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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그의 애인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제우스의 정실(正室) 헤라는 남편의 아이를 낳을 시앗 세멜레를 파멸시킬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헤라는 이 묘안을 실행에 옮길 요량으로 세멜레의 늙은 유모 베로에(진짜 베로에는 이 때 에피다우로스에 가 있었다)로 둔갑하여 세멜레를 찾아가, 애인으로 내왕하는 이가 제우스임에 틀림없느냐고 여러 차례 따져 물었다. 세멜레가 그렇다고 하자 노파로 둔갑한 헤라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덧붙였다.
「제우스 신이 틀림없다면 어찌 아니 좋겠습니까만, 이 늙은이에겐 어쩐지 곧이 들리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제 입으로 말하는 바와 같지 못한 사람이 많거든요. 한 번 물어보세요. 제우스 신이 틀림없다고 하거든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천상에서 입은 갑옷을 몸에 두르고 오라고 하세요. 제우스의 갑옷을 입고 나타난다면 틀림없는 제우스일 테니까요.」
세멜레는 듣고 보니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한번 말을 붙여 볼 결심을 했다. 제우스를 만나자 세멜레는 우선 부탁이 있다고 말하고 나서, 그 부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꼭 들어달라고 졸랐다. 제우스는 무슨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 약속을 스튁스(증오의 강)에 걸어 서약했다. 제우스는 신들까지도 두려워하는 저 스튁스 강에다 걸고 서약을 세웠기 때문에 이제는 취소할 도리가 없게 된 셈이다.)
그제야 세멜레는 자기의 부탁이 무엇인지 밝혔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제우스 신의 본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제우스는 세멜레가 말을 꺼내기 전에 가로막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세멜레의 말은 입 밖으로 나와 대기 중으로 퍼졌으니 이제는 제우스의 약속도 세멜레의 부탁도 취소할 수가 없었다.
제우스는 침통한 얼굴로 세멜레의 집에서 나와 천상으로 올라가 갑옷을 입었다. 그러나 옛날 거인족들과 싸울 때 입던 무시무시한 갑옷이 아니라, 신들 사이에서는 경무장(輕武裝)으로 알려진 아주 가벼운 갑옷을 입었다. 제우스는 약속한 바에 따라 그런 갑옷 차림으로 세멜레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신이 아닌 세멜레의 육체가 천계의 휘황찬란한 갑옷에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세멜레는 눈깜박할 사이에 타 죽었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몸에서 아기 디오니소스를 꺼내어 뉘사의 요정들에게 맡겼다. 이 뉘사의 요정들은 디오니소스가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보낼 동안 맡아길렀다. 제우스는 이러한 뉘사 요정들의 수고를 어여삐 여겨 휘아데스 별무리로 만들어 성좌 사이에다 박아 주었다.
디오니소스는 장성하자 포도 재배법과 그 귀중한 즙을 짜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러나 헤라는 이 디오니소스를 미치광이로 만들고는 살던 곳에서 쫓아내어 세계 각지를 떠돌아 다니게 했다.
디오니소스가 프뤼기아에 갔을 때 여신 레아가 그의 광기를 치료해 주고는 비교(秘敎)의 제례(祭禮)를 가르쳐 주었다. 다시 길을 떠난 디오니소스는 아시아 땅을 두루 순방하며 사람들에게 포도 재배법을 가르쳤다. 그의 아시아 땅 순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인도 원정이었다. 이 인도 주유(周遊)는 몇 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온 그는 그리스 땅에 자기 믿음을 널리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리스 땅의 군주들이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은 이 새로운 종교가 불러일으킬 무질서와 광란을 꺼렸고 그래서 이 종교의 포교를 두려워했다.
디오니소스는 고향 테바이로 돌아왔지만 당시의 왕 펜테우스1)는 이 새로운 종교를 존중하기는커녕 그 제례의 집행을 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몰려나와 그를 환영하는 한편 이 개선 행렬에 가세했는데 특히 여자들이 더 그랬다.
롱펠로우(Longfellow)는 『술잔치 노래』(Drinking Song)에서 이 디오니소스의 행렬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파우누스(사튀로스)들이 젊은 디오니소스를 따라간다.
아폴론처럼 이마가 높고,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그 얼굴에는 담쟁이가 관(冠)처럼 자라 있다.
그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신도들이
손에손에 바라와 피리와 주신장(酒神杖)을 들고,
낙소스 숲이나 자퀸토스 포도밭에서
미친 듯이 술잔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푸생이 그린 〈바카르날리아〉. 바카르날리아는 바쿠스, 즉 디오니소스의 공덕을 기리는 축제를 말한다. 이 축제의 특징은 〈오르기아〉, 즉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술마시기다. 디오니소스의 오르기아는 비도덕적, 비윤리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지만,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던가? 조직 종교가 인간에게 윤리의 잣대를 마련해주기 이전의, 아득하게 먼 옛날이었다.>
펜테우스 왕이 아무리 어르고 윽박지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왕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가거라, 가서 저 미친 군중을 교사하고 있는 떠돌이를 잡아들여라. 그 자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나, 내 이 진상을 밝혀 가짜 신앙을 내치겠노라.」
펜테우스 왕의 절친한 친구들과 더할 나위 없이 슬기로운 신하들이 디오니소스를 홀대하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소용없었다. 간언하면 간언할수록 펜테우스는 더 기승을 부렸다.
이윽고 디오니소스를 잡으러 갔던 펜테우스 왕의 부하들이 돌아왔다. 디오니소스의 신자들에게 쫓겨온 이들은 그래도 용케 신도(信徒) 하나를 잡아올 수 있었다. 디오니소스의 신도는 손을 뒤로 묶인 채 왕 앞으로 끌려 나왔다. 펜테우스는 치를 떨면서 그 사내에게 호령했다.
「너 이놈! 내 너를 죽여 다른 연놈들을 경계하는 본보기로 삼겠다. 처형에는 일각의 유예도 없을 것이나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네 이름과, 이 나라에는 금지되어 있는 줄 알면서도 너희들이 거행하는 이 듣도 보도 못한 의식의 정체를 밝히거라.」
붙잡혀온 사내는 두려워하는 빛도 보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마이오니아 사람 아코이테스라고 합니다. 양친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워낙 가난하셨던지라 저에게는 밭 한 뙈기 양 한 마리 남겨 주지 못했습니다만, 다행히 낚싯대와 그물과 어부라는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이 가업을 이어 고기잡이에 종사했으나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싫증이 나서 뱃길 안내하는 재간을 익혔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뱃길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드디어 저는 배를 타고 델로스 섬으로 갔습니다. 저희들은 디아 섬2)에 기항하기로 결정하고 그 섬에 상륙했습니다. 다음 날 선원들을 보내어 식수를 구하게 하고 저는 언덕에 올라가 바람의 방향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전리품치고는 근사한 전리품이라면서 잘 생긴 소년 하나를 데리고 오더군요. 잠들어 있는 걸 그대로 잡아온 모양이었습니다. 선원들은 그 아이가 귀족이 아니면 왕족일 거라면서 몸값을 두둑이 받아낼 궁리를 했습니다. 저는 그 소년의 몸짓과 걸음걸이와 얼굴 생김새를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도저히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기품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더군요. 저는 선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모습에 어떤 것이 깃들여 있는지 나는 모르나, 신이 깃들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 자비로운 신이여, 저희 무례를 용서하소서. 저희 비례(非禮)를 잊으시고 저희에게 행운을 내리소서.’
그러자 돛대에 오르거나 줄타고 내려오는 일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딕튀스, 키잡이 멜란토스, 노 저을 때의 앞 소리꾼 에포페우스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더군요.
‘이 사람아, 기도하려거든 우리를 위해서나 기도해!’
하고요. 모두 몸값 계산하느라고 눈이 벌개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소년을 배에 태우려 했고 저는 이를 말리려다 보니 드잡이가 벌어졌습니다.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네들의 그 뻔뻔스러운 짓거리로 이 배를 더럽힐 수는 없다! 이 배에서는 이런 걸 주장할 권리가 내게도 있다. 자네들 어느 누구보다.’
제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난폭한 뤼카바스가 제 목을 잡고는 바다에다 처넣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밧줄에 매달려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다른 녀석들은 뤼카바스를 은근히 응원하더군요.
바로 그 때 디오니소스 신(그 소년이 바로 디오니소스 그분이었습니다)께서 잠에서 갓 깨어난 듯한 얼굴로 소리치더군요.
‘아저씨들은 날 어쩌려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들 시끄럽게 굴어요? 누가 날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왔어요?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지요?’
그러자 동료 선원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걱정 말아라, 꼬마야. 어디로 가고 싶은지 말만 해라. 이 아저씨들이 데려다 줄 테니까.’
디오니소스께서,
‘우리 집은 낙소스입니다. 낙소스로 데려다 주세요. 나도 은혜는 갚을 테니까요.’
하더군요.
선원들은 디오니소스 신께 그렇게 약속하고는 저에게 배를 낙소스로 몰자고 했습니다. 낙소스로 가자면 오른쪽 뱃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가 그쪽으로 항진하도록 돛을 올렸습니다. 아, 그랬더니 어떤 녀석은 눈알을 부라리고, 어떤 녀석은 제 귀에다 속삭였습니다. 저더러 배를 반대 방향으로 몰아 소년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서 노예로 팔아먹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기겁을 하고,
‘그럼 키는 다른 놈에게 맡겨!’
하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그 이상은 나쁜 일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는 몸을 도사렸습니다. 놈들이 저를 두들겨 패더군요. 한 녀석은,
‘우리의 안전이 네 손에 달렸다고 너무 뻐기지 말아라!’
하고 저를 나무라면서 다른 뱃길 안내자를 내세웠습니다. 배는 낙소스에서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신께서는 선원들의 속셈을 아셨는지 바다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시더군요.
‘아니, 아저씨들, 나를 데려다 주겠다더니, 저 곳은 약속했던 낙소스 해안이 아니지 않아요? 저 섬은 우리 고향이 아니에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아저씨들이 이렇듯 날 속이는 것이오? 아이를 속여서 아저씨들에게 명예로울 게 대체 무엇이요?’
저는 그 말씀을 듣고는 하도 기가 막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우리 둘을 비웃으며 계속해서 그 쪽으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우뚝 서 버린 것입니다. 땅바닥에 말뚝이 박힌 것처럼요. 모두가 대경실색하고 노를 젓는다, 돛을 더 올린다, 노를 젓는 동시에 돛을 늘인다, 법석을 떨었지만 배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포도 덩굴이 노에 잔뜩 엉키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돛에도 굵직굵직한 열매가 달린 덩굴이 기어 오릅디다. 어디에선가 피리 소리가 들리면서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우리 디오니소스 신께서는 포도잎 관을 쓰시고, 손에는 포도 덩굴이 엉킨 창을 든 채 서 계셨습니다. 그분 발치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었고, 그분 주위로는 스라소니와 점박이 표범이 어슬렁거렸습니다. 선원들은 공포에 질렸는데 그 중 몇몇은 발광하여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녀석들도 차례로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자니 놈들의 모습이 변해 있더군요. 모두가 몸이 넓적해지고 구부러진 꼬리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 참 이상하다.’
고 생각하는 참인데 녀석들의 입이 쭉 찢어지고 콧구멍이 넓어지면서 몸에는 비늘이 돋았습니다. 배에 남아 있던 한 녀석은 죽어라고 노를 저으려 했습니다만, 어느 새 양손이 오그라들면서 지느러미가 되고 몸의 형상도 변했습니다. 또 한 녀석은 밧줄을 잡으려 했는데, 갑자기 그 손이 팔 끝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녀석은 팔까지 없어진 몸을 솟구치더니 바다로 뛰어들더군요. 다리가 있던 곳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꼬리가 나왔습니다. 선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돌고래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 돌고래들은 배 주위를 돌면서 수면으로 몸을 솟구치거나, 바다 밑을 헤엄치거나, 물보라를 일으키거나 큰 콧구멍으로 물을 뿜거나 했습니다. 신께서는 저를 위로하느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두려워 말아라. 배를 낙소스로 돌리거라.’
저는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저는 낙소스에 도착하는 대로 제단에 불을 밝히고 디오니소스 님 제사를 모시었습니다.」
펜테우스 왕은 여기까지 듣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따위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느라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구나. 이 자를 끌어다 처형하라!」
아코이테스는 펜테우스 왕의 부하들에게 끌려나가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형리들이 사형 도구를 차리는 사이에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손발에 묶여 있던 사슬이 풀렸다. 형리들이 들어왔을 때 아코이테스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펜테우스는 이러한 경고에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이, 부하들을 보내는 대신 제 발로 디오니소스 의식이 진행되는 곳으로 갈 결심을 했다. 키타이론 산은 신도들로 덮여 있었고 신도들이 지르는 소리는 산을 찌렁찌렁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펜테우스의 노기에 불을 질렀다. 나팔소리가 전장의 군마들의 활기에 불을 붙이는 것과 흡사했다. 펜테우스는 숲을 지나 벌판으로 나갔다. 벌판에서 벌어지는 의식은 그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동시에 여신도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곳에 바로 펜테우스의 어머니 아가우에가, 디오니소스에 의해 장님이 된 아가우에가 있다가 소리를 질렀다.
「보라, 저기 멧돼지가 있구나. 저 거대한 괴물이 이 숲을 망치고 있구나! 오너라, 형제 자매들아! 내 앞장서서 저 멧돼지를 치리라!」
그러자 군중들은 하나 남김없이 우루루 펜테우스에게로 돌진했다. 펜테우스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떨며 변명하고, 혹은 자기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군중은 몰려와 그를 쥐어뜯었다. 펜테우스는 하릴없이 이모들을 향해, 어머니를 좀 말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느 틈에 아우토노에는 이쪽 팔, 이노는 저쪽 팔을 잡아당겨 그의 몸을 찢어 버렸다. 어머니 아가우에가 외쳤다.
「이겼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영광은 우리 것이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로써 그리스에 확립되었다.
디오니소스와 선원들 이야기는 밀턴의 『코무스』 46행에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보라색 포도에서,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저 달콤한 포도주를 처음 짜낸 디오니소스는,
토스카나 선원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은 뒤,
튀르노스 해안의 바람이 부는 대로 키르케 섬으로 밀려갔다.
저 태양의 딸 키르케를 아시는지?
키르케가 권하는 마법의 잔을 입에 대는 자는,
두 발로 서 있지 못하고
엎어져 땅을 기는 돼지가 된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