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규칙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룰을 추가하고 기존룰을 폐지하면서 가다듬은 것이다. 이런 발전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경기장에서 직접 뛰는 선수들 뿐 아니라 관중들에게 재미있게 보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점이야말로 흥행을 앞세우는 미국 사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즐기는 야구의 규칙 중에서 몇 가닥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려면 규칙의 변천과정과 그 뒤에 흐르고 있는 기본원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플라이타구가 잡히면 왜 아웃이 되는가? 원바운드로 잡힌 것은 왜 아웃이 되지 않는가? 크리켓에서는 플라이가 잡히면 아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야구의 원조는 누가 뭐래도 크리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초창기야구에서는 원바운드로 타구를 잡아도 아웃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웃을 잡기가 너무 쉬운 게 폐단이었다. 선수 뿐 아니라 관중들이 즐기는 플레이는 주자들이 베이스 사이를 활발히 누비고 다니는 것이었고 바로 그 점이 야구가 크리켓보다 매력있는 요소였다.
그렇다면 스트라이크존은 무엇인가? 왜 그런 것이 생겨났는가? 포스아웃이나 인필드플라이, 보크 규정은 왜 만들어졌는가? 왜 스트라이크가 세개면 아웃이고, 왜 볼이 네개면 타자가 1루에 걸어나가는가? 이런 규정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자, 그러면 초창기로 돌아가서 야구규칙의 발달과정을 살펴보자.
야구규칙이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하기까지의 첫걸음은 베이스에서 떨어져 있는 주자를 아웃시키는 방법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야구는 라운더스 rounders 라는 이름으로 출발, 여러가지 변형을 낳으며 식민지시대부터 미국에서 널리 퍼져 왔는데 베이스 base 또는 타운 town이라고 불리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난 주자의 몸을 공으로 맞히면 아웃시킬 수 있었다.
이런 규칙을 적용시키자면 공이 상당히 물렁물렁해야 한다는 게 전제되어야 했다. 그리고 물렁물렁한 공은 배트로 때렸을 때 타구속도가 빠르지도 않고 멀리 날아가지도 않았다.
이 규칙이 없어지고 아웃시키기 위해 '태그플레이'만 허용됐을 때 비로소 경도(硬度)가 강한 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태그플레이란 수비하는 야수가 공을 쥔 손으로 베이스에서 떨어진 주자의 몸을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공에 변화가 생긴 다음부터는 선수가 타구에 맞을 경우 더 심한 부상을 입을 우려가 있었지만 그런 우발사고가 일어나는 빈도는 많지 않았다. 그 대신 고의적으로 주자의 몸에다 공을 던져 아웃시키는 행위는 금지시킬 수 있었다.
공이 단단해짐에 따라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뒤따랐다. 순발력과 강인한 힘, 주력 등이 선수들의 각별한 능력이 되었으며, 타구의 비거리가 길어지자 경기장 면적도 훨씬 넓혀야 했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는 물론 관중들의 흥미도 배가 되었다. 그리고 투수는 플레이를 시작하기 위해 공을 던져주는 단순한 임무에서 벗어나 승부를 좌우하는데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1루에서의 타자주자에 대한 태그플레이는 미묘한 기술적인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규칙으로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단단한 공을 사용하는데다 타격기술이 향상되자 야수들의 수비위치는 더 깊어지게 됐다. 타구를 잡은 내야수가 1루를 지키는 1루수에게 송구하면, 공을 받은 1루수는 제대로 태그하려면 홈에서부터 달려드는 주자와 마주서야 했다. 그리고 송구와 주자가 거의 동시에 1루에 도달할 때는 태그하려는 1루수와 베이스로 달려드는 타자주자 사이에 육체적 충돌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이런 사고가 잦아지자 1루수가(또는 어느 야수라도 마찬가지다) 주자를 아웃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주자의 몸을 태그할 필요없이 볼을 확실히 쥔 채 단순히 1루(퍼스트 베이스)를 태그하는 것만으로 성립되도록 하자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런 진전을 보게 된 것은 1루수가 공을 들고 1루를 태그할 수 있다면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타자는 시간상으로 어차피 태그당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1루수는 타자의 몸 대신 1루를 태그하는 편이 실제 경기진행상 유리했기 때문에 이것이 1루에서 타자주자를 잡아내는 기본요령으로 발전했다.그리고 이 원리는 더 깊게 전개됐다.
타자는 타구를 날린 후에는 '반드시' 1루로 뛰어야 한다. 그는 1루에서 세이프되거나 태그에 의해 아웃되거나 둘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타자는 공이 도달하기 전에 1루를 밟도록 '강요받는' 셈이다. 따라서 공을 받은 1루수는 타자의 몸에다 태그하지 않고 베이스를 태그하는 것만으로 타자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1루에 주자를 두고 타자가 타구를 날렸다면 1루주자는 '반드시' 2루로 뛰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예외는 뒤에 설명하겠다). 1루주자는 타자주자에게 1루를 내주어야 하므로 두 주자가 모두 살려면 1루주자는 최소한 2루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이 수비측이 타자를 1루에서 아웃시키기 위해서는 야수가 타자의 몸 대신 베이스를 태그하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를 적용, 1루주자를 2루에서 아웃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2루에 도달하기 전에 2루를 태그하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었고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변화했다. 1, 2루에 주자가 있을 때는 3루에서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되고, 만루일 때는 홈에서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도록 했다. 이런 '포스플레이 force play'의 도입은 수비상에서 더블플레이(경우에 따라서는 트리플 플레이)라는 활기넘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쓸데없는 신체접촉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고, 초창기 야구에서 공격측이 지나치게 유리하던 불공평성을 덜어내는 1석3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만약 타자나 주자들이 '반드시' 다음 베이스로 가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없었더라면 볼을 가진 야수가 베이스를 먼저 태그하는 행위만으로 주자를 아웃시키는 규칙은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게 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의 베이스로 되돌아갈 선택권이 있기 때문이다. 1루가 빈 채 2루에 나가 있는 주자는 타자가 타구를 날렸을 때 2루에 머무르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어도 괜찮다. 그는 반드시 3루로 달려야 할 의무가 없으므로 수비측이 그를 아웃시키려면 반드시 볼을 든 야수가 베이스에서 떨어져 있는 그의 몸에 태그해야만 한다.
태그플레이를 적용시키는 데도 원칙이 생겼다. 수비측이 베이스에서 떨어진 주자를 태그아웃시키려고 할 때 볼을 들고 천지사방으로 주자를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주자의 행동반경을 규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베이스와 베이스 사이에 가상으로 그려놓은 직선이다. 이 선은 실질적인 '직선'은 아니지만 베이스를 잇는 대체적인 직선으로 간주된다. 주자가 '태그를 피할 목적으로' 이 선에서 벗어나면 아웃이 선고된다. (그러나 이는 태그플레이가 일어날 경우에 한한다. 그밖에 주자가 한 베이스에서 다음 베이스로 가기 위해서는 어느 코스를 택하든 상관없다. 선수들이 대체로 일직선으로 뛰는 이유는 룰에 그렇게 뛰어야 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가장 빨리 다음 베이스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태그를 피할 의도가 없는 한 좀 더 스피드를 내기 위해서는 직선적인 베이스라인에서 벗어나 원을 그리며 뛰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볼을 들고 있지 않은 야수는 고의건, 우연이건 관계없이 주자가 뛰는 주루선상에 끼어들어 주자를 방해할 이유나 권한이 전혀 없다. 이때 접촉이나 방해가 일어나면 주자가 다음 베이스까지 갈 수 있는 안전진루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야수가 타구나 송구를 처리하는 중이라면 거꾸로 주자가 피해가야 한다.
주자와 야수에게 이렇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은 공수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과 연관이 있는데 플라이 타구가 나왔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 살펴 보자.
땅볼 타구는 강한 것이든, 약한 것이든 내야수에게 닿기까지는 시간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팝플라이나 멀리 날아간 플라이의 경우는 다르다. 땅볼타구가 나왔다면 주자는 아무리 베이스에서 많이 리드하고 있었더라도 타구가 구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다음 베이스를 향해 달리게 되므로 그 주자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별로 많지 않다. 땅볼타구가 강하게 내야수 사이를 빠져나가더라도 외야수가 재빨리 수습한다면 전위주자는 대체로 한 베이스 이상 진루하기가 어렵다. 또 타자주자가 1루에서 살 수 있을 만큼 땅볼타구가 느리더라도 다른 주자들은 한 베이스 이상 진루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포스플레이가 적용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주자들이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플라이가 나올 경우에는 타자와 주자의 진퇴는 타구가 잡히느냐, 아니면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잡히면 타자는 아웃이지만 다른 주자들은 반드시 다음 베이스로 가야 하는 포스상태에 놓이지 않는다.
플라이 타구가 처리되는 동안 주자의 행동에 아무런 제약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주자는 타구가 떠오르는 순간부터 냅다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타구가 외야로 뻗어나갔다가(또는 내야 위로 높이 솟구쳤다가) 야수의 글러브에 들어갈 때까지의 시간이라면 1루주자는 벌써 3루까지 달려갔을 것이다. 자, 수비측은 타자를 아웃시키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공격측은 단순히 공에 떠올랐다가 중력의 작용으로 떨어지는 틈을 타 2개루를 번 셈이 아닌가. 이는 불공평한 일이다. 수비측은 타자를 아웃시키기 위해 애써서 높은 플라이를 유도한 것이기 때문에 공격측은 그 틈에 이득을 봐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대로 플라이가 잡히지 않았다면 공격측은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타구가 멀리 날아갈수록 좋다).
그러므로 주자는 타구가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다음 베이스를 향해 뛰어도 무방하다. 다만 그와중에 불이익이 따를 수 있다. 플라이가 잡혔을 때는 타구가 야수의 글러브에 닿은 다음부터 진루가 허용되므로 미리 출발했던 주자는 원래 베이스로 되돌아왔다가 다시 스타트해야 한다.
야구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경기가 된 것은 이런 멋진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는 플라이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마음대로 달려도 된다. 반면 잡힐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면 일단 베이스에 붙어 있다가 공이 야수의 글러브에 닿은 직후에 출발할 수 있다(물론 송구된 공보다 먼저 다음 베이스에 도달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때에 한한다). 잡힐지, 안타가 될지 명확치 않을 때는 양 베이스 사이에서 지켜본 뒤 진퇴를 결정한다.
그러나 타구가 잡혔는데도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바람에 미리 다음 베이스로 뛰었다가 원래 점유하고 있던 베이스로 공보다 먼저 돌아오지 못하면 아웃당한다. 이는 플라이가 잡히면 주자는 원래 베이스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강제규정'에 지배받기 때문에 다른 포스플레이와 마찬가지로 신체가 아닌 베이스 태그만으로 아웃되는 것이다.
루상에 주자를 둔 채 스리아웃이 돼 공수가 바뀌면 주자들도 모두 아웃되고 three out, all out 다음번 공격 때는 주자가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새로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정해졌을까? 다음 이닝에 공격을 펼칠 때 앞선 이닝에서 잔루를 기록한 주자들을 원위치에 세워놓고 공격을 재개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이치적으로는 그렇게 해도 안될 게 없다. 그런 식으로 했더라도 야구는 여전히 훌륭한 경기가 됐을 것이며 다만 득점은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이닝마다 공격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야구는 원래 득점이 너무 나는 게 흠이었다. 공격측의 이점이 워낙 많은 경기가 되다 보니 단단한 공을 사용하면서부터 공수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베이스러닝에 제약을 둔 것이며, 스리아웃이면 주자들도 모두 아웃된다는 규칙도 수비측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는 공격측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피칭의 기술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야구의 원형(原型)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켓은 원래부터 타자에게 유리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야구에서 투수의 역할은 단순히 게임을 인플레이시키고 야수들이 아웃을 잡아내도록 맡기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투수의 역할이 겨우 이 정도에 머물렀던 것은 스트라이크, 볼에 대한 개념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애초의 '스트라이크'는 타자가 헛스윙한 것만 가리켰고 세번 헛스윙한 타자는 아웃이었다. 그러나 타자는 때리기 싫은 공은 치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며 그당시 반드시 스윙하도록 강요할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타자는 투수에게 높은 공, 또는 낮은 공을 던지라고 요구할 수 있었고 투수는 거기에 따라야 했다.
오늘날의 야구규칙에 비춰보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타자는 타석에 뻣뻣이 서서 투수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스윙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투수가 아주 좋은 볼을 던질 때까지 스윙하지 않고 마냥 기다릴 수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하품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냥 뻣뻣이 선 채로 버틸 수도 있었던 게 당시의 규칙이었다. 끈기가 매우 강하거나 아웃되는 것을 겁내는 타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투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안타를 맞는 게 두려운 투수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타자가 건드리지도 못하도록 연신 나쁜 공만 던지면 그만이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는 우스울 정도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 해결책은 투수에게 벌칙을 주는 쪽에서 찾아냈다. 타자가 칠 수 없는 곳으로 자꾸 공을 던지면 타자가 1루로 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공이 들어오더라도 타자가 휘두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규제가 없었다. 다음의 연도별 규칙변화를 살펴보기 바란다.
▲1845년=알렉산더 카트라이트 Alexander Cartwright가 최초로 야구규칙을 정리하다. ▲1871년=프로야구가 탄생하다. ▲1880년=타자가 1루로 걸어나가는 볼수가 종전의 9구에서 8구로 축소되다. ▲1882년=타자의 1루 출루가 7구로 축소되다. ▲1884년=다시 6구로 줄어들다. ▲1886년=다시 7구로 늘어나다. ▲1887년=타자가 투수에게 높은 볼, 또는 낮은 볼을 요구할 수 없게 되다. 타자가 스윙하지 않은 공에 대해서도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할 수 있는 것 called strike 과 스트라이크존의 개념이 도입되다. 이때부터 1루 출루는 5구로 축소되다.
스리 스트라이크면 타자아웃이기는 종전과 마찬가지지만 투스트라이크 이후 제3스트라이크가 콜드 스트라이크라면 타자아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타자는 제4스트라이크(이때는 스윙을 하건 콜드 스트라이크이건 관계없이 아웃이다)까지 공격을 계속할 여유가 있었다.
▲1888년=타자가 스리 스트라이크면 아웃되도록 바뀌다. 그리고 타자가 투구에 맞으면 출루하는 死구가 처음 도입되다. ▲1889년=타자출루가 4구로 축소되다.
카트라이트가 최초의 룰을 정리한 이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스트라이크아웃과 타자출루의 볼수가 확정되기까지는 무려 43년이 걸렸다. 프로야구가 창설된 이후부터 따지더라도 1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871년에 프로야구가 창설될 당시 12세짜리 야구팬이 있었다면 30세의 청년이 되고나서야 오늘날과 같은 야구규칙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식의 야구규칙이 정립되기는 요원하기만 했다.
카트라이트가 정리한 규칙 가운데 지금까지 불변으로 남아있는 것은 홈플레이트를 기점으로 1루와 3루의 각도를 90도로 하고 내야를 정사각형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양쪽 파울라인 사이의 각도가 둔각 또는 예각이 되어 1∼3루, 홈∼2루를 잇는 대각선 길이가 서로 다른 마름모꼴이 되기 일쑤였다. 타구가 이 베이스라인과 그 연장선(파울라인) 밖에 떨어지면 노플레이였지만 야수가 노바운드 또는 원바운드로 잡으면 아웃이었다. 다시 말해서 파울볼은 공격측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수비측이 커버해야 할 수비범위를 합리적으로 한정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반면 야수들이 폭넓은 수비를 펼쳐 파울볼을 노바운드 또는 원바운드로 잡으면 타자아웃이라고 한 것은 야구규칙이 워낙 공격측에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는 탓에 수비측에 다소나마 이득을 주어 공수의 균형이 갖춰지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야수에게 잡히지 않은 파울볼은 스트라이크로 셈하는 게 아니라 '노카운트'였다. 그리고 한 타석에서 때릴 수 있는 파울볼수에는 전혀 제한이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콜드 스트라이크의 개념이 도입되고 타자가 출루하는 볼수가 4구로 줄어들자 타자는 자기가 치기 싫은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면 파울볼로 걷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타자는 더이상 투수에게 높은 공, 또는 낮은 공을 요구할 수 없게 됐다. 자, 그렇다면 높은 공(스트라이크존 안에서)만 좋아하는 타자는 낮은 공(역시 스트라이크존 안에서)을 계속 파울로 걷어내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높은 공을 얻게 될 것이다.
일부러 파울볼을 만드는 데에는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곧 번트다. 타자는 번트로 파울볼을 만들어내면서 원하는 공이 들어올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까지는 무려 6년이 걸렸다. 1894년 이후에는 번트가 파울이 되면 무조건 스트라이크로 카운트하게 됐다. 오늘날 투스트라이크 이후의 번트가 파울이 되면 자동적으로 삼진처리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이어져 내려온 규칙이다.
그러나 파울볼을 스트라이크로 카운트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오직' 번트를 댔을 때에 한했다. 크게 휘둘러 맞힌 것이 파울이 되면서 야수에게 잡히지 않았을 때는 여전히 노카운트였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또하나의 '파울=스트라이크' 규칙이 추가됐다. 즉 파울팁이다. 이것은 공이 배트에 맞았으나 궤도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뒤로 들어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플라이로 간주하지 않았으므로 땅에 닿기 전에 포수에게 잡히더라도 타자아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포수가 파울팁을 잡으면 스트라이크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후 1901년, 그러니까 내셔널리그가 출범한 지 26년째가 돼서야 오늘날과 같은 파울=스트라이크 제도가 생겼다. 그때부터 야수에게 잡히지 않은 파울볼을 투스트라이크까지는 스트라이크로 카운트하게 됐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파울볼이 나오더라도 타자가 아웃되지 않지만 그것은 풀스윙했을 때에 한하며 번트에 의한 파울이면 타자아웃이었다.
1901년에 메이저리그로서 활동을 시작한 아메리칸리그는 1903년이 돼서야 이 규칙을 도입했다. 그러니까 카트라이트가 야구규칙의 초안을 잡은 지 58년이 흘러서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정비된 것이다.
타자와 투수가 공정하게 대결할 기회를 얻기까지 오랜 진화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살펴봐야 할 것이 크게 두가지가 더 있다. 즉, 투수의 피칭스타일과 투-포수간 거리다.
당초 투수는 45피트(13. 64m) 떨어진 곳에서, 손이 히프보다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언더핸드로만 투구해야 했다. 당시의 투수는 타자가 공을 '치도록' 플레이를 개시하는 역할만 맡을 뿐 타자가 못치도록 압도하라는 게 아니었다. 그때는 켄트 티컬브 Kent Tekulve나 댄 퀴즌베리 Dan Quisenberry같은 언더핸드스로의 귀재들이 갖춘 놀라운 기술이 도입되기 전이었으므로 타자들은 투수들의 공을 언제든지 마음놓고 쳐댈 수 있었다.
그런데도 투―포수간의 45피트가 상당히 가깝게 느껴지자 1881년(8구출루가 허용되고 세번 스윙하면 삼진아웃되도록 규칙을 고친 해)에는 그 거리를 50피트(15. 15m)로 벌려놓았다. 그러자 투수들은 점차 엉덩이 위쪽으로 팔을 치켜들기 시작, 토스하는 게 아니라 던지는 폼을 갖춰갔다. 1884년에 이르러 손높이의 제한이 '어깨'까지로 완화되자 실질적인 오버핸드스로가 가능해졌다.
이런 것을 보면 19세기 투수들이 어떻게 자기 팀이 치르는 연간 전게임을 혼자서 거의 완투해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팔은 어깨에서 아래로 늘어져 건들거리는 게 자연스러운 동작이므로 언더핸드로 토스하는 것은 신체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50피트의 거리에서 던질 때만 해도 스트라이크존을 찌르면서 타자가 쉽사리 대응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는 공이 그다지 빠른 필요도 없었다.
시속 90마일(144. 8㎞)로 던진 볼이 60피트(18. 18m)를 날아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0. 5초다. 같은 시간 안에 50피트를 날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스피드가 68마일(109. 4㎞)이면 된다. 이것만도 그 당시로는 상당히 빠른 볼이라고 할 수 있었다(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그런데 오버핸드스로로 던지면 공에 더많은 힘과 스피드를 실을 수 있고 변화구를 구사하는 데도 유리하지만 투구모션 자체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지만 50피트 거리에서는 오버핸드스로로 던지더라도 팔에 치명적인 무리는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오버핸드스로로 빠르게 던질수록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게 밝혀지자 투수들과 감독들은 점점 더 빠른 공을 원하게 됐고 야구는 그런 물결을 타고 흘러갔다.
그러나 50피트라는 근거리에서 투수가 오버핸드스로로 던지는 것은 타자가 너무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게 드러났다. 그러자 1893년에는 투수판을 오늘날과 같은 60피트 6인치(18. 44m)로 물려놓았다. 이런 변화가 갖는 의미는 통계에서 잘 나타난다.
오버핸드스로가 허용되기 직전인 1883년에 내셔널리그의 게임당 삼진수는 7개로 기록됐다. 1884년에 새로운 스타일이 허용되자 무려 43%가 늘어난 게임당 10개의 삼진이 나왔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호스 래드본 Hoss Radbourn이 바로 그 해에 75게임에 선발로 등판, 60승을 올리고 669이닝에서 441개의 삼진을 빼앗을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래드본과 그 시대의 투수들은 오버핸드스로가 얼마나 투수수명을 단축하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1892년, 즉 50피트 거리가 유지된 마지막해에는 리그의 전체타율이 0. 245에 불과했다. 그러나 투수판을 10피트 이상 뒤로 물려놓은 1893년에는 0. 280으로 상승했고 그뒤 4년간 0. 290대가 유지됐다.
어쨌든 투수들과 타자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되자 60피트6인치라는 게 얼마나 신묘(神妙)한 거리인지가 두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타자들이 빨라진 투수들의 공에 적응하기가 가장 알맞은 거리가 바로 60피트6인치였다. 그뿐 아니라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그 거리는 물리적 법칙과도 꼭 맞아떨어졌다. 투수가 던진 공에 작용하는 기체역학―회전, 속도, 탄도(彈道) 등―은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홈플레이트에 도달한 공에 실린 힘과 컨트롤이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되게 만드는 거리가 바로 60피트6인치였다. 공에 주어진 회전과 중력이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만큼 충분히 먼 거리이면서, 평지보다 약간 높은 마운드에서 인간이 던진 공이 정확히 표적을 찾아 충분히 날아갈 수 있는 거리.
이로써 투포수간의 거리는 60피트6인치로 굳어졌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가? 엄밀히 말해서 투수판의 앞부분에서부터 양쪽 파울라인이 맞닿는 홈플레이트 뒤의 꼭지점이다.
투수가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하기까지 날아가는 실제거리는 이보다 훨씬 짧다. 투수는 한쪽 발을 투수판에 걸쳐 피칭을 시작하지만 한걸음 앞으로 다가서면서 볼을 놓는다. 따라서 그것만 해도 볼이 그의 손을 떠나는 순간에는 1∼2피트 이상 홈쪽으로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스트라이크의 정의를 보면 공의 '일 부분'이 스트라이크존의 '일 부분'에 걸치게 하면 된다. 그러니까 폭 17인치, 길이 17인치인 홈플레이트의 맨앞부분까지 실제거리는 57피트(17. 27m)∼53피트(16. 06m)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투포수간 거리가 50피트이던 시절에는 투수판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투수박스'라는 게 있었고 투수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투수박스의 맨 앞부분은 홈플레이트 뒤끝에서 50피트 떨어진 곳에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말로는 투포수간 거리가 60피트6인치로 대폭 벌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50피트에서 55피트 내외로 벌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홈플레이트의 모양이다. 다른 베이스들은 정4각형인데 왜 홈플레이트만은 5각형인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언제부터 그런 모양이 됐는가?
원래의 홈플레이트는 한변이 12인치(30. 48㎝)인 정사각형으로 양쪽 파울라인에 두 모서리를 대고 들어앉아 있었다. 한변이 12인치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은 17인치(43. 18㎝)이므로 스트라이크존의 좌우 폭은 17인치로 정해졌고 투-포수 쪽의 깊이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로 직선으로 날아들며 홈플레이트의 양쪽 귀퉁이에 걸치는 직구는 스트라이크다.
그런데 홈플레이트의 양 옆으로 휘어지면서 떨어지는 커브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규정상으로는 타자의 무릎과 어깨 사이의 높이로, 가로 17인치의 홈플레이트를 통과시키면 스트라이크라고 돼 있지만 플레이트의 양 옆은 홍어의 날개처럼 좁하져 오직 점 하나로 이뤄지기 때문에 심판도, 투수도 정확한 통과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은 두개의 2등변삼각형으로 투수쪽을 향해 플레이트 앞을 '메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투수는 가로 17인치인 스트라이크존을 완전히 활용할 수 있게 됐으며 5각형의 옆 부분을 통과하는 커브도 당당히 스트라이크로 판정받게 됐다. 이렇게 홈플레이트의 모양이 바뀐 것이 1900년이었다.
자, 홈플레이트 앞쪽의 폭은 17인치다. 새로 생긴 양변(투수를 향하고 있는 변)은 8. 5인치(21. 59㎝)의 '깊이'를 갖게 됐다. 종전의 '양변'은 파울라인과 직각으로 맞닿아 있으면서 그 길이는 12인치였는데 이제는 8. 5인치인 2등변삼각형의 밑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로 세로 17인치인 정사각형을 홈플레이트로 박아놓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럴 경우 그 사각형의 밑부분은 파울라인 밖으로 새나가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베이스를 완전히 페어지역 안에 두어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난다.
이런 규격의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야구에는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투수들은 홈플레이트의 양사이드를 찌르는 기술을 더욱 개발하게 됐고 스트라이크존에 대비해야 하는 타자들은 과거 정4각형의 플레이트가 박혀 있을 때보다 훨씬 힘들어졌다. 여기서도 수비와 공격의 균형이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시소를 벌이는 점이 발견된다.
주자들이 수비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을 막아주는 방안도 강구됐다. 만약 타자가 플라이로 아웃되면 주자는 타구가 잡힌 후부터 다음 베이스를 향해 뛰거나, 미리 베이스에서 출발했었다면 귀루해야 한다. 반면 타자가 땅볼타구를 때렸다면 1루주자는 1루를 타자에게 비워주고 반드시 2루로 뛰어야 한다.
그런데 플라이 타구가 땅볼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야수가 플라이를 놓친다면 그 뒤에는 어떤 요령으로 플레이해야 하는가? 당연히 땅볼에 관한 규칙을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나 가끔 1루주자를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이 있다. 내야플라이가 떠올랐을 때 만약 1루주자가 2루쪽으로 너무 다가가면 타구가 플라이로 잡혔을 때 1루에서 아웃(병살)당할 위험이 크다. 거꾸로 1루 부근에서 머뭇거리다가는 타구가 땅에 떨어졌을 때 2루에서 포스아웃당하게 된다.
타구가 외야 깊숙히 날아갔을 때라면 이런 걱정은 줄어든다. 외야수는 어느 베이스로 송구하든 상당히 긴 거리를 던져야 하므로 주자는 중간쯤 가 있다가 상황에 따라 2루로 진루하거나 1루로 귀루할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야 위로 타구가 높이 떠올랐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야수는 고의로 공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잡아(또는 원바운드로 잡아) 1루에 머무르고 있는 1루주자를 손쉽게 2루에서 포스아웃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1루주자가 베이스를 너무 빨리 떠났다간 더블플레이를 당하게 되고(플라이로 잡아 타자를 아웃시키고 1루에 던져 주자까지 아웃시킨다), 1루에 머무르고 있으면 원아웃만 당하게 된다(타자가 플라이로 아웃되던가, 아니면 바운드가 되더라도 타자가 전력으로 뛰면 1루에서 세이프될 여유가 있다는 전제 아래 1루주자만 2루에서 포스아웃된다). 그러므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해진다. 그는 1루에 머물고 있다가 떨어 뜨리면 2루로 뛰고 그렇지 않고 플라이로 잡으면 그냥 그대로 있는다. 어쨌거나 아웃될 수밖에 없지만 당연히 내줘야 할 원아웃(플라이 타구가 나왔으니까)을 상대에게 바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주자가 1, 2루에 두명이나 나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두 주자 모두 딜레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상대수비가 영리하다면 주자들이 뛰지 않을 경우에는 원바운드로 처리해서 1, 2루 주자를 2, 3루에서 더블플레이할 것이고, 주자들이 뛰었다면 직접 노바운드로 타구를 잡아 1, 2루에서 어필아웃을 만들 것이다. 어쨌거나 공격측으로서는 병살을 면키 어렵다.
이것은 '부당한' 더블플레이다. 특히 원아웃 상태에서 이런 플라이가 나오면 그 이닝의 득점찬스가 물거품이 되므로 공격측은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이런 부당함이 1895년에 도마에 올라 '인필드플라이' 규칙을 만들어냈다. 원아웃에 주자 1, 2루 또는 만루 상황에서 타자가 내야 높이 플라이타구를 쳐올렸을 경우(페어지역에 한한다) 야수가 공을 잡든 놓치든 관계없이 타자는 자동으로 아웃되며 이에 따라 주자들은 반드시 다음 베이스로 가야 하는 의무가 없어진다(물론 주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뛸 수는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01년에는 노아웃 상황에서도 인필드플라이 규칙을 적용시켰다. 투아웃일 때에는 물론 인필드플라이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수비측에서 보면 플라이아웃이거나 포스아웃이거나 어차피 원아웃만 보태면 그 이닝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구선수 중에는 워낙 영악한 사람들이 많으므로 이 규칙이 완성되기까지는 좀더 보완해야 할 점이 남아 있었다. 인필드플라이 규정은 말그대로 '내야'에 뜬 플라이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 규칙이 생기고나서 세월이 한참 흐른 1930년대에 뉴욕 양키스의 '외야수' 토미 헨리치 Tommy Henrich는 내야로 플라이가 높이 떠오르자(인필드플라이 규칙이 적용되는 장면이다) 다른 내야수들을 물러서게 한 후 제가 잽싸게 달려들어 원바운드로 타구를 처리하면서 (또는 일부러 놓쳐 인필드플라이 규칙의 본래 취지인 주자보호원칙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 더블플레이로 처리하곤 했다.
그렇다면 인필드플라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적용시킬 것인가를 놓고 야구이론가들은 설왕설래했다. '외야수'가 내야 바로 뒤의 잔디라인에서 처리하는 플라이는 인필드플라이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래서 이 규칙의 적용은 심판의 재량에 맡기기로 했다. 만약 내야수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타구라고 판단하면 심판은 "인필드플라이"를 선언해야 하고 그럴 경우 누가 타구를 잡든 놓치든 관계없이 타자는 자동아웃이 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취지에서 2사 이전에 주자 1, 2루 또는 만루일 때 내야수가 직선타구를 고의로 떨어뜨리더라도 그 즉시 볼데드가 선언되고 타자아웃이 선언된다.
그렇지만 인필드플라이 규정은 '번트'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주자가 있을 때 시행하는 번트는 주자를 진루시키겠다는 의도를 명백하게 갖고 있으며, 주자는 작전에 따라 타자가 번트하는 순간 또는 그 이전에 스타트하게 된다. 이것은 공격측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작전을 펼친 것이므로 야수가 번트를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잡았다면 먼저 베이스에서 이탈한 주자들을 더블플레이로 처리할 '합당한'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야수가 번트 플라이를 직접 잡지 않고 땅에 바운드시켜 처리한다면 베이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있던 두 주자 가운데 한명을 포스아웃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때 두 주자가 모두 아웃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공격측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탓이므로 인필드플라이 규칙으로 보호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1루주자는 투수의 견제동작에 속기 쉬우므로 별도의 규칙을 정해 보호하게 됐다. 주자는 투수가 견제할 수 있는 권리에 맞서 베이스에서 리드하거나 도루할 '공정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 후속안타가 나왔을 때 일찌감치 스타트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 투수가 타자에게 투구하면 그 틈을 이용해 도루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투수가 홈에 투구하는 시늉만 하고 손에 그대로 공을 쥐고 있다면 그 틈에 도루하려던 주자는 꼼짝없이 걸려들게 될 것이다.
초창기야구의 주자들은 오늘날 야구를 갓 시작한 어린이들과 비슷한 주루플레이를 펼쳤었다. 즉 베이스에 꼭 붙은 채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플레이가 정적(靜的)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야구의 가장 근본적인 매력은 주자들의 역동감 넘치는 공격적 주루플레이에 있다. 바로 그런 게 크리켓과 다른 점이다.
따라서 주자에게 달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투수의 행동에 제약을 가했다. 이런 제약을 위반하는 것을 '보크 balk'라고 하며 벌칙으로 루상의 모든 주자들에게 한 베이스씩 진루를 허용한다.
야구규칙 8. 05에는 13가지의 보크 규정이 나열돼 있다. 이 규칙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심판과 선수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긴장이 감돈다. 규칙서에는 어떤 행위가 보크라고 명시돼 있긴 하지만 몇몇은 심판의 재량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규칙서의 [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일자하) "심판은 보크규정의 목적이 투수가 고의로 주자를 속이려는 것을 막으려는 데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투수의 의도가 무엇이었나를 판단해야 한다." (일자하 끝)
야구인들은 "아무개는 보크에 저촉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거나 "아무개는 늘 보크를 범하는데도 심판이 잡아내지 않는다"는 두패로 나뉜다. 누구 말이 옳은지는 모르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투수가 한 행동은 전혀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고 '상대'투수가 한 짓은 언제나 보크라고 우긴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가장 중요한 기본은 투수가 홈으로 투구하려는 시점을 주자가 명확히 알 수 있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그전까지는 투수의 견제구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책임은 순전히 주자에게 있었다. 그러나 투수가 투구동작에 들어갔다고 올바르게 판단한 다음에는 주자가 마음놓고 리드하는 게 보장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1988시즌에 보크가 엄청나게 불어났던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리그사무국은 심판들에게 "규칙서에 나온대로" 보크를 적용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스트레치 모션에서 완전정지하지 않고 투구하는 투수에게 가차없이 보크가 선언됐다. '투구모션의 정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타자가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 뒤따르는데, 그렇다면 타자가 식별할 수 없는 정지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심판들은 경기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고 오직 투수의 행동만 놓고 보크규칙을 적용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5점차로 승부가 일방적으로 기운 가운데 2루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심판이 보크를 지적했다고 하자. 이것은 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보크규정을 만든 '취지'에서 벗어난 일이다. 주자가 뛸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투수가 주자를 '기만할' 의도가 전혀 없는 마당이라면 굳이 보크를 지적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숱한 비난이 쏟아지고 게임을 망칠대로 망친 시즌 막판에 가서야 심판들은 이런 관행을 없애고(줄이고) 원래 이 규칙의 취지에 따라 판정하게 됐다.
그러나 망각은 빠르고 신참자는 역사를 모르는 게 탈이었다. 1963년에도 이런 넌센스가 있었고 1950년시즌에도 마찬가지였다. 야구계는 참으로 바보같은 짓을 심심치 않게 반복한다.
1950년에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야구당국이 갑자기 보크규칙 적용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앞서 20년 동안은 보크수가 한시즌에 팀당 2∼3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1950년에는 5월말에 이르자 벌써 그보다 훨씬 많은 보크가 적발됐고 투수들은 짜증을 냈다. 시즌 중반에 다다라 양 리그회장들이 더이상 그렇게 엉터리로 판정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나서야 보크적용은 원상복귀됐다. 시즌이 끝나자 내셔널리그의 보크수는 팀당 9. 5개, 아메리칸리그는 5. 8개로 집계됐는데 이는 시즌초반 2개월동안 워낙 많이 잡아낸 탓이었다.
1963년에는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다저스가 내셔널리그의 워렌 가일스 Warren Giles 회장에게 보크규칙을 엄격히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당시 다저스에 몸담고 있던 모리 윌스 Maury Wills가 전년도에 104도루를 기록했기 때문에 기동력이 그 팀의 주무기가 된 탓이었는지, 아니면 오말리 구단주가 그만큼 영향력이 컸던 탓이었는지 정확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5월7일이 되자 내셔널리그의 보크수는 96개에 달했다. 이는 벌써 1950시즌의 총 보크수 76개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 무렵 조 크로닌 Joe Cronin회장이 관장하는 아메리칸리그에서는 겨우 8개의 보크만 잡혀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자 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양 리그회장을 불러 보크적용의 통일성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월드시리즈가 불과 다섯달 앞으로 다가왔으므로 양 리그가 똑같이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대 국민발표내용이었다.
그런데 1988년의 사태는 결코 단순치 않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1980년대 들어 뛰는 야구가 관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자 주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1920년에 베이브 루스가 홈런 열풍을 몰고옴에 따라 반발력좋은 공이 도입됐던 것처럼 루 브록 Lou Brock과 리키 헨더슨 Rickey Henderson(1982년에 130도루로 시즌최다신기록을 수립했다)이 눈부신 베이스러닝으로 게임의 양상을 바꿔놓자 관중들의 도루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북돋우려고 했다는 인상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대나 1960년대에는 이상없이 통용되던 투수들의 작은 몸짓까지도 규제의 대상이 됐고 규칙집에 나와있는 대로 철저히 적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88년에는 지아마티 커미셔너처럼 야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야구행정을 맡았기 때문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너무 문구에만 집착하다 보니 그들은 '식별할 수 있는 정지동작'이라는 말에 고지식하게 얽매여 보크규칙을 만든 '취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런 작태는 시즌중반에 가서 시정되긴 했지만 보크에 대한 규제는 오늘날까지도 종전보다 엄격하게 지켜지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미묘한 규칙을 만든 목적은 단 하나다. 즉 주자에게 바꿔 말하면 공격측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그런 불공평이 시정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자, 이런 상황을 설정해 보자. 만루상황에서 투수가 일단정지하지 않는 완연한 보크를 범한 뒤 심판의 보크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투구했고 타자는 이를 두들겨 담장 밖으로 넘겨버렸다.
그렇다면 보크 선언이 있었으므로 홈런은 무효로 처리하고 주자들만 한 베이스씩 진루시킨 후 타자는 다시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가? 1950년대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처리했었다. 그렇다면 공격측을 위한 공평성은 어디로 갔는가? 수비측이 불법을 저질렀는데 공격측이 3점을 잃어버리는 게 정당한 일인가? 그래서 요즘은 공격측에게 양자택일의 선택권을 준다. 보크가 개입되더라도 그 플레이가 종료된 후 (폭투나 안타, 악송구 등이 일어날 수 있다) 실전결과가 보크에 의한 진루보다 유리하다고 공격측이 판단할 경우 보크를 무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가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다른 운동경기와 달리 순번에 따라 돌아가면서 공격을 펼치는 타순에 관한 문제다. 탁구 복식경기를 제외한 다른 경기는 공격기회를 누구나에게 공평히 나눠주는 경우가 없다. 우수한 공격수에게 더많은 기회를 주어 더많은 득점을 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야구만은 순번제로 공격을 펼치도록 정해져 있다. 어떤 타자라도 타순이 한바퀴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타석에 설 수 없다. 이것은 크리켓에서 따온 방식이다.
타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 타자와의 관계'다. 타순착오의 미로에서 헤어나려면 반드시 이 '앞타자와의 관계'를 머리 속에 넣어두고 있어야 한다.
타순착오를 일으킨 팀에게는 벌칙이 주어지는데 그것만 해도 따지기가 간단치가 않다. 필자는 메이저리그 게임에서 타순착오가 발생했을 때 감독과 심판이 올바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앞서 말한 '앞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 혼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푸는 열쇠는 무엇일까? 다음에 나설 정위타자는 방금 공격을 마친 정규타자의 다음번에 이름이 올라 있는 타자다. 이 원칙에는 절대로 예외가 없다.
게임에 앞서 양팀 감독은 9명의 이름을 적은 타순표를 작성, 상대팀 감독과 심판에게 제출한다. 덧붙여 말하면 그것은 단지 '타순'일 뿐이다. 수비위치는 적지 않아도 괜찮으며 누구는 어느 포지션을 맡아야 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야수들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포지션을 바꿀 수 있다.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가 던질 수도 있고 한 이닝은 좌익수를 맡다가 그 다음 이닝은 유격수로 올라오는 등 제멋대로 수비위치를 바꿔도 상관없다. 다만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은 타순이다. 수비위치가 어떻게 바뀌었건 관계없이 일단 타순이 정해지면 반드시 그것을 지켜야 한다.
타순이 제대로 지켜지는지에 대해서는 '양팀'이 모두 신경쓰지 않으면 안된다. 심판이 타순착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금지'돼 있다. 심판은 수비팀이 그 착오를 발견하고 항의하거나 공격팀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바로잡으려 할 때만 비로소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타자들은 오직 한가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즉 "내 앞의 타자가 누군가"하는 것이다. 여기 어느 팀의 타순이 A, B, C, D, E, F, G, H, I 순으로 짜여졌다고 가정하자. D는 C가 타석에 들어가면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헷갈릴 것도 없고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보자. B가 아웃되거나 출루한 뒤 (C 대신) D가 타석에 들어갔다. 심판은 그 착오를 알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 상대팀이 아무런 얘기가 없는 가운데 D가 타격을 완료했다. 수비팀은 투수가 다음 타자에게 초구를 던지거나 루상의 주자에게 견제구를 던지기 전까지 심판에게 어필할 권리가 있다. 그게 정당한 어필시기다.
자, 상대가 제 때에 어필했다고 하자. 그러면 D의 타격내용에 관계없이 정위타자인 C가 아웃된다. 그러면 그 다음엔 누가 타석에 들어와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마지막 정위타자는 어필에 의해 자동아웃된 C이므로 다음 타자는 D가 된다. 다시 타격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상대팀이 어필하지 않았다면 투수가 그 다음 타자에게 초구를 던지는 순간 D의 타격행위는 정위타자에 의한 타격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면 그 다음의 정위타자는 D 다음에나와야 하는 E가 된다.
만약 D가 볼카운트 1―1로 싸우고 있는 도중에 그가 부정위타자라는 사실을 공격팀이 알게 됐다면 어떻게 하나? 그때는 D를 불러들이고 C를 타석에 넣으면 그만이다. 다른 벌칙은 없다. C는 그때까지의 볼카운트를 그대로 안고 싸우게 되며 그 다음에는 D가 타석에 들어오면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각 타순마다 1번, 2번, 3번…9번으로 번호를 매겨놓고 있지만 그런 번호에는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3번타자 다음에는 4번타자가 나오는 게 아니라 C 다음에는 D가 나와야 한다고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 A가 선두타자로 나왔다. 그 다음에 착오로 B 아닌 G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나서 3번타자인 C가 등장했다. 상대팀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C에게 초구를 던졌다면 그 순간 G의 공격행위는 정당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타석에 있는 C야말로 부정위타자다. G 다음에는 반드시 H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C의 공격이 끝나고 상대방이 어필한다면 아웃되는 타자는 C가 아니라 '정위타자'인 H다. 그리고 그 다음의 정위타자는 I다. 그러니까 C, D, E, F를 한꺼번에 건너뛴 셈이다. 마지막 정위타자는 어필로 자동아웃당한 H이므로 I가 그 뒤를 잇는 것이다.
이 부정위타자에 관한 규칙은 매우 복잡해 보이고 생각하면 할수록 헷갈린다. 그러나 "마지막 정위타자가 누구였는가?"만 생각하면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다. 정위타자로 인정받은 선수의 다음 타자가 타순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타순착오를 발견한 수비팀이 왜 곧바로 어필할 필요가 없는가도 자연히 해답이 나온다. A가 안타를 치고 나갔다. 그뒤 C(잘못된 타자)가 병살타를 때렸다. 그걸로 만족이다. 그 다음에 누가 나오든 초구를 던져 투아웃을 얻고 들어가면 그 뿐이다. 그 타자가 D라면 그는 제대로 된 정위타자다(C가 정위타자로 인정받았으므로). D외에는 누가 나오건 그는 또다시 부정위타자이며 그의 타격결과를 그냥 받아들이든지 어필하든지 하는 것은 수비측이 유리한대로 선택할 수 있다.
만약 앞서 말한 부정위타자 C가 2점홈런을 때렸다고 하자. 그 때 수비팀이 즉시 어필하면 2점홈런은 무효가 되고 C는 자동아웃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그 아웃은 B에게 돌아가며 정위타자인 C가 다시 타석에 들어와야 한다.
미묘한 문제같지만 심판에게 제출된 타순표가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가령 심판에게 A, B, C…순으로 타순을 제출해놓고 실제로는 A, C, B 순으로 두차례에 걸쳐 타격을 진행했고 상대팀이 아무런 어필도 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러다가 공격측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7회부터는 A 뒤에 B가 나와 타격을 하게 됐다면 그때는 상대방이 아무리 어필해봤자 소용이 없으며 그 팀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셈이 된다.
그리고 그 벌칙도 단지 한 타자에게 적용된다. 타순을 번호 대신 타자이름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정위타자의 타격이 종료됐을 때 상대팀이 제때에 어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가 정위타자로 인정되고, 적시에 어필했다면 정위타자가 자동아웃되는 것으로 끝난다. 만약 부정위타자 문제가 선수이름이 아닌 타순의 번호로 따지는 것이라면 A 다음에 F가 나오는 바람에 B, C, D, E 등 네 명을 건너뛰었을 경우 자동아웃은 그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건 일회적인 잘못에 대한 벌칙으로는 지나치다.
야구규칙은 될 수 있는대로 양팀에게 공정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다듬어져 있다.
야구가 훌륭한 경기인 것은 그런 공정성이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