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범 교수의 이야기 가문사(家門史)(15)- 죽남공의 생애와 일화3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인조 14년에 일어나 인조 15년에 끝난 병자호란의 결과물로 청의 강요에 의하여 인조 17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삼전도비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병자호란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병자호란 이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다.
1115년(고려 예종 10년) 아구다(阿骨打)가 여진(女眞)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약 129년간 국가를 유지하다가 1234(고려 고종 21년) 몽골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시간은 흘러 조선 시대에 들어 명(明)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져 갔다.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년)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을 세웠다.[i]
그러다가 누루하치가 인조5년(1627, 정묘)에 조선을 침공해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다. 3만 군사를 앞세운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입했고 인조는 할 수 없이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후금을 세운 누루하치(1559~1626)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홍타이지(淸太宗)는 후금의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고 명(明)을 공격해 중원의 주인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청태종에게는 명과는 우호적이나 청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조선의 태도가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즉 인조14년(1636, 병자)에 청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침입에 나섰다.
청군은 국경을 넘어 한양 도성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왕은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判尹)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하여 강화(江華)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들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ii]
[i] “여진족”,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 백과)
[ii] “병자호란(丙子胡亂)”,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 연구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