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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훈독경 (天一國訓讀經)
제3권 참된 신앙과 뜻길 - 제14일
신에 대한 체휼과 우리의 자각
날짜 : 1972. 6. 25(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신에 대한 체휼과 우리의 자각’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신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그 생활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과 우리, 또는 내가 얼마만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느냐, 혹은 생활을 통해서 일생이라는 생애 노정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1. 얼마나 하늘과 더불어 살려고 했느냐
만일 타락권 내에 있는 인간들을 구하려 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24시간이면 24시간을 언제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의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도 부모가 있다면 자기가 눈을 뜨고 의식이 있는 한 언제나 자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도 부모의 심정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미루어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오늘날 인류를 자기의 자녀로서 바라보고 있는 한 24시간 우리를 위해서 염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하늘과 먼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내가 오나가나 어떠한 행로에 서 있더라도, 혹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자리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같이 있습니다. 내가 보고 느끼는 전부 혹은 환경에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은 나만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시선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그런 동감의 시선이 곁들여 있고, 내가 내미는 손길에 하늘의 동정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보고 느끼고 감각하는 모든 것이 하늘과 주체 대상 관계에 있어서 일체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지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악한 자리에 나가려야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되신 부모의 심정을 갖고 찾아오신 그 하나님이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신 주체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이 염려할까봐 내 생활을 절제하고, 그분이 고통을 느낄까봐 수시로 하늘을 위주로 하여 내 환경적인 모든 것을 상대적인 여건으로 일치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느냐?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혼자 있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자리에 있어 가지고 하늘이 동정하고 하늘이 보게 될 때 “내가 너를 지킨 보람을 느낀다.” 할진대는 하늘이 그러한 사람을 대해 가지고 환경을 굴복시킬 수 있게 하십니다. 그가 피해를 입든가 가해를 당할 수 있는 환경에 있게 된다면 그 자리는 하늘이 가해를 당하는 자리요, 하늘의 슬픔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환경이 악한 환경이면 악한 환경일수록 악이 승리하게 하는 것보다도 선한 하늘 앞에 굴복하도록 타개시켜 나가기 마련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생활적인 터전이나 어떠한 근거지를 여러분의 생활 이면에 혹은 생활 표면에서 확정짓지 않고서는 하늘을 체휼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58-288)
2. 생활 속에서의 신에 대한 체휼이 우리의 생명의 요인
여러분, ‘사랑’ 하게 되면 막연한 말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느낄 수 있는 주체나 대상권 내에 있어서, 그와 나와의 행동적인 일치점을 갖출 수 있는 데 있어서, 그 상대에 대한 사랑의 느낌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 하게 되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그 막연한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떠한 환경에서 일치점을 느끼느냐, 출발점을 제시할 것이냐?
그러한 내정적인 면을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내심으로 그 폭을 넓히고 그 권을 넓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각뿐만이 아니라 실천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적응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게 될 때 “내가 사랑하는 아버님이 바라는 심정적인 요구, 즉 사랑의 아버지께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 혹은 한 달의 생활도 물론이지만 일생에 걸쳐 자기 혼자 보고하고 자기 혼자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체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체휼이 우리의 생명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58-290)
3. 입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라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내 모든 감각, 나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늘이 아니냐 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춥다고 하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 가지고 아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있다면 신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적인 입장을 어떻게 우리가 확정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환경에서 인식되느냐 할 때, 여러분은 신비스러운 기도시간에만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아니에요? 하기야,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정성들이는 그 시간에 그러한 인연이 맺어집니다.
내가 듣고 말하는 이 모든 것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어야 됩니다. 내가 “여보!” 하면 “여보!” 하는 데 있어서도 그 울려지는 음파의 전달로서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반드시 심정적인 내정이 하늘과 더불어 가중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말을 하고, 듣는 데 있어서도 역시 그런 면을 들을 수 있는 체휼적인 입장이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생활을 여러분이 하게 된다면 날아가는 새소리도 그냥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그냥 들리지 않습니다.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 빛도 자기에게는 무한한 그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터전 위에서 이것을 어떻게 자기가 체휼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실질적이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로울 때에 내가 외롭기 전에 먼저 하늘이 외로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쁠 때도 나만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평면적으로 기뻐하지만, 하나님은 입체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기쁨을 느끼시며 기뻐하는 나를 보시고 나에게 동조해 주고, 나의 노래 혹은 나의 춤에 가중된 자극으로 나를 권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환경으로 하늘이 나를 품어 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 그런 자리를 체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 체험된 순간이라는 것은 영원히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그 느낌은 나를 지배합니다. (58-291)
4. 체휼적인 감정을 실현해야 새로운 자각이 형성된다
그런 입장을 친히 느끼고 그런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당하고 있는 환경과 생활하고 있는 무대가 아무리 비참하고 처참하더라도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독하고 처참한 환경이 그 사람에게 미래에 가중된 희망을 촉구시키고, 그 처참함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새로운 소망을 촉구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 경지에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과 나와는 하나다.” 하는 자각된 입장에 서서 자기의 모든 소신을 한 목적에 결정적으로 집중시켜 가지고 나서게 될 때,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휼적인 자리에 있어서 자기의 새로운 자각을 어떻게 확정 짓느냐? 폭풍우가 불어오는 환경의 첨단의 자리에 섰다고 하더라도 밀려날 수 없다는 자각, 어떠한 어려운 사선이 내 앞을 가로막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자각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신 세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은 하늘이 같이하니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어려움을 대비해 가지고 배후에서 배수진을 치고 여러분을 찾아오고 있고 여러분과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고통이 가중될수록 그 고통은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치를 타진하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부딪히게 하는 것은 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피해를 입히고 마이너스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한 사탄 세계, 악한 역사 시대의 인류, 실패의 원칙을 따라오던 인류, 또 실패의 원칙을 제시하는 사탄 앞에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수난 길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거기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고 나서게 될 때 그 환경에 처해 있던 인류는 새로운 소망의 인물로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일, 하나님에 대한 체휼적 감정을 얼마만큼 자기 생활 주변에 유도해 가지고 실현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실현화시키는 사실들이 자기를 중심 삼고 표현화할 때 자기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 주변에 새로운 자각권을 형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58-293)
5. 완전한 대상이 나오면 주체 형성은 자연히 벌어진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에 의해 못난 사람이든지, 잘난 사람이든지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누구든지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그런 주체를 만나게 되면 본심은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엇갈려 가는 사람을 척 보더라도 공연히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지남철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지남철의 주체라면 인간은 끌려갑니다. 여러분이 길을 나서게 될 때나 혹은 시장에 갈 때 “오늘 시장에 가는데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냐?” 할 때는 자기라는 관념을 벗어나 가지고 그와 같은 관념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나는 조그마한 지남철인데,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있다면 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니냐?” 하면서 그리로 찾아가는 생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상점을 가더라도 자기의 마음이 끌리는 데 가서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생활 습관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게 될 때 말을 배우는 그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 그래요? 아버지라는 말을 모르고 “아버지!” 할 때 그 아들이 아버지를 아느냐? 그것은 습관화되다 보니까 “아! 이렇게 되게 되면, 이것이 아버지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을 보게 되면 참 신기합니다. 추상 명사 같은 것도 전부 다 어떻게 알아서 잘 배워 나갑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래야 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생활 면에서 세부적인 분야를 많이 대해 나가야 됩니다. 많이 대하면 자연적인 습관성에 의해서 알게 마련입니다. 설명에 앞서 자연히 자기의 해명권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그냥 그대로 일어나서 어제 살던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라고 생각하지 말라구요. 내가 어제 밤에 잤기 때문에 자고 일어나는 나는 어제의 그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어머니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욕망의 대상이 없습니다. 어머니면 어머니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감각 기관이라든가 의식 기관이 전부 다 어머니에게 동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젖을 먹고 나서도 어머니, 젖을 먹기 위해서도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외에는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혼자 잘 때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잠을 자는 것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자고 일어나서 자기가 자기 손을 쓱 보아도 손이 빛나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하고 느끼는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58-295)
6. 체휼적 감정의 체득이 필요한 신앙생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주체로 모시고 살고 있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사랑하는 분의 모든 것은 귀하게 느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어지고 모든 것이 발전의 동기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늘날 신앙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할 때 그 아버지는 뼛골에서 울려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뼛골이 울려 나와 골수가 반응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그 아버지는 얼마나 수고했느냐는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찾아 헤매면서 수고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결국은 나 하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세계를 동원하고 역사를 동원하고 우주를 동원해 가지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 하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자다가도 “아버지!” 할 수 있고, 혼잣말로도 “아버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상대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그리움이 복받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그 생활 이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 가지고 “아버지!” 하게 되면 아버지가 없는데도 아버지의 손이 잡혀집니다. “아버지!” 하면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러한 체휼의 감도, 느끼는 그 도수, 그 양의 여하가 그 사람의 신앙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심정을 가졌다면 어디에 옮겨 가서 “내가 이것을 해야 된다.” 하게 될 때는 “하늘이여, 같이해 주시옵소서!” 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같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때는 “고마우신 하나님!” 하게 됩니다. (58-297)
7. 신앙생활에 자신을 갖지 말고 하나님을 체휼해야
여러분이 기도할 때와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고 기도할 때 그 아버지라는 말에도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뭐가 다르냐? 거쳐온 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자신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갖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효의 길 앞에서 자신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효는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있어 가지고 자신을 갖는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은 놀음입니다. 하나님이 같이해 가지고 자신을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이 같이하고 있으니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자신을 갖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여러분이 느껴 가지고 자기의 생활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화된 형태로 나타나 그것이 자기의 생활을 통해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생활이 하나님과 더불어 일치될 수 있고 동화될 수 있는 환경으로 나타날 수 있는 체휼권이 벌어지게 될 때, 누구든지 그 사람의 곁에 가면 갈수록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세계는 사망권인데 이 세계는 하늘권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모르지만, 본심은 알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58-301)
8. 신을 체휼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여러분, 선후의 관계가 거꾸로 된 것은 악이 됩니다. 타락이 뭐냐? 선후의 관계가 거꾸로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체냐 할 때 “하늘 것이 주체다.” 하는 절대적인 관념이 필요합니다. ‘나’ 하게 되면 나는 하늘 앞에 대상으로서 선 나입니다. 그 대상으로서의 내가 주체의 요건 앞에 일치화 되지 못하게 될 때는 그 대상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체는 하늘입니다.
효의 길이 어떤 길이냐? 자기의 주체의식이 발발하게 될 때는 효자의 길은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대상이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신에 대한 체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체휼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대상이다.” 하는 것입니다. 대상인데, “좋을 때만 대상이지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니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을 때만 대상이고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닌 법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위하는 대상이나 위하는 주체는 망하지 않습니다. 위하고 있는 주체가 있으면 위하는 한 대상이 없더라도 그 대상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대상이 위하고 있는데 그 주체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끝까지 가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시작했으니 죽을 때까지 할 것이다. 내 일대에 안 되거들랑 몇 대에 가서라도 할 것이다.” 해야 됩니다. 몇 대를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세계적인 축복을 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끈기 있는 족속이니까 네 후손한테 가서 이루어 주겠다. 한 10대고 20대고 기다렸다가 역사적인 축복을 네 족속들에게 해줘야 되겠다.”고 하늘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58-305)
9. 하늘을 주체로 자각하여 세계를 각성시키는 운동
하늘을 위하고 주체를 위하는 마음이 사무치게 될 때는 그 주체가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없는 주체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세계에서 빚지지 않고 하늘의 위신을 세워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환영 받습니다.
이러한 제반 문제, 주체와 대상 관계의 정상적인 실현 여하를 어떻게 적응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 삼아 가지고 여러분이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체휼이라는 것이 오지 않습니다. 글을 쓰더라도 혼자서 그냥 쓰는 것보다도 “이 글은 누구를 위해서 쓴다. 사랑하는 하늘 아버님을 위해서 쓴다.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서 쓴다.” 할 때 얼마나 의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미래의 나라의 뒷받침을 위해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공적인 입장에서 피곤해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이 그걸 모른다고 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효자는 부모를 울리는 것이요, 충신은 군왕을 울리는 것이요, 열녀는 남편을 울리는 것입니다. 천 가지를 주고도 부족한 것을 느끼고, 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주고 자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고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부모를 주체로 모시게 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생활적인 면에서 하늘을 눈물짓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일대에 있어서 하늘이 나와 더불어 통곡한 사실이 있다고 할 때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효자를 앞에 놓고 효자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부모는 불행한 부모가 아니라 행복한 부모입니다.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소망의 눈물이요, 희열의 눈물이요, 감사의 눈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귀노정에 있어서 눈물지어 나왔던 하늘 앞에 그럴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그럴 수 있는 충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에 있겠느냐?
신에 대한 체휼과 우리의 자각은 때가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커집니다. 그러니 만큼 자기가 처한 부서에서 새로운 자각권(自覺圈)을 확대시켜 가지고, 하늘이 보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면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각을 가진 그 사람으로서 자기만의 자각이 아니라 하늘을 주체로 모신 입장에서 자각을 해 가지고 체휼적인 환경권과 생활권과 시대적인 권한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새로운 목적의식에 불타서 나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자각보다도 그러한 체휼의 환경을 여러분이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체휼해야 됩니다.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안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접해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자고 하는 일체의 생활을 나 혼자 하지 않고 주체와 더불어 주체의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느껴야 됩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는 자리, 하늘이 같이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자각을 해 가지고 세계로 나서게 될 때 비로소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58-322)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