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명과 암
석현수
세상 모든 일이 밝고 어두운 면이 있듯 글 또한 예외일 수가 없다. 아름다운 미인에게 따라붙는 박명이라는 말과, 천석꾼이 가진 천 가지 걱정처럼 박목월의 시 <나그네> 또한 유명시가 주는 밝고 어두운 양면성이 존재한다. 시인의 탁월한 목가적 서정을 조명해 본다면 밝은 면 일터이고, 이에 반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잘 읽어내지 못한 것은 시인의 어두운 면이다.
박목월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1930년대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청록파靑鹿派 시파詩派의 한 사람이다. 청록파란 1946년 위 세 시인이 공저한 시집 『청록집』에서 딴 이름이며, 그 중에서도 박목월이 게재한 시 <청 노루>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박목월의 시 취향은 독자적으로 수용한 민요조의 리듬에 애틋하고 향토적인 정서를 즐겨 읊었다. 이중 대표적인 작품이 <나그네>라고 할 수 있다.
박목월의 <나그네>를 말하기 전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을 먼저 설명해야겠다. 왜냐하면 조지훈은 <완화삼>에서 시의 부제로 ‘목월에게’라고 붙여 나그네를 노래했기 때문이다. “물길은 칠백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완화삼>일부) <완화삼>이란 시 제목은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를 의미한다. 이에 화답하는 박목월 시가 곧 <나그네>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나그네> 전문)
조지훈의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가 박목월의 시에 와서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로 변화된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나그네>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려내고 있다. 이 낭만적인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잘 익은 술의 빛깔을 연상케 하는 저녁놀, 색채감을 느끼게 하는 시어가 한 편의 그림 같지 않은가.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는 뜨내기의 전형이다. 서양에서 빌려오는 모습으로는 집시라 해도 좋겠고, 방랑자, 정처 없는 사람, 순수한 의미에서는 먼 길 가는 도중에 있는 길손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남도 길 삼 백리를 걸어가면서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는 길손. 마을마다 익어갈 농주 냄새를 맡아내는 시인의 예민한 관찰, 아름다운 자연을 관조하는 달인 같은 모습, 이보다 더 멋질 수 없을 참으로 목가적인 풍경이다. 여기까지는 <나그네>가 주는 밝은 모습이다.
이에 반해 <나그네>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 또한 없지 않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고 방랑하는 '나그네'의 모습, 암담한 현실 속에서 달랠 길 없는 민족의 정한을 생각하면 ‘나그네’의 눈에 비치는 해거름 녘은 서글픔일 것이다. 농촌은 핍박해져서 더 이상 민중의 삶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괘나리 봇짐을 메고 정처 없이 남도 길을 떠난다. 이러한 환경에서 저물어 가는 낙조와 초가지붕들이 그렇게 아름답게만 눈에 비칠 수는 없다. 시인이 노래할 것은 저물어 가는 아름다운 산야가 아니라 장탄조의 슬픔으로 가득 찬 식민시대의 고달픈 생활환경이었다. 박목월은 암담한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고 보았다.
시인은 그 시대의 아픔을 노래로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시대였다. 희멀건 나물죽을 쑤어 먹어야 했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수탈의 시대였으며 궁핍의 시대였다. 쌀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했는데, 어디서 술 담글 쌀이 있을 법이나 할까. 어찌하여 이곳저곳 마을마다 술 익는 냄새가 솟아날 수 있을 만큼 풍요로울까? 시대의 참담한 아픔을 제대로 읽어내지 않고 시인은 제 흥에 겨워 풍류를 즐겼던 것 같다. 쌀로 술을 빚을 정도이니 먹고 살기는 괜찮았나 보다 하며 평화스런 식민 사회로 미화될 오해소지가 없지 않다. 어쩌면 시인의 무구 순진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그네>의 배경이 된 농촌은 시인의 머리에서 너무 미화되었으며 이상향으로만 그려져 있는 듯하다. 이는 도회지 지식인이 책상머리에 앉아 농부들의 힘든 일상을 간과하고 평화로운 전원생활이라고 예찬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경영입문서 첫 머리에 나오는 말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사업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인 또한 사업가 못지않다. 오히려 문인은 보통 사람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보고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기에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변자 노릇을 해야 한다. 글은 오래 남는다. 무릇 시인詩人이 시인時人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이란 작가의 마음에서부터 상상의 세계를 거쳐 탄생하는 산물이기 때문에 글쓴이를 향해 사족을 달아 시시비비란 처음부터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작품성과 문학성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꼬집고 비틀어 볼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