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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4/05| 우표로 본 오늘~
1908 - 미국의 배우 데이비스(Davis, Bette) 출생 데이비스 [Davis, Bette, 1908.4.5~1989.10.6] 미국의 배우. 매사추세츠주(州)에서 출생하였다. 연극학교를 거쳐 무대에 섰다. 특징 있는 눈과 날씬한 몸으로 다감하고 지성적인 연기를 하여 인정을 받았다. 1931년부터 영화와 무대에서 주연 여배우가 되었다. 《청춘의 항의》(1935), 《흑란(黑蘭)의 여인》(1938)으로 아카데미상(賞), 《소문난 여자》(1936)로 베네치아 영화제, 《이브의 모든 것》(1950)으로 칸 영화제에서 각기 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이 밖에 영화 《치인(痴人)의 사랑》 《화석의 숲》 《달빛의 여인》 《허위의 화원》 《라인의 감시》 《무엇이 제인에게 일어났는가》 등의 대표작이 있다. 미국 영화 ·연극의 총본산적 존재이다. /naver
1908 -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카라얀(Karajan, Herbert von) 출생 카라얀 [Karajan, Herbert von, 1908.4.5~1989.7.16]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를 지망, 빈에서 피아노공부를 하였으나 뒤에 스승 호프만의 권유로 F.샬크에게 사사하여 지휘를 배웠다. 1929년 울름의 오페라극장에서 데뷔, 그 후 아헨오페라극장의 음악 총감독을 거쳐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상임지휘자로 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베를린필하모니를 지휘하고 있던 푸르트벵글러의 상대자가 되어 인기를 모으고 전후에는 활동범위를 오스트리아·이탈리아·영국에까지 확대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1960년경부터는 베를린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푸르트벵글러의 후임),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총감독, 빈 악우회(樂友會)의 종신지휘자, 빈 필하모니관현악단 지휘자, 잘츠부르크음악제 총감독, 스칼라극장의 상임지휘자 등을 역임, 유럽 악단의 중요한 자리를 거의 독점하였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해석으로 뒷받침된 지휘는 모든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레퍼토리도 광범위하였다. 1984년에는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naver
1901 - 시인 이상화(李相和) 출생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어제의 오늘]1901년 시인 이상화 출생 ㆍ나라 잃은 비통함에 온몸으로 저항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냐고 물었던 시인. 오늘은 이상화가 세상에 난 날이다. 이상화는 1922년 동향 친구인 현진건의 소개로 가담한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쓰다가 1924년쯤을 기점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와 같이 식민지하의 민족 현실을 담은 시를 노래했다. 이상화는 나라 잃는 국민의 비통과 분노를 문학에 담은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4042137485&code=100100&s_code=ap005
1900 - 미국의 영화배우 스펜서 트레이시(Tracy, Spencer) 출생 트레이시 [Tracy, Spencer, 1900.4.5~1967.6.10] 미국 배우. 2회 연속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유일한 배우이다. 트레이시는 제1차 세계대전중 미해군에서 복무한 뒤, 위스콘신의 리폰대학에 들어갔다. 학교 연극에서 인기를 얻은 그는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 시로 갔으나 배우로서의 기반을 잡을 때까지 여러 해를 어렵게 보내다가 193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연을 맡게 되었다. 〈The Last Mile〉에서 보인 연기에 감동을 받은 영화감독 존 포드가 그를 〈강을 거슬러 Up the River〉(1930)에 출연시켜 이를 계기로 그의 영화경력이 시작되었다. 남자주인공의 전형적인 용모를 갖추지 못한 트레이시는 주로 불굴의 사나이 역을 맡았다. 험상궂은 용모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고 노련한 연기로 얼마 안 되어 1930년대 최고 스타의 자리를 굳혔다. 트레이시는 영화사를 옮긴 후 〈용감한 선장들 Captains Courageous〉(1937)에 출연,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로부터 오스카상을 받았으며 1년 뒤 〈보이스 타운 Boys Town〉에서의 연기로 또다시 상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아카데미상 후보자 명단에 7번이나 올랐다. 1942년 여배우 캐서린 헵번과 인연을 맺어 두 사람의 관계는 평생 지속되었다. 트레이시와 헵번은 9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는데, 두 사람의 대조적인 연기방식은 〈아담의 갈비뼈 Adam's Rib〉(1949)와 트레이시가 마지막 출연한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Guess Who's Coming to Dinner〉(1967)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창조했다. /브리태니커
1882 - 중국의 혁명가 쑹자오런[宋敎仁] 출생 쑹자오런 [宋敎仁, 1882.4.5~1913.3.22] 자는 돈초(遯初)이고, 호는 어부(漁父)이다. 후난성[湖南省] 타오위안[桃源] 에서 출생했다.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의 보통학당에 다니던 중 반청(反淸)운동에 관계되어 퇴학당한 뒤, 일본에 유학, 철도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04년 귀국하여 창사[長沙]에서 황싱[黃興] 등과 화흥회(華興會)를 조직, 청조(淸朝) 타도의 봉기를 꾀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공부하였다.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 성립과 동시에 동맹회 사법부 검사장에 뽑혔고, 기관지 《민보(民報)》의 편집을 맡았다. 1910년 상하이[上海]에서 《민립보(民立報)》를 발행하였는데, 그 해 우창 봉기가 성공한 후 혁명정부의 고문, 1912년 난징[南京]임시정부가 성립되자 법제원 총재가 되어 임시약법(臨時約法)의 제정에 힘썼다. 그 해 3월 민국 제1차 내각에 입각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동맹회의 조직확대에 전력을 쏟았는데, 12월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개조, 이사장 대리로서(이사장은 쑨원[孫文]) 사실상의 당수가 되어 선거에서 국민당의 압승을 가져왔다. 한편 정당내각제를 만들어 대통령 위안스카이[袁世凱]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1913년 상하이역에서 위안스카이가 보낸 자객의 저격을 받고 죽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2혁명이 일어났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naver
1869 - 프랑스의 작곡가 루셀(Roussel, Albert) 출생 루셀 [Roussel, Albert (Charles Paul Marie), 1869.4.5~1937.8.23] 투르쿠앵 출생. 18세 때부터 7년간 해군장교로 해상생활을 하면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하다가 1894년 군에서 제대하자 파리의 스콜라 같토룸에 입학하여 V.댕디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모교에서 12년간 대위법 교수로 근무하고, 1914년 이후는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연대적으로는 드뷔시와 라벨의 중간에 위치하며, 그들과 함께 프랑스 근대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나, 보수적이었으며 만년에는 신고전주의에 가까워졌다. 작품은 극장음악 ·관현악곡 ·실내악곡 ·독주곡 ·성악곡 등 다양하며 리듬의 우위성과 특징적인 알레그로 주제, 유럽 이외 지역의 선법을 바탕으로 한 화성 등에 특색이 있다. 그의 작품은 스타일에 따라 다음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시기로 교향곡 제1번 《숲의 시》(작품 7, 1904∼1906), 발레곡 《거미의 향연》(작품 17, 1912) 등이 대표작이며, 제2기는 낭만파적 경향을 띤 것으로 오페라 발레곡 《파드마 바티》(작품 18, 1914∼1918), 교향시 《봄의 축제》(작품 22, 1920), 발레곡 《리라의 탄생》(작품 24, 1922) 등이 주작품이며, 제3기는 그의 작품을 결정지은 고전주의시대로 《교향곡 제3번》(작품 42, 1929∼1930), 《현악을 위한 심포니에타》(작품 52, 1934) 《교향곡 제4번》(작품 53, 1934) 《플라망광시곡》(작품 56, 1936)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naver
1856 - 미국의 흑인운동 지도자, 교육가 워싱턴(Washington, Booker T.) 출생 워싱턴 [Washington, Booker Taliaferro, 1856.4.5∼1915. 11.14] 버지니아주 출생. 노예로 태어나 9세 때 해방되었다. 햄프턴학원을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하다가 1881년 흑인전문학교인 터스키기대학을 창설하고, 이후 34년 동안 학장으로서 흑인을 위한 학교 발전에 힘썼다. 워싱턴은 흑인교육이 흑인의 생활향상에 필요하며 백인의 지지와 원조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실업교육이 그 중심형태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실천을 넓혀갔다. 1895년 애틀랜타박람회연설에서, 흑인에게는 사회적 평등에 대한 요구보다도 근면하게 일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선결이라 주장하고, 백인에게는 남부의 산업발전에 흑인이 꼭 필요하다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요구를 억제하고 경제적 이익으로 백인과 흑인의 화해를 꾀한 대변인으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흑인의 자조(自助)를 권장하고 흑인실업가 육성을 중요시하였으며, 1900년에는 전국흑인실업가연맹을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다. 자본가와 정치가 등 유력한 백인의 지지를 얻은 그는 스스로 정치가가 되지는 않았으나, 흑인에 대한 원조금이라든지 임관(任官) 결정 때는 반드시 상담을 요청받을 만큼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흑인사회 안에서의 비판적 조류에 대해서는 억압도 마다하지 않는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 뒤 나이아가라운동이 일어나 전국흑인향상협회가 결성되어 그도 차츰 수세에 몰렸으나, 죽을 때까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조정자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교육가로서도 국제적인 영향력을 미쳤고, 1895∼1915년 미국 흑인들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변인이었다. /yahoo
1832 - 프랑스의 정치가 페리(Ferry, Jules) 출생 페리 [Ferry, Jules (François Camille), 1832.4.5∼1893.3.17] 프랑스 정치가. 생디에 출생. 1869년 반제정(反帝政) 활동으로 제정 마지막 총선거에서 급진공화파 의원이 되었으나, 제3공화정 성립 후 온건공화파가 되어 급진공화파의 좌익적 개혁정책을 기피하였다. 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파리임시국민정부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1879∼1885년 교육부장관과 2번의 수상을 지냈는데, 대내적으로는 교회에서 벗어난 초등의무교육제도를 창설하는 등 가톨릭의 반공화주의적 활동을 막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식민지확장정책을 취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의 통킹만 정책 수행시 의회의 반발로 실각하였다. /yahoo
1827 - 영국의 외과의사 리스터(Lister, Joseph) 출생 리스터 [Lister, Joseph, 1827.4.5~1912.2.10] [역사속의 인물] 무균수술법 발명 조지프 리스터 19세기까지 의사들은 피와 고름이 덕지덕지 붙은 일상복 차림으로 손도 씻지 않은채 수술을 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모습은 그 의사가 성업중이라는 자랑스런 표식이었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 수술 환자의 30-50%가 환부의 감염으로 사망했다.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던 것은 외과 상처의 감염은 세균이 아니라 미지의 독기(毒氣)가 원인이라고 믿은 무지 때문이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조지프 리스터이다. 1827년 오늘 영국 에식스주에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의과대학생 때부터 외과 상처의 감염은 미지의 독기(毒氣)가 아니라 공기중에 떠도는 어떤 고형체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1865년 수술에 적용했다. 하수구 정화에 사용되던 석탄산으로 환부를 소독하고 의료진의 손과 의복, 의료장비 등 환부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멸균처리했다. 마취제 사용과 함께 외과수술의 2대 혁명으로 불리는 무균수술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의사가 백색가운을 입게 된 것도 그의 발명이다. 이 공로로 그는 의사로는 최초로 남작(男爵)이 됐으며 1998년 라이프지가 뽑은 ‘지난 1천년의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04월 0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113&yy=2010
1811 - 프랑스의 풍경화가 뒤프레(Dupré, Jules) 출생 뒤프레 [Dupré, Jules, 1811.4.5~1889.10.6] 낭트 출생. 도자기 제조업자의 아들. 바르비종파(Barbizon 派)에 속하며, 근대 프랑스 풍경화의 창시자이다. 처음에는 가업(家業)에 따라 도자기에 그림 그리기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렇다 할 스승도 없이 자연을 스승으로 독학 정진한 작가로, 1831년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하였다. 《자연에 의한 에튀드(étude:習作)》 등 7매의 풍경화를 발표, 1934년 영국에 여행하여 J.콘스터블과 R.보닝턴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만년에는 드라마틱한 풍경화를 창작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서, 작품이 유형화(類型化)하였다. 대표작에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폭풍우 뒤에 지는 태양》(1951) 《냇물이 있는 풍경》 등이 있다. /naver
당통 [Danton, Georges (Jacques), 1759.10.26~1794.4.5] [오늘속으로<766>(4월5일) 당통 /고종석] 1794년 4월5일 프랑스 혁명 지도자 조르주 당통이 단두대에서 35년의 생을 마감했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에베르, 데물랭 등과 함께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혁명이 터졌을 때 이들은 20대나 30대 청년들이었고, 혁명 권력의 핵심부에서 프랑스를 이끌다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었을 때도 20~30대 청년들이었다. [오늘속으로<766>(4월5일) 당통 /고종석] /www. politizen.org
1784 - 독일의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슈포어(Spohr, Louis) 출생 슈포어 [Spohr, Louis, 1784.4.5~1859.10.22]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생전에는 베토벤을 능가하는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받았으며, 이탈리아의 파가니니와 견줄 만한 연주자로도 꼽혔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과 체계적인 음악이론을 공부한 탓으로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의 그의 데뷔는 화려하였으며, 또한 활동도 여러 방면에 걸쳐 눈부셨다. 특히 독주악기로서의 바이올린에 참다운 낭만적 서정성을 곁들여, 여러 가지 기교적인 개혁을 시도한 공적은 크며, 문하생으로 F.다비트, M.하우프트만, J.벰 등을 배출함으로써 독일파의 원조가 되었다. 작곡가로서의 그는 15곡의 바이올린협주곡을 비롯하여 교향곡 ·실내악 ·오페라 등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부인이 하프 연주자였던 관계로 부인을 위한 하프용 작품도 많다. 오페라분야에서도 《파우스트》 《예손다》 등의 작품을 작곡하여 C.베버와 더불어 독일 국민오페라 성립에 큰 몫을 했으며, 초기 독일낭만파의 중요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지휘자로서는 1822년 이후 카셀의 궁정악장직에 있으면서 지휘봉의 채택을 비롯하여 새로운 지휘법을 실행에 옮겼다. 저서에 《바이올린 교칙(敎則)》(1831)이 있고, 흥미 있는 자서전도 남겼다. /naver
- 'Girl Writing Letter' - 'The Letter'
- 'Rosalic Fragonard' - 'Child dressed as Pierrot'
- 'L'Etude' - 'A Stolen Kiss'
1732 - 프랑스의 로코코 시대 화가 프라고나르(Fragonard, Jean Honoré) 출생 프라고나르 [Fragonard, Jean Honoré, 1732.4.5~1806.8.22] [역사 속의 인물] ‘로코코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프랑스 절대 왕정 시대에 유행한 로코코 미술의 대표적 화가. 1732년 오늘 태어나 1806년 74세로 숨지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여 550점이 넘는 회화와 수천 점의 소묘를 제작했다, 섬세하고 쾌락주의적인 연애 풍속화 '그네', '책읽는 소녀' 등이 대표작이다. 15세 때 변호사의 도제로 들어갔으나 그림에 의욕을 보였던 프라고나르는 유명 화가인 프랑수아 부셰의 제자가 된다. 이후 프랑스 궁정 화실과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반관능적이면서도 활기찬 화풍으로 주목을 받았다. 충만한 생동감과 장중한 위압감을 특징으로 하는 바로크 미술에 뒤이어 종교적 삶에서 벗어나 현세적 삶을 찬미하며 화려한 세련미를 추구하는 로코코 미술의 총아가 되었다. 로코코 미술은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으로 독일 등에 영향을 미치며 절정에 달하나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싹트면서 신고전주의에 밀리게 된다. 프라고나르 역시 경직된 양식의 이 화풍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잘 나가던 프라고나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로 잊혀졌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림 제작도 하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내다 쓸쓸히 숨졌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4월 05일 http://www2.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6116&yy=2011
1722 - 네덜란드 해군 제독 야곱 롯게페가 이스터 섬을 발견하다 이스터 섬(Easter Island, 스페인어:Isla de Pascua이슬라 데 파스쿠아, 문화어:빠스꽈 섬)은 태평양에 위치해 있는, 칠레령의 섬이다. 이스터 섬 주민들은 라파 누이(Rapa Nui ‘커다란 땅’)라고 부른다. 수도는 항가로아이다.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하다. 이름의 유래 1722년 부활절에 네덜란드의 로게벤이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이 섬을 발견하였다. 이 섬의 영어이름 이스터(Easter)와 스페인어 이름 파스쿠아(Pascua)는 모두 부활절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이 섬을 라파누이(Rapa Nui)라 부르는 데 커다란 땅이란 뜻이다. 지리 이스터 섬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다. 폴리네시아로 불리는 여러 섬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스터 섬은 칠레로부터 약 3,700 Km, 핏케언 제도로부터 2,075 km 떨어져 있다. /위키백과
1242 - 얼음전쟁에서 넵스키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튜턴 기사단의 침입을 막아냄 넵스키(네프스키) [Nevsky, Aleksandr, 1220?~1263.11.14] 몽골(킵차크 한국) 지배 시대의 러시아대공. 본명 Alexandr Yaroslavich. 블라디미르 출생. 블라디미르대공인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 북서 러시아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한 러시아의 국민적 영웅이다. 1240년 노브고로트 영토에 쳐들어온 스웨덴의 대군을 적은 병력으로 네바강(江) 강변에서 섬멸하였다. 넵스키(네바강의 뜻)라는 이름은 이 싸움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귀족과의 분쟁 때문에 노브고로트를 일단 떠났으나, 리보니아의 독일 기사단(騎士團)의 침입을 걱정한 시민의 요청으로 1241년 봄에 노브고로트로 되돌아갔다. 이어 군비를 갖추고 점령된 땅을 탈환하였고, 다시 기사단장이 거느린 대군과 결전하여 1242년의 페이푸스호(湖)상의 ‘빙상(氷上)의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러시아를 가톨릭화(化)하려는 로마 교황의 야망을 봉쇄하였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으며 당시 강력한 몽골의 지배에는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신뢰를 받아, 125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블라디미르대공에 취임하였다. 그뒤 러시아의 제공(諸公)과 킵차크 한국과의 충돌을 조정하였고, 노브고로트 민중의 반(反)몽골반란(1259) 때도 그 진압에 협력하였다. 복동부 러시아 주민이 한국(汗國)의 세리(稅吏)와 분쟁을 일으켰을 때, 한국에 가던 도중에 죽었다. 그의 국토방위의 공적은 러시아의 민요로도 불리며, 러시아 교회는 그를 성자(聖者)로 제향하였다. 한편, 표트르 l세는 네바 강변의 싸움터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유골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제정(帝政) 정부는 그의 훈장을 제정하였다. 1942년의 소비에트 정부도 제정정부의 전례에 따랐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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