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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간기 다시 보기 이 창의 목표는 천간기.interwar period. 1918~1939)로 흔히 통칭되는 중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을 중심으로 국제질서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거칠게나마 추적하는 데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기 서양 지성사에 대한 연구는 폴로지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전체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이 모든 것을 정도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탐구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좋은 냉전으로 이어지는 전체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사후 확신 편향을 떨쳐 낸 역사학적 연구가 주도로 이뤄지면서 전간기의 다채로운 면면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 장애있는 이러한 양상을 국제사회의 성장이라는 일면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틀로 정리해 소개하고, 이를 통해 전기의 사상적인 유산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하나다. 2. 전간기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17세기 종교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유럽사에서 전간기만큼 암울하게 묘사 되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전간기를 '파국의 시대(Age of [azstophe)'로 정의했으며, 영국의 또 다른 저명한 역사학자 마크 마조워(Walk Mazower, 1958~ )는 전기 유럽을 '암흑의 대륙(Dark Continent)'이라고 청했다. 20세기 독일사가인 이언 커쇼(lan Kershaw, 1943~)는 더 직설적으로 전간기를 '죽다 겨우 살아난(to hell and back)' 시기라고 탄식했다. 전기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부정적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공할 피해를 입었음에도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년 만에 (p.299) |
|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는 여전히 '대전(Great War. Grande Guerre)'이라고 칭할 정도로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은 엄청났다. 1914년 여름 전쟁에 뛰어든 모든 국가가 가졌던 겨울이 오기 전 대승을 거두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가을에 접어들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단기전을 준비했으나 어느새 장기전에 돌입했고, 이에 따라 양측 모두 상대의 물질적·정신적 파산을 목표로 하는 소모 전략으로 선회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천문학적 전쟁 비용과, 군인과 민간인을 모두 함 처 2,0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두 차례의 혁명으로 붕괴된 제정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두었던 영국도 근저에서부터 흔들렸다. 가장 치열했던 서부전선을 품었던 프랑스나 - 새로 건국된 소비에트러시아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Treaty of Brest-Litovsk. 1917)으로 사실상 항복하기 전까지-양면 전쟁을 치러야 했던 독일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국가 기반 자체가 러시아 이상으로 취약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지도에서 사라졌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변화와 그에 대한 반응은 나라마다. 집단마다. 개인마다 적잖이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 1919~1920)에 참석한 각국의 대표 중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의 평화를 향한 대의에 겉으로라도 공감을 표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20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군인은 두 배 이상인 2,000만 명, 그리고 민간인은 네 배 이상인 4,500만 명이 희생되었다. 1914년 유럽의 주요 강대국이 '몽유병자(sleepwalker)'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하나둘씩 전장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 프랑스 혁명전쟁 (1792~1802)과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이래 편안하게 누린 '100년의 평화' 때문이라고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확실히 대비하고 방지했어야 했다. 1848년 혁명 이래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폭발하기 시작해 반세기 뒤에는 발칸반도로까지 확산된 민족주의 감정과 이를 자양분으로 삼은 일련의 통일 전쟁이나 독립 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의 징후로 읽어 낼 수도 있겠지만, 규모나 피해 면에서 제1차 (p.300) |
| 세계대전에 비견할 만한 전쟁은 없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전간기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개인과 나치 독일을 위시한 세 추축국에 주된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 없이 처참하게 실패한 시기였다. 이에 따라 전간기는 기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역사의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기지 못했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라는 뼈저린 후회와 반성의 관점에서 접근 되었다. 전간기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두 번째 이유는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에서 읽을 수 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두 전체주의 국가의 부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제1차 세대전에 비해 한층 더 잔인하게 치러지게 된 까닭으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용하기도 한다. 참호전이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을 상정한 것은 홀로코스트(Holocaust)였다. 1929년 경제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따른 극심한 혼란 속에서 주조된 것이라고 해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ssolini, 1883~1945)와 히틀러가 체화한 전체주의는 전제정치, 참주정치, 독 정치와 같은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너무나 기이한 현상하였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다양한 요인이 중첩되어 나타났다고 해도 전주의는 전기의 문제로 우선 취급되었다. 요컨대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세계대전이 재발한 것도 크게 비난받을 일인데 보편적인 가치마저 무참하게 짓밟혔던 것이다. 전간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1939년 3월 히틀러가 뮌헨 협정(Munich Agreement, 1938)을 체결한 지 반년 만에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국제정치학 분야의 고전 중의 고전으로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E. H.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의 『20년의 위기, 1919~1939: 국제관계연구 입문(The Twenty Years' Crisis, 1919-1939: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Relations)』(1939)을 들 수 있다. "이상향과 현실 (Utopia and Reality)"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가제로 출간 2년 전에 구상된 『20년의 위기, 1919~1939』 는 1939년 9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이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개시할 무렵 지금과 같은 제목으로 출판을 앞두고 있었다. (p.301) |
| 카는 "앞으로 평화를 중재하는 모든 이에게 양차 세계대전 사이 '20년의 위기'보다 더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궁극적인 원인을 면밀 히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가 보기에,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아니라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에 있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까지 확장된 제2차 세계대전이 6년 만에 종료된 직후 작성한 제2판 서문에서 카는 "20년의 위기는 1919년에서 1939년 사이 영어권 국가의 국제 관계에 대한 사고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던 매우 위험한 결함을 상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되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카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권력의 요소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미국과 영국 정부와 여론의 태도였다. 카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영국 정부와 여론이 이상주의에 매몰되어 자신의 입장과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상대의 입장과 능력을 무시한 결과였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과 영국 정부와 여론은 지난 한 세기 동안의 평화와 그 안에서 이뤄진 물질적인 진보에 정초한 이상주의를 떨쳐 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시대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기는커녕 이를 제대로 감지조차 못 했던 것이다. 전기는 현실의 여러 한계를 냉정하게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이상만 추구한 무력하고 위선적인 시기라는 카의 진단은 전후 국제정치학계를 정립한 현실주의학파(Realist School)에 채용되어 국제정치학 분야의 상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카는 동일한 논리에서 나치 독일과의 협상을 끝까지 고수해 논란을 일으켰으나,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 1904~1980)가 지적한 대로 냉전이라는 전 지구적 대치 속에서 필요한 가르침은,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 LN)의 창립을 정점으로 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같이 강제 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도덕적 · 법적 구속 시도에 대한 카의 맹공이었다. 하지만 전간기에 대한 기억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전체주의였다. A. J. P. 테일러(Alan John Percivale Taylor, 1906~1990)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1961)을 둘러싼 격렬한 수정주의 논쟁이 상기시켜 주듯이, 베르사유 조약과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p.302) |
| 1950~1940)의 유화정책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 히틀러에 대한 면죄부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몰락했지만, '철의 장막(iron (sensin) 뒤에서 이오시프 스탈린(losif Stalin, 1879~1953)이 건설한 '수용소군 죽겠다. 이러한 배경하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882) Karl Popper, 1902~1994), 아이제이아 벌린(Isaiah Berlin, 1909~1997) 돌이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1944), 『열린 사회와 그 적들 (The pen Society and Its Enemies)』(1945), 『자유의 두 개념(Two Concepts of Itery) (1958) 등의 저작을 쏟아 내며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를 중추로 하는 냉전 자유주의(Cold War liberalism)'의 이론적인 초석을 다졌다면, 해나 아렌Hannah Arendt, 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healitarianism)』(1951)을 통해 전기 상황 전반에 대한 세밀하고도 통렬한 분책을 제공했다. 같은 시기에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1944) 회 공저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와 막스 호르크 라이머(Max Horkheimer, 1895~1973) 등으로 구성된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 School)도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활동을 전개했으나 철학적인 자본주의 문명 비평이 주를 이루었다. (Eculag Archipelago)가 전체주의 국가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를 계속 자반면에 아렌트는 유럽에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주의가 뒤엉켜 몰타오르던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간기 유럽을 집어삼킨 파멸적인 전체주의는 경제적으로는 제2차 산업혁명의, 그리고 정지적으로는 대중민주주의의 폐해 속에서 자라났으며, 독일과 러시아같이 해외 식민지 팽창이 어렵거나 뒤늦은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민족적인 경계가 분명치 짧은 광활한 영토의 국가에서 만개했다. 아렌트가 특히 힘주어 지적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압력이 이들 국가가 안고 있던 경체적·정치적 모순을 한꺼번에 분출시켰고, 이를 윌슨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원책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각인시킨 민족자결주의가 의도치 않게 전체주의로 인도됐다는 주장이었다. 계급제도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가치관 마저 붕괴된 상황에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무제한적인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구원의 동아줄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p.303) |
| 아렌트에게 전간기를 특징짓는 심리는 '고립(loneliness)'이었고, 전체주의 국가의 안팎을 가리지 않는 폭력 행위는 이를 토대로 자행된 것이었다. 전기는 이렇듯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승전국에나 패전국에나, 전기는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오판과 실수로 점철된 시기로 평가되었다. 이 장은 이에 대한 균형추로 전간기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래를 예견할 수 없었던 당대 정치인과 지식인, 그리고 활동가의 시각에서 전간기를 재구성해 보려는 것이다. 전기의 좌절과 절망이 큰 것은 전간기의 도전과 희망이 그만큼 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전간기의 위기가 아니었다면 국제사회를 향한 고민과 노력의 역사는 이만큼 풍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근래 '전간기 국제주의(interwar internationalism)'로 묶여 불리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 국경을 넘어선 다양한 협력 모색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다음에서는 먼저 전간기 유럽 질서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기까지의 평화 담론을 개괄한다. 그다음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부터 대공황까지 10여 년 동안 여러 국제주의 운동이 낳은 결실을 LN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공황 이후 전체주의가 득세한 격동의 10년 동안 국제사회가 고통스럽게 경험한 분열과 방황의 의미를 되짚는다. 3. 구외교에서 신외교로 제1차 세계대전만큼 목표한 바와 달성한 바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전쟁은 없다. 1914년 6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Erzherzog Franz Ferdinand.1863~1914)의 암살을 계획하고 성공시킨 단체 '청년 보스니아(Mlada Bosna)'의 꿈은 세르비아의 통솔 아래 슬라브 민족이 발칸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 있다. (p.304) |
| 두 차례의 발칸전쟁(1912~1913, 1913)을 유심히 지켜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역시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사건의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밝히고 엄중하게 처단하는 것은 국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였다. 반대로, 세르비아에 이는 주권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양국 간 대립은 제1차 세계대전을 향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7월 위기(July Crisis)' 속에서 러시아, 독일, 프랑스 정부는 모두 자국의 이해 독실을 따졌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독일의 팽창을 두려워했고, 독일은 러시아화 프랑스의 위협을 걱정했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도 유럽 국제정치 구도를 자국에 유리하게 바꿀 기회라고 판단했다. 군사적인 위협이 외교적인 교섭을 대체했다. 상황을 관망하다가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참전을 결심한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전쟁 목표는 벨기에의 중립 보장이었지만, 이는 세력균형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별기에가 독일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영국의 국가 이익에도 부합했다. 지중해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고자 했던 이탈리아는 일단 중립을 택했다. 정리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럽 의 세력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일어난 전쟁이었다. 사태가 갑자기 악화되기는 했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당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삽시간에 불타오른 애국심으로 모병소는 금세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편, 지난 세기 후반부터 대안적인 국제질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해 왔던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은 당혹했다. 특히 당시 제1야당으로까지 떠오른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이거나 계열 인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우왕좌왕했다. 우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앞서 내놓은 전망이 상당 부분 물린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으로 전전(戰前) 국제 문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자였던 J. A. 홉슨(John Atkinson Hobson, 1858~1940)은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 경쟁이 유럽 주요 강대국 간의 전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제2차 보어전쟁(1899~1902)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제국주의에 관한 일 고찰(Imperialism: A Study)』 (1902)에서 홉슨은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 서 독점적인 위치에 오른 자본가는 과잉생산과 과잉저축으로 인한 심각한 이윤 저하에 직면하게 되며, 이를 만회할 요량으로 발전이 덜 된 국가를 착취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p.305) |
| 국내시장을 손에 넣은 각국의 자본가가 새로운 투자처를 공략하기 위해 각자의 정부를 압박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는 홉슨의 주장은 판매 사건(Panideh Incident, 1885),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8), 의화단 사건(Boxers Rebellion. 1899~1901), 두 차례의 모로코 위기(Tangier Crisis, 1905~1906, Agadir Crisis, 1911) 등 일련의 식민지 쟁탈전 속에서 큰 설득력을 얻었다. 대표적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1916년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은 망명 중인 스위스에서 홉슨의 분석을 두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1938)와 열띤 공방을 벌였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Imperializm kak Vysshaja Stadija Kapitalizma)」에서 레닌은 제국주의가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에 의해 야기되는 것으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현상이며, 농업국가뿐만 아니라 산업국가도 병합하고자 나설 것이기에 유럽 밖이 아니라 유럽 안에서도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카우츠키에게 반박했다. 홉슨은 또한 제국주의가 군사력의 증대를 국가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는 군사주의를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레닌의 말처럼 병합은 전쟁과 다름없었고, 이는 군비경쟁을 뜻했다. 1880~1914년에 유럽 주요 강대국의 방위비는 평균적으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과 독일의 건함 경쟁은 당시 전 세계 산업 생산의 30퍼센트가량을 점하고 있던 양국의 경제에 부담이 될 정도로 격화했다. 같은 기간에 영국과 독일의 해군 군함 총톤수는 각각 네 배와 열다섯 배로 늘어났다. 한 국가의 군비증강은 다른 국가의 군비증강을 가져왔으며, 서로에 대한 커지는 불신과 공포 속에서 막대한 부를 취하는 이는 '죽음의 상인(merchant of death) 말고는 없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홉슨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린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 1872~1967)은 「거대한 환상: 군사력과 국가이익의 관계에 대(Great Illusion: A Study of the Relation of Military Power to National hantage)」(1911)에서 전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이는 유럽 어디에도 없다고 논변했다. (p.306) |
| 전쟁은 정복당한 국가뿐만 아니라 정복한 국가에도 손해이다. 전쟁이 터지면 무역과 투자는 중단될 것이고, 전쟁이 끝나면 어마어마한 복구비용이 패전국뿐만 아니라 승전국에도 청구될 것이다. 즉 에인절의 주장에서 자본가는 전쟁의 배후가 아니라 평화의 보루였다. 카우츠키도 에인절의 주장에 찬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직후 카우츠키는 '미래를 내다볼 능력을 가진 모든 자본가는 자신의 동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의 자본 구여, 단결하라"라고 적었다. 카우츠키는 '신성동맹(Heilige Allianz)'을 예로 들 해 가장 보수반동적인 군주가 나폴레옹 전쟁으로부터 유럽을 구원했던 것과 같이 가장 제국주의적인 자본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럽을 구원할 것 점점 더 많은 논자가 전자의 관점에서 후자의 관점으로 이동했다. 유럽 밖은 사랑했던 반면 유럽 안은 조용했다. 홉슨의 예언과 다르게, 중동 및 중앙아시아(Great Game), 아프리카(Scramble for Africa), 동남아시아 및 중국(China Question)에서의 팽팽한 대치는 일련의 회담과 조약을 통해 조금씩 봉합되 했다. 단적으로 영국은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04년 프랑스와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은 데 이어 3년 뒤에는 러시아와도 우호관계에 들어 같다(Anglo-Russian Convention, 1907). 군비경쟁도 완화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은 위험 요소는 세력균형뿐이었다. 유럽의 주요 강대국은 두 편으로 갈라게 있었다. 한쪽에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가 1882년 프랑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결성한 삼국동맹(Triple Alliance)이, 다른 쪽에는 프랑스, 러시아, 영국이 1907년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결성한 삼국협상(Triple Enrente)이 있었다. 세력균형을 떠받들고 있는 동맹과 비밀외교를 청산하기 위 "내놓은 방책은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같았다. 개혁이든 혁명이든, 민주주의를 강화해 외교정책의 결정 과정을 혁파하면 해소될 터였다. 각국의 외 두성을 대대로 점유해 온 왕실과 귀족계급을 모두 몰아내고 민의를 반영해 운명하면 될 것이었다. (p.307) |
| 모두가 이를 위해서는 국제문제에 대한 대중 교육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평화협회(Deutsche Friedensgesellschaft)' 활동가였던 알프레트 프리트(Alfred H. Fried. 1864~1921)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콩고 노예제 폐지 운동'으로 명성을 떨친 영국의 평화운동가 에드먼드 모델(Edmund D. Morel. 1873~1924)은 이듬해 "교육을 받아 지식이 있는 시민에게 사실관계에 관한 정보만 제대로 전달되면 전쟁은 일어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같은 해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2차 인터내셔널(Second International)'도 이에 호응했다. "혹시라도 필요하면 우리는 총파업으로 보여 줄 것이다. 전쟁에 대한 전쟁, 세계평화, 노동자 인터내셔널 만세."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던 기자이자 작가인 헨리 브레일스퍼드(Henry N.Brallsford, 1873~1958) 역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내놓은 「강철과 황금의 전쟁(War of Steel and Gold)』(1914)에서 유럽의 주요 강대국 간의 전쟁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국가가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교육적인 선전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평화의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국제적인 자본가는 물론이거니와 계몽된 여론은 온데간데없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격론 끝에 참전을 결의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원내 대표였던 후고하세(Hugo Hasse, 1863~1919)와 함께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탈당한 빌헬름 디트만(Wilhelm Dittmann, 1874~1954)은 대중의 항전 의지 앞에 "당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탄했다. 하세와 디트만은 독일 정부의 전시공채 발행에 동의한 독일 사회민주당을 "악취 나는 송장"이라고 매섭게 꾸짖은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Roxa Luxemburg, 1871~1919)와 함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반전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소용없었다. 브뤼셀에서 하세를 만나 함께 반전 의지를 다졌던 프랑스 사회주의 정치인 장 조레스(Jean Jaures, 1859-1914)는 얼마 뒤 극우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영국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영국 노동당도 정부의 결정을 따르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영국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유 등으로 참전을 반대한 인사가 정부 안팎에 적지 않았다. (p.308) |
| 내각에서는 명문가 자손으로 의회 교육위원회 차관직을 수행하던 찰스 트리벨리언(Charles Trevelyan, 1870~1958)이 사임했고, 노동당에서는 전후에 노동당 소속 첫 총리가 될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 1866-193)가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조기 종전을 위한 평화 협상이 무산되고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강행하자, 트리벨리언과 맥도널드 등은 (of Democratic Control, UDC)'이라는 초당적인 조직을 출범시켰다. 홉슨, 에인절, 모렐, 브레일스퍼드 등과 함께 '민주적 통제를 위한 연합(Uokan UDC)의 목표는 바람직한 전후 국제질서를 구상하고 이에 따라 영국의 전쟁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인기 공상과학 작가 H. G.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가 외쳤듯이, 영국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을 해야 했다. 이기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UDC가 제시한 이상적인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위한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세력균형의 두 기제라고 할 수 있는 동맹과 비밀외교에 대한 반대였다. 맥도널드는 "연루와 음모의 비밀외교 그리고 동맹에 맞선 동맹'을 거부하는 것이 향후 영국 노동당, 더 나아가 영국 정부의 대외 관계 기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창했다. 둘째는 명칭에도 드러나 있듯이 외교정책에 대한 민주적 통계였다. 모델은 UDC 명의로 발간된 첫 책 전쟁 이후(The Morrow of the War)』(1914)에서 전문 외교관의 간계나 무모한 행동 혹은 군사 귀족계급의 야망에 휘둘리는 정부 노든(Philip Snowden, 1864~1937)과 더불어 '징병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UDC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전후에 노동당 소속 첫 재무장관으로 임명되는 필립스에 가입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협상국의 외교정책 (The Foreign Policy of the Entente)』(1916)이라는 책에서 "영국 민주주의의 이익은 인류 전체의 이익과 어떠한 마찰도 일으키지 않는다. 반면, 영국지배계급의 이익은 인류 전체의 이익과 수많은 마찰을 일으킨다"라고 적으며 자성했다. 이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은 주권의 이전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셋째는 대대적인 군비축소 및 군수산업의 국유화였다. (p.309) |
| UDC 초대 총재로 추대된 모델은 "전쟁의 불씨를 당길" 군비경쟁과 군수산업을 더는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며, 평화협정에 전반적인 군비축소에 관한 조항이 반드시 삽입되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UDC는 국가 간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정할 국제기구를 만들 것을 제의했다. 흡슨은 전쟁 발발 이듬해 내놓은 '국제정부를 향해 (Towards International Government)』(1915)에서 '국가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의 건립이 전후 평화 질서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정치학자 로우스 디킨슨(G. Lowes Dickinson, 1862~1932)은 처음으로 국제관계를 '무정부(anarchy)'와 같다고 분석하면서, 홉슨과 마찬가지로 초국가적 협의체 말고는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우연의 일치로 디킨슨은 이를 '국제연맹'이라고 명명했다. 디킨슨은 정치학자이자 법학자로 미국 대사를 역임한 제임스 브라이스(James Bryce. 1838~1922)와 흡슨, 그리고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진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 활동가 레너드 울프(Leonard Woolf, 1880~1969) 등과 함께 UDC 내에서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이를 대중에게 홍보하기 위해 '국제연맹협회(League of Nations Society)'를 발족했다. UDC의 고뇌와 실천에도 불구하고, 교착상태가 이어지던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뒤바꿀 일이 유럽의 동쪽과 서쪽 밖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두 번에 걸친 러시아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참전이었다. 먼저 1917년 2월, 로마노프 왕조가 총력전의 압력 속에서 폭발한 대중 시위에 무너졌다.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타협으로 수립된 러시아 임시정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의 지속 여부였다. 러시아 임시정부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 계속 싸우는 동시에 병합이나 배상 없는 조속한 평화를 협상국에 요청하는 이중적인 방안을 취했다. 두 달 뒤인 1917년 4월에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멕시코와의 비밀협상에 분노한 미국이 협상국과 함께 싸우기로 선포했다. 러시아공화국과 미국의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을 삼국동맹 대 삼국협상 간 전쟁이 아니라 민주국가대전제국가 간의 전쟁으로 바꾸어 놓았다. 윌슨은 연방의회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복도 지배도 아닙니다. (p.310) |
| 우리는 배상을 원하지도 우리의 희생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인류의 권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즉 "우리는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독일 국민'이 아닌 '독일 정부'에 맞선 전쟁이었다. "여론이 국가의 모든 사무와 관련된 정보를 다 파악할 수만 있다면 비밀외교나 동맹은 필요치 않을 터였다. 윌슨은 "민주적인 국가 간 협력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평화는 이뤄질 수 없다"고 웅변했다. 윌슨 자신이 규범적인 논의에 익숙한 정치학자이기도 했지만, 미국에도 UDC와 유사한 단체가 여럿 활동하고 있었기에 윌슨이 뜻밖의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윌슨의 전임자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1857-1930(가 1915년 발족하고 초대 총재에 오른 '평화를 강제하기 위한 연맹(League to Enforce Peace, LEP)'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LEP에는 수많은 미국의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 인사가 참여했는데,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며 국제 중재를 추진하고 퇴임후에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f 의 초대 총재로 활약한 공로로 191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엘리후 루트(Flau Root, 1845~1937)도 그중 한 명이었다. 또한 LEP는 미국 대사 재임 시절 미국 정치학회(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회장직을 맡기도 한 브라이스를 통해 UDC와도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윌슨이 참전 연설 직후 전후 평화 질서의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한 자문기구의 위원이었던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1889~1974)과 윌리엄 블릿(William C. Ballim, 1891~1967) 등도 LEF와 UDC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UDC 내에서도 미국과 새로운 세계 정부(America and the New World-State: A Plea for American Leadership in International Organization)』(1915)를 펴낸 에인절 등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한 요청이 있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평화포고(Dekreto Mirel)」로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해법을 담은 윌슨의 의회 연설에 화답했다. '정의롭고 민주적인 평화'를 위한 협상을 속히 개시할 것을 양쪽에 요구했다. (p.311) |
| 레닌에게도 정의로운 평화란 배상과 병합이 없는 평화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여전히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했던 레닌은 주민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합병된 모든 영토가 즉시 반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제국주의는 전쟁을 낳기에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모든 민족이 해방되어야 했다. 다음으로, 레닌에게 민주적인 평화란 동맹과 비밀외교가 없는 평화였다. 동맹과 비밀외교는 전쟁을 가져올 것이기에 평화를 원한다면 국가 간의 관계는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다뤄져야 했다. 오스만제국을 분할하기로 약속한 세 협상국 간의 사이크스-피코크 협정(Sykes-Picot Agreement, 1916)을 포함한 제정러시아 시절에 체결된 비밀협약의 폭로와 취소는 이를 향한 첫 단추였다. 이에 더해, 레닌은 자신의 제안이 성사될 수 있도록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의식 있는' 노동자계급이 앞장서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레닌의 호소에 호응은 없었다. 낙담한 레닌이 두 달 뒤인 12월, 독일과 단독으로 휴전협정을 맺고 협상국 진영에서 이탈하자, 윌슨은 항전 의지를 다지고 사기 진작을 위해 이듬해 1월 미국의 전쟁 목표를 구체적으로 담은 「14개조 평화 원칙(Fourteen Points)」 (1918)을 천명했다. 비밀외교와의 결별 공표(제1항)로 화두를 연 윌슨은 항해 및 무역의 자유(제2~3항)와 군비축소(제4항)를 언급한 뒤 전쟁에 휘말린 모든 국가의 영토(제7~13항)뿐만 아니라 모든 식민지 문제가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공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제5항)고 주장했다. 윌슨은 레닌을 되돌리고자 동유럽 문제에 대한 소비에트러시아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약속(제6항)했으나 레닌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끝으로, 윌슨은 약소국이든 강대국이든 상관없이 모든 국가가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초국가적 연합을 설립할 것(제14항)을 주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소비에트러시아가 퇴장하면서 윌슨이 이끄는 미국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UDC와 마찬가지로 윌슨은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를 원했다. 11월 혁명으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를 퇴위시키며 바이마르공화국을 탄생시킨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도 이를 염두에 두고 항복했다. 하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의 반발은 논외로 하더라도, 수년에 걸친 처절한 싸움 뒤에 승리 없는 평화란 (p.312) |
|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체제를 송두리째 부정하며 돌아서기까지 한 '야만스러운' 러시아보다 '문명화된 독일이 나은 상대이며, 전진 독일이 해외 식민지와 관련해 영국에 대해 가졌던 시기와 질투는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는 UDC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정부와 독일 국민을 명확히 구분 하려던 윌슨의 입장마저도 '프러시아주의(Prussianism)의 발본색원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묻혔다. 런던대학교의 사회학자 레너드 홀하우스(Leonard Thelay Hobhouse, 1864~1929) 등과 같은 지식인도 독일의 뿌리 깊은 국가주의를 비난하며 나섰다. 독일에 필요한 것은 '승리 이후 평화(peace after victory)를 통한 단죄였다. 요약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여러 측면에서 시작과 끝이 너무나도 다른 전쟁이었다. 발칸반도의 세력균형 문제가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문제로 비화되며, 유럽의 주변부에서 시작된 전쟁은 유럽의 중심부에서 끝이 났다. 또한 모두가 단기전을 예상했으나 전쟁은 손쓸 새도 없이 장기전이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한 피해와 충격은 당대의 상상을 크게 넘어섰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과 관련되어 일어났다. 두 차례 발생한 러시아혁명과 미국의 참전이 있던 1917년을 기점으로 제1차 세계대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더 이상 국가 이익을 둘러싼 갈등이 아니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민주국가 대 전제국가의 옳고 그름을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인류의 미래가 좌우될 법정이 되었다. 당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외교(Ola Diplomacy)'의 시대가 종식되고 '신외교(New Diplomacy)'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동맹과 비밀외교의 구시대가 저물고, 외교정책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UDC와 레닌 그리고 윌슨은 전후 바람직한 국제질서의 전제 조건으로 공히 승리 없는 평화를 꼽았으나, 파리강화회의는 전쟁이 남긴 적대감 속에서 신외교의 외부를 맡은 구외교의 장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럼에도 국제주의 운동은 LN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통해 새로운 번성기를 맞이한다. (p.313) |
| 4. 국제연맹과 전간기 국제주의 운동 1918년 12월, 레닌의 소비에트러시아는 협상국과 미국을 배신한 대가를 내천으로 치르고 있었지만(Russian Civil War, 1917~1922), 윌슨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의 첫 단계를 성공리에 완수한 '인류의 구세주'라는 칭송을 받으며 다음 단계로의 전환에 착수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UDC 역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영국 자유당 소속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1853~1945)가 같은 해 1월에 발표한 영국의 전쟁 목표는 UDC가 줄기차게 요구해 온 바와 거의 같았다. 로이드 조지는 UDC가 초안을 만든 노동당의 전쟁 목표를 참고하는 것을 넘어서 노동당 지도부를 직접 만나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했다. 영국은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망이 아니라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싸웠으며",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가 간 조약의 준수"와 "민족자결주의 또는 피통치자의 동의에 입각한 영토 조정", 그리고 "군비경쟁의 부담과 전쟁의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이 필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언명한 로이드 조지는 "빈 조약(Treaty of Vienna, 1815)의 시대는 이제 먼 과거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유럽 문명의 미래를 이 왕조나 저 왕조 또는 이 국가나 저 국가의 이익을 챙기고자 감언이설로 회유하는 극소수 협상가의 변덕스러운 결정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유럽의 질서는 안정을 약속해 줄이 성과 정의에 근거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의미 부여까지 했다. 이러한 연유로 파리강화회의에도 참석한 영국의 외교관이자 다방면으로 출중했던 외교론(Diplomacy)』(1939)의 저자 해럴드 니컬슨(Harold Nicholson.1886~1968)을 포함한 다수의 논자가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혁명'에 비유했으나, 정작 실망한 쪽은 니컬슨같이 구외교를 변호한 이가 아니라 신외교를 부르짖던 윌슨과 UDC였다. 전쟁 피해 복구 문제에 대한 항목에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책임을 명시했다(제231조). 독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개시된 전쟁이기에 회복을 위한 비용은 당연히 그들이 떠맡아야 했다. 배상금 위원회는 2년에 걸친 조사 끝에 독일 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인 1.320억 금 마르크 (p.314) |
| 성에 대한 최고의 범죄를 저지른 빌헬름 2세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부과한다고 독일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또한 “국제 도덕과 조약의 생 일본을 대표하는 판사로 구성된 법정에 세울 것을 공지했다(제227조) 독일의 해외 식민지는 모두 몰수되었을 뿐만 아니라(제119조), 보불전쟁(1870~1877)에서의 승리로 획득한 알자스로렌(제51조)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확정된 동부 국경 지역을 위시한 유럽 내 독일 영토의 10퍼센트 이상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 주변 국가에 할양해야 했다(제27조). 추가로 프랑스와의 국경 공업지대인 라인란트 지역의 비무장화(제42~43조)와 독일을 군사적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제약(제5부)이 가해졌다. 즉 UDC와 윌슨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던 제국주의와 식민지, 그리고 군산복합체의 제거는 독일과 독일의 동맹국에만 적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제국은 해체되고 독일은 분할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과 독일의 동맹국은 동맹과 비밀외교를 대체하기 위해 설립된 LN에서 배제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에 대한 조치는 누가 봐도 가혹했다. 영국 재무성 수석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1883~1946)는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던진 뒤 「평화의 경제적인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1919)를 썼다. 케인스가 보기에 베르사유 조약은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른 평화가 아니라 프랑스 총리 조(Carthaginian Peace)'였다. 케인스의 비판은 신랄했다. “유럽의 미래는 고려 대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에 의한 '카르타고식 평화상이 아니었다", "관심사는 오로지 국경과 민족, 세력균형, 제국 확장 강하고 위험한 적의 약화, 그리고 복수뿐이었다". 케인스는 "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은 는 것과 진배없다"라는 독일 대표의 절규에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 성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동에게 사형선고를 내리 자책하며, 경제 제재로 인한 곤궁은 결국 정부의 와해뿐만 아니라 문명의 잠식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레닌도 케인스의 견해에 동조했다.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자랑하더니만",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약탈하고 분할하(p.315) |
| 는 것을 보니 고리대금업자의 평화이고, 압제자의 평화이고, 푸줏간 주인의 평화이지 않은가"라고 비꼬았다. 에인절이 「평화조약과 유럽의 경제적인 혼란(The Peace Treaty and the Economic Chaos of Europe)』(1919)에서 밝혔듯이,UDC와 윌슨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윌슨과 UDC가 모든 것을 놓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윌슨과 영국 정부는 LN 규약을 베르사유 조약의 전면(제1부)에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윌슨 과 영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깨달은 바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명료하게 제시했다. 윌슨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개별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LN의 집단안보 체제에 따른 주권 제한(제10~11. 제16조)을 우려한 상원의 반대로 끝내 불참하게 되지만, LN은 영국을 비롯한 12개국이 참여한 역사상 최초의 국가 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국제기구로 창설되었다. UDC와 윌슨이 갈망한 대로, 국제관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LN은 대공황 이후 전체주의 국가가 동시다발적으로 도발을 감행하기 전까지 10년 넘게 국제주의 운동이 만개할 수 있는 계기이자 발판을 제공하며 국제사회의 제도적 이념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LN을 통한 국제주의 운동의 주요 성과를 주제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가장 대표적인 예는 LN 산하 첫 전문 기관으로 설치된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이다. 각국 정부는 여론 때문에라도 전쟁 기간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기여한 노동계급의 역할을 즉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파리강화회의의 최초 결정 중 하나로 각국의 근로조건을 조사하여 국제적 협력의 기준을 세울 국제노동입법위원회(Commission for International Labour Legislation)가 구성, 전 세계로 파견되었다. LN의 형태에 대한 합의가 채 이뤄지기도 전에 ILO는 이미 협력 기관으로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ILO 정관은 베르사유 조약의 일부(제13부)로 조인되었고, ILO는 LN과 함께 탄생했다. ILO의 첫 회의는 워싱턴에서 열렸으며, 초대 사무총장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군수장관을 지낸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알베르토 마(Albert Thomas, 1878~1932)가 선임되었다. LN의 첫 사무총장으로 영국 외교관 에릭 드러먼드(Eric Drummond, 1876~1951)가 임명된 것에 대한 프랑스 (p.316) |
| 이 대응이기는 했으나, 토마의 취임은 쟁기가 칼이(plowshares to sworder t)고, "칼이 쟁기가(swords to plowshares)" 되는 단적인 매였다. ILO와 관련해 추목할 점은 정관의 첫 대목으로 "LN의 목표가 보편적인 평화의 구축이라면 이는 사회정의가 구현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전제이다. 여기서 사회정의의 형성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조건의 확립에 있었고, 이 한 나라의 노동자든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든 모두 세계자본주의 경제 내에서를 위해서는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국가 간 경쟁에 대한 규제가 필수였다. 부유 경쟁을 하기에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국제적인 협력이 아니고서는 노동시간과 임금,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 문제뿐만 아니라 근로 가능 연령과 산업재배 및 실업, 이주노동 등과 같은 문제(제427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란 불가능했다. 이윤의 경제(economy of profit)'를 '노동의 경제(economy of labour)'로 바꾸기 위해, ILO는 사무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대표단 역시 고용자와 노동자의 입장을 각기 대변할 수 있도록 동수로 구성했다. 토마가 누차 강조한 대로, 국가별 고용 및 노동환경에 대한 조사와 감시는 각국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으나, '정의'와 '인류애'가 우선시된 것이다. 전간기 동안 ILO는 120여 개가 넘는 협약과 권고를 채택했고, 가맹국에 비준을 요청했다. (2) ILO가 전전 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한 여러 국제주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자라난 것처럼 여성운동, 노예제 폐지 운동, 난민 보호 등 다양한 '인도주의' 활동이 LN과 ILO의 창립과 더불어 다시 활기를 띠었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운동의 경우, LN 내 별도의 전담 부서를 설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베르사유 조약 제7조 LN 규약으로 사무총장을 비롯한 LN와 임금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했으나, 1925년 LN 사무국 소속 직원의 질및 LN 예하 조직의 모든 직책에 대한 성적 차별을 공식적으로 철폐했다. 직위 반가량이 여성일 정도로 여성운동은 LN을 기반으로 한 국제주의 운동의 선봉(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uppression of the Traffic in Women and) 에 섰다. 1922년 발효된 다자 조약으로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 금지 규약 (Children)은 첫 열매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과 UDC를 거쳐 영국 대표로 LV파견되어 맹활약한 헬레나 스완윅(Helena Swanwick, 1864~1939)을 비롯한 많은 여성운동가가 국제평화를 위해서는 시민으로서 여성의 동등한 권리와 참여가 국제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이라고 계속 외쳤다. (p.317) |
| 가장 오래된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 중 하나인 노예제 폐지 운동 또한 LN 중심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위임통치령에 따른 제약에도 불구하고, '반노에게 협회(Anti-Slavery Society)'를 주축으로 한 유럽 각지의 노예제 폐지 단체는 1926년 "모든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동이 자신의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그 국가와 상업 및 산업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가에서 공정하고 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베르사유 조약 제23조에 근거해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노예 협약(Slavery Convention)을 LN 조약으로 추가 했다. 오스만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제국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300만 명가량의 무국적 난민에 대해서도 부족하나마 구호 시도가 이뤄졌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지역은 종교적으로 또 인종적으로 복잡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낙후되어 있던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제국의 옛 영토였다. 전자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최소 6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낳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Armenian Genocide, 1915~1917)이 자행된 데다가 승전국의 분할 결정에 결사반대하며 일어난 튀르키예 독립전쟁(1919~1923)과 이의 일환으로 치러진 그리스와의 전쟁(1919~1922)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후자는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화마에서는 벗어났지만, 내전과 폴란드와의 전쟁(1919~1921)에 따른 정치·경제·사회 상황의 악화에 더해 기근까지 겹치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LN은 ILO와 함께 1921년 산하 조직으로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High Commission for Refugees)를 마련하고, 북극 탐험가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 인도주의 활동가 프리드쇼프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대처했다. 난센은 무국적 난민에게 여권(Nansen Passport)을 지급하여 국제법의 보호하에 이동을 가능케 하고, 차기 미국 대통령에 오를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가 책임자로 있던 미국구호청(American Relief Administration, ARA)의 식량 지원까지 얻어 낸 공로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p.318) |
| (3) 배상금을 비롯한 독일에 대한 처벌을 제외하면, 베르사유조약의 경제 관련 내용은 제23조 "모든 회원국 간의 상업에 있어서 공평한 매우 보장이 제부 베르사유 조약의 정의 판였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국제기구가 세계경제에 제라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난 한 세기 자유방임 경제하에서 변경을 누린 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협력한 기억 및 전후 복구 문제와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 등으로 인해 국제적인 경제형조는 심화되었다. 벨기에와 프랑스 등 국경 지역의 복구와 경제 회복을 돕고자 설치한 최고개제 위원회(Supreme Economic Council)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위해 1920년 LN 산하 경제와 스웨덴 경제학자 구스타브 카셀(Gustav Cassel, 1866~1945) 등이 청사진을 금융기구(Economic and Financial Organization, EFO)로 재탄생했다. 제인스 그린 EFO의 실질적인 운영은 J. P. 모건 체이스(Morgan Chase & Ca) 등 미국의 주요 투자은행이 맡았으며, ARA 청장 후버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922년 EFO는 오스트리아 정부와 경제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설치 같은 EFO의 강도 높은 개입을 볼셰비즘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적인 자본의 다급한 조치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선 외교가 불러일으킨 인도주의 여론의 드넓은 지지가 없었다면 이는 애당초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례로, 1927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경제회의(World Economic Conference)에는 LN 회원국 46개국을 대표하는 200여 명의 정부 인사뿐만 아니라 경제·정치·사회 등 관련 분야 민간 전문가 200여 명이 전 세계에서 참석했다. (4)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역의 경제 회복에 대한 인도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대공황 이후에도 자유무역을 저해하는 관세와 기타 무역장벽의 제거 이상으로 논의가 나아가지 못했던 경제 분야와 달리, 군비축소 문제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다뤄졌다. UDC의 제안대로, LN 규약으로 베르사유 조약 제8조는 "회원국 모두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 안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이 다를지라도 군수산업은 모두 국유화되어 각국 정부의 통제를 받을 것과, 각 수준으로 군비축소를 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한다"는 전제하에 나라마다 사정 (p.319) |
| 국 정부는 자국의 군사력과 관련된 기본 정보를 숨김없이 공유할 것을 명시했다. 이와 더불어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무장해제 수준의 제한이 '모든 국가의 군비에 대한 일반적인 제한을 가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제5부). IN은 상기의 사항을 준수하지 않은 국가를 처벌할 강제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나,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자국 여론의 강한 압력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디킨슨과 울프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국제연맹협회와 다른 유사단체가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의 발표에 자극받아 합쳐진 '국제연맹연합(League of Nations Union. LNU)'이 정부를 압박했다. LNU의 첫 총재는 제1차세계대전 기간에 외무장관을 지내고 종전과 함께 미국 대사를 역임한 자유당 정치인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 1862~1933)였으며, 지도부에는 옥스퍼드대학교 고대사 교수 길버트 머리(Gilbert Murray, 1866~1957)와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외무차관까지 역임한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Viscount Cecil of Chelwood, 1864~1958) 등 학계와 정치계의 유력 인사가 즐비했다. 전 지구적 집단안보 체제의 구축과 군비축소를 목표로 내건 LNU는 1931년 40만 명의 회원을 거느렸으며, 1934년과 1935년 전국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Peace Ballot)에는 당시 영국 성인 인구의 40퍼센트에 달하는 약 1,200만 명이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국제 여론의 높은 관심 속에 LN은 1924년부터 매년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60여 회원국의 군사비와 무기 체계 및 생산, 그리고 수출 등 주요 군사력 정보를 대체로 정확하게 담은 '군사력 연감(Armaments Year-book)」(1924~1940)을 발행했다. 이듬해 조인된 전시에 생물학무기와 화학무기의 사용을 금한 제네바 의정서(Geneva Protocol)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미국의 주도로 성사된 워싱턴 해군회담(Washington Naval Conference, 1921~1922)의 결과는 이와 같은 열망의 결실이었다. (5) 국제정부가 아니라 포괄적인 협력기구라는 LN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LN은 국제분쟁에 대해 기존의 관례를 발전시키는, 중재를 통한 해결을 채택했다(제13조). 따라서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상설국제법원(Permanent Court o International Justice)의 역할은 국경 지대나 공해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성격의 다툼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이 아니라 중재과정에서 참고가 될 전문적인 의견 개진에 국한되었다. (제14조)(p.320) |
| 하지만 국제법 분야에서도 신외교의 영향으로 중 다툼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이 아니라 중재 과정에서 참고가 될 전문적인 의견 대한 도약이 시도되었다. '국제법협회(International Law Association, IEA/역국제법 위반, 특히 '전쟁범죄(war crime)'에 대한 처벌 관한 마련 시도와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한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Briand Pact 또는 Part against humanity)'의 법제화를 도모하며 주권을 제한하고자 했다. of Paris)은 대표적인 두 가지 예로, 이 두 가지 모두 '인류에 대한 범죄(crime 전자와 관련해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대개 전쟁법이나 국제적인 별척 의무 위반의 개념을 위주로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에 반해, 전쟁 이후에는 국가 간 공적 질서'를 깨뜨린 '국제범죄'의 처벌을 위한 국제재판소 설치의 필요성이 논제로 떠올랐다. 종전 직후 빌헬름 2세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민간연공격에 대한 독일군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다섯 승전국의 법조인이 주축이 되어 꾸려진 전쟁 책임자 처벌위원회(the Commission on the Responsibility of the Authors of the War and on Enforcement of Penalties)는 달라진 분위기를 예고했다. 윌슨의 공식적인 제안 이후 영국 정부 내에서 LN의 창립 준비를 맡았던 항소법원 주법관 월터 필리모어(Walter Phillimore, 1845~1929)와 내각 산하 독일전쟁범죄위원회(Cabinet Committee on German Crimes in the War)의 명예 간사였던 휴 벨롯(Hugh Bellot, 1890~1969)은 ILA의 임원으로 전쟁범죄를 개별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공동체(international community)'의 문제로 민식할 것을 설득했다. 국제법이 국가 간의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도덕적이고 법적인 원칙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도 국제법의 보호 대상이 된다는 필리모어와 벨롯의 주장은 ILA의 전통적인 주권 중심적인 사고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국제 공동체에서 법의 역할(The 파크(Hersch Lauterpacht, 1897~1960) 등에 의해 계승되며, 제2차 세계대전이 Function of Law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1933)의 저자 허쉬 라우터 후 국제사법재판소의 설치로 이어졌다. 한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직접적인 배경은 라인란트 지역 점령을 둘러싼 독일 다음으로,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해 국제분쟁의 평화적인 해결을 확립하고자 (p.321) |
| 과 프랑스의 계속된 충돌을 해결하고 유럽의 안정을 가져다준 로카르노 조약(Treaty of Locarno, 1925)과 이를 기점으로 한 프랑스의 다자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이지만, 기틀을 놓은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평화운동에 뛰어든 미국의 기업 변호사 샐먼 레빈슨(Salmon Levinson. 1865~1941)이었다. 레빈슨은 "오늘날 세계의 진정한 질병은 전쟁의 합법성과 유용성이다"라고 일갈하며 "전쟁에 관한 법(laws of war)이 아니라 전쟁에 맞선 법(laws against war)"을 국제적으로 입안해야 할 것이라고 주창했다. 윌슨의 LN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를 추구하기에 미봉책에 불과했다. 레빈슨의 친구였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1859-1952)가 응원했듯이, 전쟁도 노예제와 같이 그 자체를 아예 불법으로 간주해야 근절될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1921년 레빈슨은 '전쟁의 불법화를 위한 미국 위원회(American Committee for Outlawry of War)'라는 단체를 만들고, 카네기 국제평화재단과 함께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레빈슨의 과감한 주장은 미국 상원의원 윌리엄 보라(William Borah, 1865~1940) 등의 지지를 받으며 프랑스의 총리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 1862~1932)의 줄기찬 안보협력 요구에 당황하고 있던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Frank Kellog, 1856~1937)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미국과 프랑스 외 60여 국가가 동참하지만, 켈로그-브리앙 조약은 상징적인 선언으로 부담이 없었기에 미국의 LN 가입 반대 이후 국내외에서 쏟아진 공화당 정부의 고립주의에 대한 비판을 무마할 좋은 방편이 되었다. 그럼에도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대한 국제 여론의 열렬한 지지는 전쟁과 전쟁의 위협이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음을 방증했다. (6)끝으로 위임통치령도 영국을 위시한 승전국의 제국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수단에 머물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며 식민 제국에 종언을 고하고자 했던 윌슨의 미국은 예전으로 돌아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관련 내용은 모호했다. LN 규약 제22조는 "국제연맹은 근대세계의 고된 환경 속에서 홀로 설 수 없는 민족의 안녕과 발전을 책임지며", "국제연맹이 부여받은 이와 같은 문명의 신성한 의무는 자원과 경험, 그리고 지리적인 여건상 지도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앞선 국가가 대신해 맡는다"고 적고 있으나, 구체적인 기간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승전국의 식민지는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p.322) |
| 하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해 LN 내 설치한 상설 위임통치령위원회(Permanent IN) 사무국 위임통치령 담당 국장이었던 경제사가 출신의 스위스 외교관 윌(standates Commission)는 예상과 다르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초대 라파드(William Rappard, 1883~1958)는 위임통치령의 목적이 식민지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혁하는 데 있다고 확신했다. 상설 위임통치령위원회 위원으로서 소회와 전망을 담은 「제네바에서 본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s as thewed from Geneva)」(1925)에서 라파드는 "죄악 속에서 태어난 이 아이가 어 통계 선행을 베풀 수 있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공개적인 감시·감독 체제의 운 땅을 손꼽았다. LN 규약 제22조에 따라 해당 국가는 매년 ILO에서 파견된 1명 1회 위원과 중립적인 국가 소속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상설 위임통치행위원회이 보고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야 했는데, 이러한 공개적인 평가 과정으로 인해 해당 국가는 '문명국(civilized nation)'으로서 자국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지역민의 복지와 자치 능력 함양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했다. 특히 상설 위임통치령위원회가 지역민의 불만 접수창구의 역할까지 맡게되면서 해당 국가는 국제적인 여론에 더더욱 노출되었다. LN의 다른 여러 위 평화와 마찬가지로 상설 위임통치령위원회도 기준 미달 국가에 대한 처벌이나 제재의 권한이 없었으며, 모든 위임통치령 지역을 관리할 예산이나 인력도 턱 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위임통치령과 상설 위임통치령위원회의 공개외교는 라 파드가 소망한 대로 제국주의에서 국제사회로 넘어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 주민 자치가 가능하다고 분류된 A 등급 지역으로 영국이 위임통치를 맡은 플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이라크, 그리고 프랑스가 위임통치를 맡은 시리아와 레바논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 약속대로 절차에 따라 독립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LN을 집단안보 기구로 선전한 윌슨과 UDC와 달리, 전후 LN 외창설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대다수 논자는 현실적인 고려에 따라 IN을 과거화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봤다. 옥스퍼드대학교 고대사 교수로 영국 정부를 대변 했던 앨프리드 짐먼(Alfred Zimmern, 1879~1957)은 「국제연맹과 법의 지배. 1918~1935 (The League of Nations and the Rule of Law, 1918-1935)』(1936)에서 IN은 절대 혁명적인 기구가 아닐뿐더러 혁명적인 기구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p.323) |
| 김먼은 LN을 신외교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도 많지만, 사실 LN은 '국가 간 관계가 좀 더 만족스럽게 맺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기구로, 구외교의 대체가 아닌 보완을 목적으로 한다고 강조했다. 짐먼은 LN의 존재와 성공은 다종다양한 국제 교류의 활성화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역설적으로 보여 주듯이, 이제 세계는 좋든 싫든 산업혁명에 힘입어 팽창한 유럽의 국제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관리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기능적인 이유에서 국가 간 회담은 정기적인 국제회의로, 국가 간 조약은 체계적인 국제법으로 발전을 해 왔던 것이다. 1899년과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담(Hague Conventions)과 1911년 미국과 영국, 미국과 프랑스 간에 체결된 중재조약(Taft Arbitration Treaties)은 일시적인 화해가 아니라 역사적인 진화로 LN의 탄생을 예고했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등과 함께 LN 산하 국제지적협력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n Intellectual Cooperation) 위원으로 활동한 머리 역시 「국제연맹과 민주적 사고(The League of Nations and Democratic Idea)』(1918)에서 "현재 여러 국가가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체결한 중재 조약을 LN을 중심으로 결합해 상호 보장하도록" 조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편 후일 남아프리카연방 총리가 되어 「국제연합 헌장(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1945)의 작성에도 지대하게 기여하는 인물로, 파리강화회의에 남아프리카연방 대표로 참석한 얀 스뮈츠(Jan Smuts, 1870~1950)는 불평등과 위계에 기초한 제국제제나 국가연방 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주권 독립과 정치적인 분권을 원칙으로 하는 LN의 실존하는 모범으로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을 제시했다. 특히 스뮈츠는 이행 단계로서 위임통치령을 제안했다.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시작으로 자치정부를 구성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정된 지역은 해당 지역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통치할 능력을 지닌 국가가 LN을 대신해 임시로 맡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민족자결주의를 위배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위임통치령은 제국과 식민지 개념이 국제사회 개념으로 변환되는 단초가 되었다. (p.324) |
| 5. 전간기의 역설 전간기 유럽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단히 부정적이며, 이는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또다시 파괴와 살육을 저지른 데에 기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전환기 유럽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단히 부정적이며, 이는 역사의 교훈 끝나고 20년 동안 유럽이 이뤄낸 것은 비참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과 이를 일으킨 전체주의 국가였다. 전간기 서양 지성사에 대한 두 기념비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의 『20년의 위기: 1919~1939』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공히 이의 원인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지목했다. 서유럽과 국제정치에 초점을 맞 춘 카는 LN의 문제를 지적했고, 동유럽과 국내정치에 초점을 맞춘 아렌트는 족자결주의의 문제를 지적했다. 흥미롭게도 베르사유 조약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LN에 대한 카의 비판과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알네트의 비판은 전간기 유럽은 동유럽이나 서유럽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허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럽이 도덕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현실과 괴리되었다면, 동유럽은 권력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현실과 괴리되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LN은 무능했고, 전체주의 국가는 난폭했다. 홀로코스트로 집약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은 현실을 간과한 베르사유 조약의 비극적인 귀결이었다. 이 장에서는 두 사람의 분석과 달리 베르사유 조약의 긍정적인 함의를 도출해 보고자 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이 국제사회의 성장에 공헌한 점을 재조명 했다. 베르사유 조약이 국제사회 성장의 기폭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이 1917년 두 차례의 러시아혁명과 미국의 참전으로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앞서 치러진 유럽의 여느 전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독일과 러시아. 프랑스와 영국, 모두가 자국의 안보적인 이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을 조정하고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쟁은 각국 정부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서부전선에 이어 동부전선까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총력전의 정치적·경제적 부담은 모든 국가에서 빠르게 가중되었다. (p.325) |
| 급기야 이를 견디지 못한 러시아제국은 무너져 내렸고, 이를 타개하고자 독일이 실행한 최후의 수단은 미국의 참전을 불러왔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제 전혀 다른 전쟁이 되었다. 전쟁의 주도권만 미국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윌슨의 미국은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했다. 미국의 전쟁 목표로 공지된 「14개조 평화 원칙」에 담긴 윌슨의 전후 국제질서 구상은 미국의 외교 전통을 집약한 것이었으나 전전 유럽의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이 비판적으로 모색하던 대안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과거의 외교는 구외교로 동맹과 비밀외교 그리고 군비확대와 제국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전쟁의 체제였고, 미래의 외교는 신외교로 공개외교와 국제기구, 그리고 군비축소와 민족자결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평화의 체제였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목표는 국제적인 여론의 환호 속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구외교에서 신외교로의 역사적인 전환을 알리는 선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도 이에 동참했다. 로이드 조지의 자유당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대안적인 국제질서를 논하며 영국 외교정책의 기조 변화를 촉구했던 UDC가 이끌게 된 노동당과 공조했다. 프랑스가 강하게 요구한 독일에 대한 집별적인 조치는 독일에 대한 보복과 세력균형의 복원이 아니라 전 세계가 새로운 국제질서로 진입하기 위한 첫 단계로 받아들여졌다. 독일에 가해진 제약은 다른 모든 국가가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사회를 향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그 선두에는 LN이 자리했다. 1919년부터 1929년까지, LN은 국가이익으로 분절된 구외교의 세계를 인류애와 정의로 연결된 신외교의 세계로 착실하게 교체해 나갔다. ILO에 의한 노동개혁부터 여성운동, 노예제 폐지 운동, 난민 보호 등 다양한 인도주의 활동과 경제협력과 긴급 구호 그리고 위임통치령 관리까지 LN은 수많은 국제주의 운동의 든든한 구심점이 되었다. 주권과 직결된 국제법 분야와 군사 분야에서도 더뎠지만 국제사회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졌다. 이유를 불문하고 전쟁은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고, 전후 어려운 재정 상황 때문이기도 했으나, 무분별한 군사력 증강정책도 점차 포기되었다. 국제정치의 정당성은 더 이상 국가이익에 있지 않았다. (p.326) |
| 국제정치의 정당성은 이제 국제사회에 있었다.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모두 여전히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은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으로 당연시되던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흔히 지적되듯이.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한 국제질서는 대공황 이후 전체주의 국가의 부상과 그에 따른 일련의 국제적인 위기 앞에 좌초했다. 대공황이 가져 온천 세계적인 혼돈 속에서 일어난 만주사변(1931)과 아비시니아 위기(1934). 그리고 독일의 재무장(1935)과 오스트리아 합병(1938)에 대한 LN의 대응은 부현할 여지없이 미온적이었다. LN의 집단안보 체제는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는 궁극적으로 LN의 잘못이라기보다 LN을 만들고 꾸려 온 영국을 위시한 주요 회원국 정부의 잘못이었다. 군사적인 제재는 말할 것도 없고, LN이 효과 경일 것이라고 자신했던 경제적인 제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위험을 감수할 용기와 결의 있어야 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영국 정부 또한 다시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손익을 따졌다. 일본이 반발해서 아시아에서 트쟁이 발생한다면, 유럽의 안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탈리아가 반발해서 지중해에서 분쟁이 발생한다면, 유럽 대륙의 안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독일이 발발해서 유럽 대륙에서 분쟁이 발생한다면, 전 세계의 안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영국 사회에 놀라울 정도로 깊게 뿌리내린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도 사태의 악화에 한몫을 했다. 그럼에도 제2차 세계대천으로 가는 일련의 위기는 어찌 되었든 해당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었으며, 그렇기에 제2차 세계대전은 국제연합(United Karions)과 브레턴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과는 처음부터 다른 성격의 전쟁으로 치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구외교에서 신외교로의 전환이 이토록 신속 무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 베르사유 조약이 아니었다면, 유럽과 세계는 20년 동안이라도 안정을 누리며 회복할 수 있었을까? LN과 민족자결주의가 아니 됐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날과 같은 국제질서가 전 지구적으로 확립될 수 있었을까? 이 세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p.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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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구지성사입문
<교재> 제12장 『양차 세계대전과 국제사회의 성장』
교재 본문을 스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