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 조지수
한양 조씨는 한양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서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를 시조로 모신다
첨의중서사는 첨의성과 중서성을 합한 관청으로 지금으로 보면 총리직에 해당하는 고위 관직이다.
함경도 덕원에 정착한 조지수는 아들 대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동북면 지역을 점령한 원나라가 이곳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지수의 아들 ‘조휘’를 쌍성총관에 임명한 것이다.
총관공 조휘
시조 중서공 휘 지수의 독자로 태어나시어(지수공의 1자는 판도판서공 인재 2자가 총관공 조휘라고도 함) 고려 고종 45년(1258) 원(몽고)의 쌍성총관부 초대 쌍성총관에 제수되셨다.
이후 공의 증손자까지 99년간 총관을 세습하여 12개성을 통치하셨으며,1273년 돌아가셨다.
묘는 함남 덕원군 북성면 신안리이다.묘소앞에 사계화가 있어 우리 가문의 상징이 되고있다(사계화 그림참조)
1926년 가선대부 부경(종2품 벼슬로 현재 차관급임)을 지낸 정윤(참판공파)공이 쌍성각을 창건하였다. 독자를 두시니 부원수공 휘 양기이다.
<출처> 다음카페-한양조씨대종회
다음은 다음백과 내용이다
본관은 한양. 용진현 출신이다.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258년(고종 45) 북방이 허술해진 틈을 타 정주인 탁청 및 등주·문주 등 여러 성 사람들과 공모한 뒤 몽골군을 인도하여 동북면병마사 신집평 등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반부했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는데, 조휘는 이때 쌍성총관부의 총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몽골병을 이끌고 와서 한계성을 공격하다가 야별초에게 패했다. 그뒤 고려가 몽골에 보내는 사신을 죽이고 선물을 강탈했고, 동진국의 병력을 끌어들여 춘주의 천곡촌에 주둔시켰다.
1271년(원종 12)에는 양주의 반란민을 도와 그곳의 관속과 주민 1,000여 명을 화주로 몰고갔다. 이후 그의 아들 양기가 쌍성총관부의 총관직을 이었다.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대대적인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했을 때 손자인 조돈이 고려에 내응함으로써 쌍성총관부는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