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새벽별
2020. 12. 백란주
‘Goldstar’ 전자레인지 로고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듯하다.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냐는 듯이. 큰아이보다 나이가 많다. 주인 없는 신혼집에 먼저 배달되어 나를 기다렸던 몇몇 중 세탁기, 냉장고와는 이별했다. LG라는 새로운 옷을 입은 냉장고에게는 어머니 같은 Goldstar 전자레인지의 시간을 본다.
온기마저 식혀버리는 냉장고와 달리 서툰 나의 음식솜씨조차 탓하지 않고 몇 분의 따뜻함으로 식은 음식에 온기를 넣어 주었다. 가득 채워져 있는 대식가의 냉장고와는 달리 소식가 전자레인지는 늘 비움의 상태다. 용량에 중심을 두고 외관에 신경을 쓴 냉장고 앞에서 구형 전자레인지는 데우기 기능 하나만으로 꼿꼿하다. 쉬이 바꾸지 않을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깨끗해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 그도 이제는 흠을 안고 있다. 누르기 버튼은 몇 번을 눌러야 한다. 하얀색의 내부는 노화에서 오는 검버섯처럼 칠이 벗겨져 마치 검버섯이 돋아난 듯하다. 문을 열고 닫음에서 오는 전구 빛은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전자레인지를 바꿀 생각이 없다. 순식간에 찬밥을 따뜻하게 전해주는 마음만은 아직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할 때, 엄마는 일인 밥상을 사주면서 부탁했다. 혼자 먹는 밥이라고 대충 먹지 말고 밥상에 차려서 먹을 것. 찬밥 먹지 말고 전자레인지 데워서라도 따뜻한 밥 먹을 것. 당신 자신은 못하면서 시집가는 딸아이는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란 진심을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되었다. 아직 내게서 숨을 쉬고 있는 밥상과 전자레인지를 만져본다.
엄마 곁에 누웠다. 엄마는 내게, 나는 엄마에게 이불을 덮는다.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간다. 우리는 언제나 할머니 곁에 누웠다. 일이 바쁜 엄마보다 할머니가 늘 함께였기에 소소한 일상도 할머니 몫이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딸이 없는 할머니께 언니랑 나는 손녀딸인 동시에 딸의 입장이 되어 할머니 속마음을 읽어야했다. 어른들 화법은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나의 언어인지 모른다. 어른들의 반어법에 익숙한 이유일 것이다. 어린 날 오해 아닌 오해, 엄마는 우리보다 일이 더 좋은 줄 알았다. 딸이 없는 할머니에 대한 배려였음은 할머니 돌아가신 후에 알게 된 진실이었다. 당신 딸들을 빼앗겼다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코로나 덕분에 친정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동생이 코로나 검사에서 음성으로 나왔지만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2주간 자가 격리를 해야 된다. 외출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 지내야 하기에 아파트보다는 주택인 부모님 댁에 동생이 있고 부모님은 나와 함께 있기로 했다.
시어른들은 농번기가 끝나면, 한 달 정도 계시다 갔다. 어머님과 보낸 시간은 몇 겹이 되는데 결혼 후 엄마랑 보낸 시간은 여름 홑이불보다 얇았다. 창원에 살 때는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 엄마의 상황으로 딸네에 와서도 하룻밤을 잘 수 없었다. 엄마의 외출은 공식적인 이유가 아니면 스스로 삼갔다. 통영으로 와서는 가깝다는 이유로 친정에서 자지 않고 내가 집으로 왔다. 하룻밤, 대장내시경 검사를 앞두고 엄마랑 보낸 밤이 전부였다.
시어머님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이 나는데 엄마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엄마에게는 받기만 한 우리들의 일방적 수신인지 모르겠다. 부모님, 특히 엄마를 기억하라는 선물처럼 내겐 다가온 시간이다.
새벽이 되면 아니 자정이 지나면 초침소리보다 먼저 잠을 깨고 집 앞 굴막으로 가기위해 애를 썼을 것이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함을 타고난 엄마는 겨울이 주는 어둠을 거부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갔을 모습이 보지 않아도 그려진다.
집에 온 이틀은 계속 주무셨다. 이렇게 잠을 못 이기는데 어찌 새벽마다 갔을지. 자는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함께 샤워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모녀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상을 나눈다.
“평생 누군가를 대접할 줄 알았지 자신을 대접할 줄 몰랐으니, 집에 있는 동안은 엄마를 위해 지내기. 세수할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 물 묻히지 않기.”
엄마에게 약속을 받았다. 언제나 시댁 식구들 챙기기 바빴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다. 외할머니랑 20년 지내고 할머니랑 40년을 지낸 엄마의 기억 속에 머무는 친정엄마, 외할머니는 그리움이다. ‘그때 조금 더 잘해 드릴 걸.’ 시댁에만 너무 치우쳐 살았던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느낌이다. 나는 엄마 닮은 시간이 되지 않기 위해 엄마랑 사소함을 나누려 한다.
아들이라는 반경이 주지 못하는 시시콜콜함이 있는 듯하다. 며느리 집에서는 쉽게 기웃거리지 못하는 뒤적임을 내가 나갔다 오면 어느 방에 무엇이 있고 서랍에 무엇이 있는지 안 쓸 것인지 묻는다.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물어보면 하나씩 찾아서 보여준다. 딸이 주는 다른 반경의 편안함으로 딸아이 살림살이를 뒤적여보는 것에 토를 달지 않는다.
마음의 감옥, 어쩌면 나도 엄마에게는 마음의 감옥 한 칸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친정엄마라는 이름은 화수분처럼 내어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명하는지도. 양념마늘이 떨어지기 전에 까서 주는 분, 시시때때로 깨소금을 볶아 주는 분, 당신 살림만 해도 바쁠 것인데 내게 엄마는 당신 것 하면서 했다고 한다. 우리들 것 하면서 당신 것 조금 남겼을 것을 알고 있다.
시어머님과 이별 후 남편이 “엄마가 그렇게 쉽게 떠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별이란 내가 온전한 마음이 되었을 때, 준비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다시 익혔다. 코로나 때문에 일상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코로나 덕분에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른 기능은 멈춤 상태지만 데우기 기능은 아직 살아있듯이, 엄마의 활동이 어느 날 사라지더라도 우리들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 깜빡거리며 데우기 기능으로 살아갈 것을 느껴본다. 샛별이 되어 새벽길 밟듯이 영원히 우리들을 위해 길을 내어주는 당신의 사랑은 영원한 금성 Goldsta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