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맥(8)-백제(남부여)와 신라의 악연(惡緣)
註; 앞에서 백제역사기록은 백제.십제.남부여의 복합역사라는 사실을 살펴본 바가있다. 삼국의 저자들은 모두 고려때 사람들이기에 당시 일본의 나라(奈良)백제, 중국의 외백제(外百濟)역사를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온조 십제와 남부여의 역사를 모두 백제 역사로만 알고 있기에 헷살리는 경우가 많다. 주변국의 역사기록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1.동서(同婿)전쟁
서기523년 온조 십제의 왕손으로 백제를 승계한 사마왕(무령왕)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곰나루백제(=비류백제)는 일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비류백제의 眞씨 천황가는
일본의 나라(奈良)백제에 눌러앉아 돌아오지를 않고, 나라백제 천황의 임명을
받아 승계하던 십제 왕가 高씨 후손들도 무령왕을 끝으로 없어지다보니 내부정권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새로이 왕권에 도전한 남부여계의 扶餘씨 명농(明農)이 승리하여
신왕에 오르니 이분이 후에 성왕(聖王)이시다.
서기538년 성왕은 도읍을 곰나루에서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옮기고
나라이름도 남부여(南扶餘)로 불렀다.
당시 일본 나라백제의 흠명(欽明)천황은 성왕에게 계속 나라백제를 종주국으로
충성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남부여는 이를 거절하니 그동안 나라(奈良)백제(곰나루 백제의 원류인 일본 망명정부)에 충성하던 비류백제, 온조십제의 수많은 귀족과 백성들은 명농이 왕위에 오르자 옛 백제땅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백성의 수가 반으로 줄어 남부여의 국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힘을 모아온 신라(新羅)는 더 이상 백제의 조공국 이기를 거부,
남부여에 도전하게 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화랑군을 앞세워 옛십제의
땅을 공격, 신라 건국 500년 만에 박혁거세가 나라를 처음 세운 소불
(서울 한강유역)을 정복하였다.(서기553년)(진흥왕순수비도 이를 기념)
옛 백제의 실력이 아님을 안 신라는 계속 남부여를 몰아 부치니 성왕(聖王)은
어쩔 수 없이 신라의 조공을 폐지하고 관계개선을 위하여 자기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낸다. 그러나 이도 잠깐, 그 이듬해 복수의 염원으로
구천(拘川)을 공격 직접 출전한 명농왕(성왕)을 신라(진흥왕)는 죽이고 만다(서기554년)
진흥왕 뒤를 이은 실라의 진평왕(眞平王)은 가야연맹을 멸망시키고
백제시절부터 계속돼온 번국(藩國=조공국)의 위치를 벗어나 남부여에 대하여
완전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남부여도 현실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남부여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威德王)은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진평왕에게
사신을 보내 양국왕가(王家)의 재결연을 제안한다.
그때 실라 진평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공주만 세명 있었는데 맏 공주는
덕만(德蔓)공주, 둘째는 선화(善花)공주, 셋째가 천명(天明)공주였다.
맏이 덕만공주는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고, 둘째
선화공주는 뛰어난 미모가 삼국에 널리 퍼져 남부여의 왕손 서동(署童)이
몹시 그리워하는 상대였다. 셋째 천명공주는 귀족집안인 김용춘(金龍春)에게
시집가 김춘추(金春秋)의 어머니가 된다.
진평왕은 위덕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둘째 선화공주를 서동왕자에게 시집
보내니 두 나라는 사돈관계가 되어 한동안 전쟁한번 없이 평화롭게 지냈다.
위덕왕이 죽고 혜왕(惠王;재위2년), 법왕(法王;재위2년)을 거쳐 서동왕자가
즉위하니 이분이 남부여 무왕(武王)이시다.(서기600년)
진평왕19년(서기602년) 더 이상 왕자생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진평왕은
셋째사위 김용춘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미 중이 된 덕만 공주를 왕태녀(王太女)
로 임명하고(후에 선덕여왕이 됨) 모든 실권은 김용춘에게 위임 하였다.
왕실 승계권을 따진다면 이미 중이 된 덕만공주를 젖혀 둘때 당연히 둘째 선화
공주에게 왕위 승계권이 있다. 만약 선화공주가 승계하였다면 백제와 신라는
부부관계가 되어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진평왕이 죽자 출세욕이 강했던 실라의 김용춘(남부여의 무왕과는동서지간)은
불도에 전념하던 큰공주 덕만(선덕여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실권을 완전
장악하게 된다.
김용춘의 야심은 선덕여왕이 죽은 후 자기마누라 천명공주까지 왕위계승토록
하니 이분이 진덕여왕이 되시고 그의 아들 김춘추도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시다. 성골(聖骨)신분이 아닌 주제에 자기
아들까지 왕을 만들었으니 대단한 지략가 임 에는 틀림 없다.
선덕여왕이 죽으면 당연히 둘째인 선화공주가 왕위계승 되어야하거늘
셋째인 자기마누라 천명공주를 왕위(진덕여왕)에 오르게 하니 그의 속셈을 간파한
남부여의 무왕(武王;선화공주남편)은 김용춘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여
오랜 평화의 정적을 깨고 출병하기에 이른다.
이에 김용춘도 스스로 대장군이 되어 맞받아 싸우니 두 동서(同婿)지간은
철천지 원수가 되어 지금의 충북 괴산,보은, 지리산의 무주,지례, 덕유산의
함양,운봉 등지에서 피나는 혈전을 벌였다. 이를 동서(同胥)전쟁이라 한다.
이제 더 이상 풀수 없는 원수지간이 된 남부여와 실라는 어느 한쪽이
망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2.대야성(大耶城) 전투
서기641년 남부여의 무왕이 죽자 무왕의 원자가 왕위를 이으니 이분이
의자왕(義慈王)이시다. 의자왕은 해동증자(曾子)로 칭송 받으며 용맹스럽고
담이 크고 결단성이 있는 분이지만 자기 어머니 선화공주를 닮아 너무 미남이다
보니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결국 호색가로서 한을 남기게 되지만.
왕위에 오른 후, 40년 이상 지속되어온 자기아버지 무왕과 그의 이모부 실라의
김용춘과의 소위 동서전쟁의 한을 풀고자 과감한 군사작전을 펼친다.
이에 의자왕은 상좌평 부여성충(扶餘成忠)과 가잠성(지금의 충북괴산)성주
계백(階伯)을 불러 실라의 요충지인 대야성(지금의 경남합천)공략을 도모한다.
이때 실라에서는 김용춘이 죽고 그의 아들 김춘추(金春秋:의지왕과는 이종지간)가 진덕 여왕밑에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 그의 밑에는 김유신(金庾信)장군이 있는데
김유신의 증조부는 가라국 국왕인 구해(仇亥)로서 다른 가야국들은 사투
끝에 멸망하였지만, 구해(仇亥)왕은 자진하여 나라를 실라에 바치므로서
김유신일가는 귀족대우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김유신은 잔꾀가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남부여에서도 매우 두려워하였던 인물이라 한다.
김유신은 실권자 김춘추에게 자기 여동생 문희(文姬)를 바치고 본인은 김춘추
의 딸을 얻어 처남매부이자 장인사위가 되는 관계이다.
의자왕으로부터 출전허락을 얻은 계백장군과 윤충(允忠;성충의동생)장군은
대야성 성주 김품석(金品釋;김춘추의 사위)밑에 막장(경호대장)으로 있는 금일(昑日)을
많은 황금으로 사전 매수해 놓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안팎으로 공격을 당한
대야성은 맥없이 무너지고 성주 김품석과 그의 마누라(김춘추의 딸 소랑炤郞)가 부하막장에게 맞아죽는 비극이 일어나고, 대야성 주변의 40여 읍도 줄줄이 의자왕에게
항복하여 남부여 땅으로 흡수되었다. 실라의 절대 절명의 요충지인 대야성 함락
과함께 사랑하는 딸과 신라맹장들의 전사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너무 놀라 하루
종일 기둥에 의지하여 멍하니 서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신라는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려 신라자체의 힘만으로는 남부여의 압력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김춘추는 뒷일을 김유신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고구려의 신크말치(太大莫離支)인 연개소문을 찾아 나선다.
한편 남부여의 성충(成忠)상좌평도 연개소문을 찾아 남반도의 정세를
설명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가우리,백제,신라의 3국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춘추는 대야성 땅을 되찾게 해달라고 구원을 요청하고, 성충은
실라의 잦은 침략을 응징해 달라 간청하니 연개소문은 두사람 모두 엄히 꾸짖는다.
연개소문은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같은 민족 끼리의 싸움은 이정도에서
중지하고 실라,백제,고구려3국이 연합하여 중화족이 찾이하고 있는 외백제의
땅과 단군조선의 옛 영토를 복원하자고 제안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사람을
모두 옥에 가두어 본국귀환을 안 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니 김춘추, 성충은 자기임금께 고한 후 회답하겠다고 핑계대면서
자리를 모면한다.
두 나라의 원한과 복수심은 결국 배달 민족에 의한 천하통일의 호기를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고,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연개소문의 지원이 틀렸다고 판단한 김춘추는 일본의 나라백제와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능란한 외교술을 펼친다.
실라가 살기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결국 깽패를 불러들여 백제, 고구려가
망하고 반쪽통일의 약소국이 되는 단초가 되었음이 애 덟다.
다음은 백제(남부여)의 패망과 일본국의 독립과정, 고구려의 흥망,
발해의 건국사를 살펴본다. 峨 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