 거울을 달아놓으면 곱고 미운 게 다 그 안에 있습니다. 내가 검으면 검게 비치고, 내가 희면 희게 비칩니다.
사람들이 눈을 보고 희다고 하면 나도 희게 보이고, 피를 보고 붉다고 하면 나도 붉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흰 것과 나의 붉은 것이 가릴 수 없이 환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열 사람이 손가락질 하고 열 사람이 보는 것은 엄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숨길 수 없는 것을 숨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양심이어야 하니 신중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다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심판을 지적해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말하기를 ‘장차 3년 반과 뒤로 3년 반이 크게 어지럽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공중에 나타나실 때, 이미 죽어서 잠자는 자와 현재 살아 있는 자가 모두 구름 속으로 주님에게 불려 올라가 주님을 보게 됩니다. 이는 비단 뒷날의 심판일 뿐만 아니라 역시 현세의 심판이기도 합니다.
애굽의 국왕인 파라오가 매우 악하므로 주님은 궁중에 임하여 심판하셨습니다. 재앙은 애굽의 장자에게 미치고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도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그 아버지를 속였으므로 역시 그 자식에게 속임을 당했습니다. 요셉도 역시 그가 갚은 만큼 그 갚음을 다 받았습니다. 털끝만큼도 어긋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없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사람들이 그 죄가 재판장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역시 그 한 예를 보인 것입니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한 것이 보상 받지 못 하더라도 악한 일을 하고도 보응 받지 못한다면 이게 어찌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진리는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홍수로 심판할 때 노아가 살던 때의 사람이 그 한 예가 되며, 또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간 것도 그 한 예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진리에 부합되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세 번 나타나신 삼현(三顯)입니다. 이것이 서로 증거가 되어 사실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