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전 글을 "사는 연습"이라고 적긴 했는데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는 내게도 삶이란게 연습이 아니라 순간순간 생생한 현실이다보니, 어떤 이상을 실현해 보려는 실험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는 내게는 인지학을 만나고 일해왔던 그 시간이 길어 아까워한다거나 인지학을 통해 한 몫(그게 돈이나 권력이든, 명예든) 잡으려는 생각은 이젠 (짧은 순간이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없었나 철저히 생각해보면 부정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이젠'이란 말을 넣는다. 아직도 가끔 그런 생각이 올라올 때도 있다) 없기에? 적기에? 어쨌든 마침표.
그럼 내가 지금도 인지학을 계속 공부하고 실현해보려 노력하는 이유는 뭘까?
돌이켜보면 뭐 인지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이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됐다거나 그렇진 않다. 오히려 잃은 것도 많다. 내게는 특히 무겁지 않음에서, 여유로움에서 오던 유머. . .가끔 발돌교사모임이나 학교 아빠모임 같은데 가보면 발돌학교 들어오면서 자기가 달라졌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음... 그렇단 말이지? 정말 학교들어오거나 부모교육 한다고 열리는 발돌강좌 하루 이틀 들었다고 사람이 달라졌단 말이지? 그게 가능하다는 거지?
실은 웃음만 나오는 얘기고, 그렇게 인간이 쉽게 변하는 거라면 교육이라는 것을 어쩜 필요가 없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집에 가서는 마누라를 때리고, 술 취해선 음담패설이나 늘어놓고, 교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성추행, 폭행, 공금 남용 및 횡령, 이간질, 모략과 모함이나 하는 모습을 보아온 시간들이 지난 20년이다.
안다. 물론 알고 있다.
어디서나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있고, 최선을 다해 ㅡ 그러니까 자아실현은 모르겠고, 적어도 자신의 일에서 자아를 배신하지 않으려 애쓰며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잘 알고있다.
하지만 그것이 공간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발돌학교 뿐 아니라 어디에나 있었다.
입시학원 ㅡ> 공교육교사 ㅡ> 대안학교 교사 ㅡ> 발돌학교 교사로 점차 모아져 가는, 마치 흔들리는 나침반이 점차 그 진폭을 줄여가며 북쪽을 가리키듯, 운명의 방향이 발돌쪽으로 내 머리채를 잡고 옮겨놓는 과정이 지난 내 인생이라면, 그 인생 속에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여기는 '막장'이라는 것.
왜 있지 않은가? 인생 이것 저것 다 해 보다가 결국 태백 탄광 막장에 탄 캐러가는 사연많은 광부처럼, 인생 이것 저것 다 찾아 헤매다가 더 이상 갈 곳없어 구석에 몰린 사람들이 오는 곳처럼 보였다. 물론 나 역시도 그런 사연많은 사람 중 하나 일 것이다.
막장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었다. 한 축으로는 자기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사기꾼부터 먹고살기 위한 장사꾼, 자기 자식은 좀 낫게 키워보려 여기까지 온 사람까지... 다른 한 축으로는 정말 상종못할 사람부터 정말 저렇게 괜찮은 사람이 있을까 싶은 사람까지. 나는 그 좌표평면 중 어디쯤 위치해 있었을까?
그런데 이 막장의 사사분면은 다른 함수 그래프와는 다르게 양 극단에 주로 분포한다는 것이 양적 특징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질적인 부부인데, 이 양극단의 사람들 모두에게 보였는데, 다들 무언가 찾고 있었고 인지학 혹은 발돌이란 공간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헛된 희망과 망상이든, 안온한 편안함이든, 아님 피말리고 뼈아픈 인생의 교훈이든 말이다.
그래서 탈출했다.ㅎㅎ
아마 처음은 이런 곳에서 있고 싶지 않았다는게 우선이었을 거다. 나도 내 영혼의 따뜻함을 줄 안온한 행복을 찾고 싶지 않았겠나? 본능적 느낌이겠다. 그러나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은 나를 발돌 근처로 옮겨놨다. 마치 문어를 잡기 위해선 머리를 잡고 꺽듯, 보이지 않는 손은 내 머리를 잡고 꺽어 이곳에 떨구었다. 도대체 왜!!!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다시 탈출했다.
그렇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내는 동안 가슴에 울화가 쌓이고 답답함이 쌓여갔다.대나무밭이 있으면 가서 소리라도 지를텐데 그럴 곳도 없었다. 함께 있는 동료를 감싸자면 부모들에게 거짓 혹은 언제 다다를지 모를 이상을 얘기해야 했고, 동료에게 조심스레 조언을 할라치면 금새 공격적인 방어로 화를 맞았다. 그렇다고 휙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왜 이미 말했지 않은가? 그 조삼모사의 원숭이마냥 다시 발을 붙잡고 애원하는...ㅜㅜ 모질지 못한 모지리였다. 쌓이는 울화와 답답함은 술로 적셨다. 이러다 죽겠다 싶었고 아니나 다를까, 병도 얻었다. 군시절 그 어느 때부터 죽는게 두렵진 않았지만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할 일 열심히 했다. 언제 죽어도 후회없을 사람처럼 일하다가 내 일을 다 했다 싶으면, 튀었다. 그러나 또 보이지 않는 손은 슬며시 다가왔다. 다시는 머리가 꺽이지 않겠다 다짐하며 미리 목에 기브스를 했어나, 이번엔 내 가슴을 때렸고, 울린 가슴은 또 무언가에 공명한 채 숙명처럼 이곳에 다시 머물게 했다.
물론 가족도 가정도, 돈도 명예도 버리고,이곳으로 돌아온 이유가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나 역시 무언갈 찾아 헤매고 있었고 여기서 조금 무언갈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하는 말들에, 그러니까 그 인지학이라는 것에 진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특히 아이들을 통해 달라지는(자기 본연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를 통해 확신을 얻었다. "뭔가 있다!" 그게 내가 이곳에서 완전히 발을 떼지 못한 이유였다. 더 알고 싶고 더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게 순수한 이기주의였는지 책략적 도덕에서 그랬는진 좀 더 들여다 봐야겠지만.
*
그러던 과정에 쉴러 부인을 만났다.
이전에 말했듯 협회에서 만난 습식수채화와 이후 발돌학교에서 만난 색채의 경험이 내게는 색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회화든 그림이든, 아님 음악이든 내 신체적 한계에 갇혀 세상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을 애써 부인하고 멀리하다가 그것을 진짜 만났을 때 좀 과장해서 말하면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경험과 다르지 않았다. 좀 더 들여다보면 심봉사처럼 눈이 먼 것도 아니었고, 내가 단지 용기가 부족해서 억지로 눈을 감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가 말했다. 감각인상에 폭 빠져 살면 안된다고...
그러나 알았다. 감각인상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는 다 그 이유가 있고
그 존재의 이유를 찾아 제 위치에 가져다 놓으면 적합한 거라는 걸.
내가 감각인상만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사실은 내게 그 말을 한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았고, 혹은 지금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감각인상을 통해 세계를 내 것으로 가져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세계의 문제를 내 문제로 가져오는 과정이었다. 더 높은 단계들이 있고, 더 높은 세계의 과업들이 있긴 하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상태였다.
그래서 그쯤부터 내게 이러쿵 저러쿵 조언하는 🐕소리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절대적 진리라도 그것이 내게 맞는지 안 맞는지를 지각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나'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발돌학교에서 모두가 어떤 음식을 끊고, 미디어를 멀리 하자는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저게 공산주의적 새 인간형, 아니 발도르프적 새 인간형을 기르자는 광물 -독재적 공산주의로 밖에 안보이는 걸 어쩌나? 좋은 내용과 법칙을 알려주는 건 좋으나, 그것이 내 몸과 상황에 잘 맞는지 내 신경을 다해 지각하고, 나에 맞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던가? ) 그래야 내 행위가 그나마 이전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그래봐야 뒤뚱뒤뚱 걸음마겠지만)
아직은 몸만 큰 어린 미숙아인지라 누군가 가르쳐. 아니 가리켜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수료한 협회 교육을 몇 번 갔지만 거기에선 내가 얻을 건 더 이상 없었다. 쉴러부부와 그 가족 기업(요즘 발냄새 나는 사람들에게서 유행하는 형태이다. ㅋㅋ)이 아이라움에서 여는 상급미술강좌가 내 갈망을 채워주고, 또 미술이란 교과를 통해 상급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망하게 되면, 담임과정을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다 좋은데 돈이 없었다. 발냄새 나는 교육은 비쌌다. 백만원이 넘는 돈이 없었다. 다른 발돌 교사들은 어떻게 돈을 마련하나 싶었는데 다들 남편(이럴 땐 자기편)이나 아내 찬스가 있었다. 그럴때에만 떠나온 아내를 그리워했다. 연을 끊은 부모가 도움을 주면 어떨까 바랬다. 나도 부부교사로 있으면서 생계걱정없이 발냄새나 좀 풍기고 대단히 희생적인 일을 하듯 보이지 않는 어깨에 힘도 좀 주면서 일할 껄(그래, 나 쓰레기였다. 또 나만 쓰레기였던가? 근데 정말 그랬던 걸 어쩌나? 12×3÷2 )...
근데 다행히도 교통사고가 났다. 상대의 과실로. . .ㅎㅎ
잘 쉬는 것도 못하는 내가, 떳떳하게 병원에서 2주간 넘 돈으로 잘 누워 쉴 수 있었다. ㅋㅋ 그리고 보상금도 받았는데 그게 아이라움 등록할 돈보다 많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던가? 그렇게 그 돈으로 아이라움에 등록해서 첫 학기를 보냈다.
몰랐지만 이후 만성으로 달고다니는 삐뚤어진 어깨 - 허리 - 무릎 질환과 바꾼 수업의 시작이었다.
*
첫 학기에 관한 내용은 이전 글에 대충 기술했다. 어쨌든 70년대 발돌미술을 모방하는 나를 위해 쉴러부인은 애썼고 애썼다.
잠시 수강생들 그림을 보러 한 바퀴 돌고 오시면 내 그림은 바뀌어 있었다. 쉴러부인은 내 그림이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느냐 물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만 하는 나 역시 쉴러부인에게 물었다. 내 그림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ㅎㅎ
답답하셨을 거고, 안타까우셨을거다. 애 여기 왜 와서 이럴까 하고?
이래저래 방향들을 제시하시기도 하셨으나, 난 계속 오리무중... 통역의 곤란함을 선생님도 느끼셨던 걸까? 가끔은 붓을 대신들어 이렇게? 하고 보여주며 의견을 물으셨다. 그래도 선생님의 붓질은 그녀의 독일어마냥 내게는 깜깜했다.
어쨌든 첫 학기가 끝났다. 그리고 저 그림 하나가 어딘가에 세워졌다.
그냥 8~9일동안 붓으로 칠했다가 벗겨냈다가 찍었다가 문댔다가 나도 내가 뭘하는지 모른채 그냥 열심히 노동했다. 그런 그림에 무엇이 아름다운 거고, 어떤 것이 이상한 건지 알려주시려 했다. 선생님의 말씀따라 그리고 칠하고 찢어서 덧붙이고 뿌렸다.
솔직히 뭘했는지 몰랐다. 힘들었었다.
어디로 가야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언가만 열심히 하는 삶. 지금 생각해보면 벤허에 나오던, 로마 갤리선의 노젓는 노예의 삶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어둠 만이 존재하는 지하 선실에 갖혀 쉴러부인의 북소리에 따라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나. 그러니 저걸 내 그림이라 할 수 있을지...
그럼에도 가슴 한 켠 어딘가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종의 후련함이었다. 한 학기를 끝냈거나 그림을 그렸다는 후련함보다는, 늘 내 생각과 목적에만 부합하는 ㅡ 머리만 쓰고 살던 내가 아무 생각없이 커다란 화판에서 빨간 색을 8일간 만났던 시간이 내게는 없었다. 이게 예술은, 그림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내게는 내 잡생각을 버리는, 내 생각을 잠시 잊는데서 오는 후련함은 아니었나 싶다.
*
그렇게 방학중 수업이 지나고, 다시 학교 생활에 열중했다. 다짐하기로는 비싼(학기가 갈수록 템페라 물감이 비싸졌다) 안료를 사서 학기중에 연습도 좀 해보려 했고, 실제로도 몇 번 끄적였었다. 그러나 맡은 아이들의 수업, 교육경력 0인 초짜 교사들과의 공부, 그리고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등 학교 상황을 떠 맡느라 그림을 연습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도 성장하고 싶었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도 싶었다, 그래서 지난 학기 과정 중에 그림 그리던 선생들이 얘기하던 여러 화가의 화집들을 사서 보기도 하고, 미술사 책도 사서 봤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모든 걸 책으로 하려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책이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실제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달랐다. 뭐가 문제일까 궁리하다 우리나라 화집과 서양 화집의 인쇄 품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서양화집을 구해 들여다 보았다. 시간적으로는 경제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돈에 있어서는 별로 경제적이지 않았다. ㅜㅜ
다시 방학이 왔고 학기가 그림 수업이 다시 열렸다. 지난 학기에 비해서 사람이 좀 빠져 있었다. 작은 공간에서 자기 작업공간마저 확보되지 못한채 서로 부딪히며 수업했었는데 좀 나아졌다고들 했다. 난 핑계거리가 없어져서, 또 참고할만한 그림의 수가 적어져서 아쉬웠다. 2학기, 3학기... 학기가 계속될수록 사람들은 적어져 갔다. 특히 얼굴을 알고 지내던 담임교사들이나 유아교사들이 잘 안 보였다. 나처럼 습식기법이나 좀 배워가려 했던 우리의 목적들이 희미해져 갔기 때문이다. 말했듯 미술을 전공하거나 미술교사, 취미로라도 많이 그려본 이들이 남았다. 그러면서 커리큘럼의 구성도 바뀌었다. 오전의 방법론 시간이 줄거나 없어졌고, 템페라화 그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우쒸~~~
상급학년에서 다루면 좋을 주요 주제들을(예를 들면 '공간과 사이공간', '우연' 등) 자기 작품을 그리며 찾아가는 식이었다. 내겐 힘든 시간이 더 늘어났다. 견디고 버티는 것도 내게는 일이었다.
'마티에르'에 대해 배우고 그리던 학기였던가... 자기만의 마티에르를 찾으라 하셨던 듯. 아직도 마티에르가 무언지 잘 모르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질감으로 이해했던 나는, 무엇이 내게 고유했던가 고민했다. 이미 언제부터인가 쉴러교수를 통해 진행되는 커리큘럼은 따라가지 못한채(난 아직도 교수와의 소통이 쉽지 않았던 통역에도 책임이 있다고 변명하고 싶다. ㅎㅎ) 나만의 생각과 방식으로 혼자 다른 길을 가는 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갈수록 그림이 이상해져갔는지 몇 학기를 거치며 내게 친절한 얼굴로 다가와 이렇게 그려야 해, 저렇게 그려야 해 하던 간섭쟁이들도 이젠 멀찌기 지켜보기만 했다.
사실 여기에는 재밌는 사정이 있다. 혼자 무언가 골똘이 막 하고 있으면 교수님이 오셨다가 보시고는 '어떻게 가려 하느냐?" 물으시곤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는 해보는 건 어떻겠냐 조언하셨다. 뭐 알아 들어도 손발이 그걸 해내는덴 어려움이 있는데, 잘 알아듣기도 어려워 곧잘 하려던 방향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멍하니 그림만 쳐다보며 뭘 해야 하나 있던 경우가 많았다.
교수님이 다시 돌 때까지는 그래도 붓질을 한 두번이라도 더 해야 조언을 듣고 방향을 잡아 그리곤 할텐데, 그냥 그대로 두었던 적도 있었다. 교수님도 그림이 그대로이면 도대체 한 두시간 동안 뭐했냐 혼내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가셨다. 그런ㄷㅔ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던지- 아님 한심했던지 같은 과정 수강생들의 친절한 오지랖으로 교수님이 돌기 전 붓질을 한 두 번 그리기도 했다. 혹은 내가 한국말임에도 그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직접 붓을 들고 내 그림에 시범을 보여준 이들도 한 둘 있다.
어느 날인가, 쉴러 부인이 또 순회지도를 하던 때, 내 자리 근처에 있던 선생이 내 그림을 보고 이렇게 저렇게 해 보라고 붓질을 해 주었다(그날 그가 한 두번의 붓질을 했는지, 그의 조언으로 내가 했는지 정확하진 않다.어쨌든 갈 길 모르는 나는 내 의향은 아니었다 본다)
한사람 한사람 정성껏 그림에 대해 도움을 주던 쉴러부인이 내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을 보시곤 또 그 깊던 회색빛 눈으로(회색옷을 자주 입으셔서 눈빛을 회색으로 기억하는지도...) 저으기 쳐다보시더니 '아까 그 아름다운 그림은 어디로 갔는지' 물으셨다. 뭐라뭐라 말은 했으나 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근데요, 선생님.... 원래 아름다운 그림도 없었다고요~~) 그러더니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더 남기셨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통역의 목소리가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좀 컸다. "너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모른 채 흘려보낸 날들이 많았겠구나" 뭐 대충 그런 말이었다. 그날 술을 좀 많이 마셨다. 지나고 보니 그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걸 알지 못하고 순간들을 만끽하지 못한채 흘려보낸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팠지만 좋았다(그래, 변태일 수도 있겠다.ㅎㅎ)
어쨌든 그런 순간들이 몇 번 더 있었고, 그러다보니 주변 도움의 손길들은 떨어져 나갔다. 그림은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져가서 먼저 내가 도움을 청해도 누구도 쉽사리 얘기해주기 어려웠다. ㅠㅠ 다시 '마티에르'로 돌아가서.... 내게 그림을 그렸던 순간 중 아직 기억하고 있는 순간이 언제일까 떠올려 보았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마지막 미술시간이 떠올랐다. 겨울 풍경을 그렸던 시간인데 크레파스의 색을 겹쳐서 나무를 그렸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잘 그리는 누구 것을 보고 그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는 굉장히 만족했고, 좋았었다. 왠지 모를 자신감도 막 솟아났었다. 그림을 마치고 나서도 다음에 이렇게 그림을 더 그려보겠다 다짐을 했고, 잘 그릴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과 희망은 얼마 안 되 사라졌다. 학년이 올라가자 3학년부터는 크레용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 했다. 그건 애들이나 그리는 도구라 애들이 말했다. 그렇게 또 미술은 그리면 그릴수록 실제와 멀어지고 실패를 경험하는, 짜증나는 시간이 되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크레용을 집어 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또 막 칠했다. 그 2학년의 어느날처럼 칠한 것 위해 또 다른 색 크래용을 칠했다. 그냥 신났다. 게다가 요 독일의 오일파스텔은 색감이 너무 좋았다. 부륵부륵 크레용을 칠하는 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나보다. 사람들이 수근거리던 그 자일리톨(네모난 껌) 그림의 시작이었다. 이후 3학기 정도를 계속 그렇게 그렸다. 전체 진도와는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거 그냥 하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이번 학기에도 또 크레용으로 자일리톨 그림 그리냐고 웃음반, 관심반으로 물었다. 나도 그냥 씩 웃었다.
쉴러부인은 지나가시다 아주 가끔 조언을 하시는 정도였다. 그땐 그게 좋기도 하고 좀 싫기도 했다. 주로 하셨던 조언은 "선들을 좀 그려보면 어떻겠냐"였고, 난 "선은 어떻게 그려야 하냐"고 물었다. 내가 그린 선은 내가 봐도 뭔가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통역하는 이가 내 어이없는 질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지만, 쉴러부인은 몸소 이렇게...이렇게...라며 보여 주셨다. 그러나 따라하기란...
또 저걸 그리던 어떤 날은 이 질서 정연한 점들을 깨보라 하셨다.
어떻게요?
... ...
한참을 멈춰있다가 바닥에 깔려있는 신문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김영란법(3만원 이상 공무원 접대 금지법)에 대한 기사와 함께 3만원이면 얼만큼인가 하며 맥주 2병과 소주 1병, 그리고 안주 서너가지를 사진 찍어 놓았다.
그래서 그걸 그냥 그림에 그렸다.
그냥 즐겁게 놀던 시간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쉴러부인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가끔 쳐다보고 가는 쉴러부인이 하는 부탁 정도는
자일리톨을 좀 줄여볼 것.
또 선들을 좀 그려볼 것.
그래서 선들이 그려진 그림들을 구경하려 미술관도 가고
외국 화집도 구경했다.
지금에 와서 가끔 저 사진 속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머리의 뇌세포같단 생각이 든다. 많은 잡생각으로 가득찬 뇌세포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냅둬진....
언젠가 자폐인의 그림에서 내 그림과 굉장히 유사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일까?
꿈보다 해몽일진 모르겠지만, 쉴러부인이 그것을 보시고 연결을 좀 해보라고 선을 강조하신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술적인 그림은 둘째치고 먼저 사람이나 되라고...

첫댓글 며칠 전 연락이 왔는데, 오늘이 쉴러부인의 1주년 기일이란다. 1주년 그 즈음에 이렇게 그녀를 기억하고 정리하게 되는 것도 신기하다. 마지막 글들도 오늘 정리해 적을 수 있었음 좋겠다.
어쨌든 내게는 한동안 시간을 같이하고 영향을 준 분이시다. 명복冥福이란 말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건 상급 미술 중에서도 마지막에 한 부분일 뿐이예요. 상급은 9학년 부터 12학년까지고, 이런거는 12학년에 이태리로 미술 수학여행 가기 전에 한번 시켜보는 거예요. 특히 미대 가고 싶은 학생의 포트폴리오 작성에 미술 교사가 도와 주면서 이런 그림도 한두 개 집어넣어요.
이렁거를 몇 년씩 했다니, 기일 1주년이라 해서 ... 떠오르는 생각을 이만 줄입니다. ㅡ,.ㅡ;;
이런 종류의 실험, 혼합 기법은 휴가철의 '여름 미술 강좌'에서 주로 해요.
그런 강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많은 중년 아짐마들,
자식들은 성인이 되어 집 떠나고, 남편은 어린 여자 만나 이혼해서 혼자 되니, 나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인생을 새로 살아 보겠다며 되돌아 보니, 그래 젊은 시절에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했지, 하면서 성인을 위한 대학 강좌, 여름 강좌 같은 데 찾아 다니는 좀 ... 없는 아짐씨들.
저도 3년 해 봤어요. 그런 비싼 강좌에 40명은 사기져, 제 강좌는 15명이었고, 오전부터 오후까지 총 8시간 개인 지도예요.
언제나 13~14명 중년 아짐씨, 1, 2명 대학 입시 포트폴리오 준비하는 젊은이. 하하하~~
인원은 줄고 줄어 11명이 되었지만 언제나 들고 나는 사람이 있어 스무명은 되었었네요.
아마 저도 그런 아저씨들중 하나였을꺼에요. 구성도 비슷하네요. 돈많은 발돌 아줌마들과 돈도 없고 발돌을 들어갔다 떠났다 하는, 일찌감치 이혼한 중년남교사. ㅎㅎㅎ
제가 인지학계 미술학교 주관 여름 강좌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중년 아짐씨 중에는 발돌 교사와 학부모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림같지 않은 그림 보면서 미술이 그렇게도 만만한가, 어떻게 이 나이에 예술가가 되겠다고 나서는가 하는 생각이 늘 들었고, 돈많은 아짐씨들의 미술에 대한 기본 자세가 너무 역겨워서 3년 하고 때려 치웠어요. 단기간에 돈 잘 벌었지만서도.
어린 시절에 피아노 좀 쳐 봤다고 50 되어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나서는 아짐씨 본 적 있어요?
그런데 어린 시절에 붓으로 색칠 좀 해봤더니 재미 있었다, 그래서 반백살 된 지금 미술 공부를 해서 화가가 되겠다 하는 아짐씨들은 왜 그렇게도 허다한지... 미대 입시 포트폴리오 준비하는 청년은 있었어도 아자씨는 한 명도 못 봤어요. 물론 아자씨들은 어린 새아내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을테니 말이져. 하하하~~
저 역시 그림같지 않은 그림을 재미로 그리며 버틴 사람 중 하나겠네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요? 아님 어린 여자 하나 못 잡아 새로운 인생의 의미도 못 찾았으니 불행인가요? ^^;;
그래서 쉴러부인이 절 그렇게 깊게 쳐다보셨나?
근데 지금은 선생님이 절 그렇게 깊은 눈으로 쳐다보실 듯 한데요? 아님 "쓰잘 데 없이 돈낭비 하지말고 얼른 때려치우고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던지 아님 집에가서 발씻고 잠이나 자는게 신체 건강에 더 좋을거다."라고 하셨으려나요? ㅎㅎㅎ
@장승규 저는 독일 사람의 깊은 눈이 아니라 두꺼비 눈이라 절대 깊이 못들여다 봅니다요. ㅋㅋㅋ
글구 '큰돈 낸 고객', 게다가 '이혼한 젊은 남성'인데 무조건 특히 더 잘 해드려야지요. 와하하하~~
저는 고객이 소화할 만한 다른 과제를 드렸을 거예요. 이거도 교사 방법론 중에 하나예요.
덧붙이자면 저기 위에 70년대 그림 맘에 들어요. 그 당시에 미술 시간에 저런 그림 많이 그렸어요.
갑자기 요한 묵시록의 네 번째 인장이 떠오르는... ^^
장쌤의 내면 깊이 잠재하는 그리움 같은 어떤 게 저런 식으로 표현된 건 아닌가...
근데 거기 모인 사람이(독일이건, 한국이건) 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 온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중고등기간에 입시만 하는 학교생활 속에서 미술적 경험이 전혀없어서 저처럼 고등학교 미술은 뭘 하는지 그려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거고, 말씀처럼 인생에서 잠시 길을 잃고 삶이 허전해 취미로 미술을 그릴 수도 있고, 그 과정을 통해 다시 삶의 힘을 얻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제가 지금 바흐를 불고 비발디를 불면서 또 새로운 충전을 하듯이요.
물론 제가 바로크 음악 몇 곡을 불 줄 안다 해서 음악가가 되려거나 '내가 예술가'라고 뿜뿜하진 않잖아요. 그림 그리기도 마찬가지고...
만약 누군가 그런다 하면 그건 그 사람의 됨됨이가 아닐까요?(물론 그림수업에서도 그런 사람은 있었지만, 그런 사람이야 어디에나 있는 일이라서... ^^;;)
그 행위를 통해 부차적인 힘을 얻고,, 또 자신의 일을 더 잘 해가는 교육의 역할도 있는 듯해요.
선생님 예술론 책 읽으며 음악보단 특히 미술에서 더 그렇게 찾으려하는 것도 인지학(?)적 이유가 있다는 글도 기억나네요. 그에 대해 나중에 얘기하겠다 하셨는데, 슈타이너처럼 다음에 얘기한다 하고 안 해주시는 건 아니겠죠?
덧붙여 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노래부르고 그림그리고 악기연주했으면 해요. 그것이 인간의 허영을 부추기지만은 않는다면요.그러기에 어떻게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가 중요해지겠지요.
그렇다고 요즘 유행같은 1일 1그림이니 1인 1악기제 등에는 반대하지만요.(이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려면 길지만, 왠지 선생님은 이해하실듯하여...)
그렇다고 '예술이 대중화'되길 바라진 않아요.
음악의 예로 들면 클래식이 눈을 낮춰 대중화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대중들이 좀 더 고전음악을, 바로크를, 르네상스를 이해했으면 하지요.
조성진의 말처럼 '대중의 클래식화'?
오래간만에 한가한 주말 저녁, 읍내 천변에서 리코더 불다가 적어봤습니다. 역시 쓰잘데없는 일을 덜 해야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생각해 볼 여유가 생기는데 말이죠...히힛
@장승규 제가 쓴 생각에 제가 질문하게 되는데...
대중의 클래식화도 좀 문제가 많네요. 요즘 한국에 많아진, 아주 high한 예술인 오이리트미스트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라서...ㅎㅎ
무등에서도 모셨다가 헉!하고 빠2빠2했는데...
결국은 사람의 문젠가... 누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가르치는가..하는.
그러고 나니 갑자기 헷갈려집니다.
저는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제주사는 80-90 먹은 여덟 할망들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야기 '할머니의 그림수업'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빌려왔어요. 혼자 사는 할망들이 자신의 주변 물건이나(옷, 모자, 양말,농기구 등) 채소, 과일, 동물, 새 등을 그리는데 할머니들이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싶더라고요. 순박하면서 더없이 맑고 귀여워요. 할머니들은 마음속 말이 그림으로 나오니 해방감을 느낀다고 하네요.
추천사에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삶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라고 써있는데
나에게 예술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합니다. 정말 살아갈 힘을 주는가? 잘 죽어지게 하는가?
ㅎㅎ 모든 사람은 예술연습, 혹은 맘대로 놀다가 삶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 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예술의 속성에 놀이의 성격이 있긴 하지만
놀이가 예술은 아니잖아요...
@장승규 책을 봐 보니 할망들에게 그림은 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하고 그들의 삶이 묻어나네요. 다음 생의 희망이나 소망으로 이어지려나요.ㅎㅎ
@진선희(유단모) 놀이가 진지하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요, 놀이가 얼마나 진지해야 하는지 심지어는 쉴러가, 하르트비히 쉴러 말고 독일 유명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가 '인간의 미학적 교육'에 다음과 같이 썼어요. "문자 그대로 완벽한 의미에서 인간은 놀이한다. 그리고 놀이할 때만 전인이다." 사람들이 제대로 놀이할 줄 모르기 때문에 프랑스 대혁명이 유혈낭자한 복수극으로 치달았다 하면서 어떻게 해야 제대로 놀이 하는지 진쫘로 보여줍니다요. ^^
그럼 그냥 '레나테 쉴러 미술 강의'라 하면 되져, '발돌 상급 미술 과정'이라는 제목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한국에 상급있는 발돌 몇 개 되서 그런 제목으로 강의 하면서 '유사 예술가 양성 과정' 하는가, 이게 제 질문이에요.
장쌤 글을 읽어보면 그 양반이 무슨 대가나 되어서 자기 화풍을 전수한다는 식으로 가르쳤다는 자세가 역력하게 드러나잖아요.
보통 취미 그림 그리는 곳에 가봐요, 어디서 감히 '고객님'한테 핀잔 준답니까?
그리고 취미 삼아 그림 좀 그리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연습 좀 해 봤다 하면 되지,무슨 '작품은 자식과 같다'는 등으로 말한답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이른바 그 '제자'들이 열씨미들 전시하면서 예술하는 척 한답니다.
장쌤도 그러지 않았어요, 그 제자들이 이 글 읽으면 난리칠 거라고.
그런 자세가 바로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화풍을 전수받은 사람이라도 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거져.
글구 왜 인지학계에 유별나게 미술에 그렇게 매달리며 뭔가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지는, 바로 장쌤 글에서 알아볼 수 있어요,
레나테 실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거져.
제가 안드레아스 마이어 데리고 한국 나갔다면 웬 no name 인가 하고 누가 강의에 오기나 했겠어요?
후골즈촌에서도 제가 그곳 젊은이들한테 안드레아스 마이어의 "9/11을 기리며"라는 작품을 보여 주면서 그에 관해 논의하자 했더니 아무도 관심 없었어요, 그게 누구냐면서 말이져.
하르트비히 쉴러의 부인, 슈투트가르트 대학 교수, 뭐 이런 명칭이 있으니 그 사람이 어떤 작품을 했는지는 보지 않고 그 명성에 눈이 멀어 달려 드는 거를 꼬집는거예요.
저는 제가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흔쾌하게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서 배우고자 해요.
그런데 자기거는 아무 것도 없는데, 외적 명칭으로 어디가서 뭐 좀 가르치는 사람, 이른바 인지학 '전도사', 그 사람이 아무리 여기 인지학계에서 유명세를 떨친다 해도 저는 제켜둡니다. 제가 70 다 되어 가는 지금 그 정도의 눈이 없다면 인생 헛 살은거겠져.
아하! ^^
심지어 음악은 딱! 들어보면
누구나 알아먹을 수 있어서
그렇게 사기치기 어렵겠군요. ㅎㅎ
이년전 나쁜노므스키 학교가서 행성인장의 신비한 내용 듣고 구리판 두들기고 왔을때 왜 그리 얘기하셨는지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ㅎㅎ
차라리 그런 신비한 이야기를 하고 동네 철공소 아저씨만도 못한 기술로 구리접시 만드는 것보다는, 인지학 신비지식 하나 없는 동네 철공소 아저씨가 한 번 흘깃보고 행성인장을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이 어쩜 더 신비한 일이겠네요. ㅎㅎ
그러니ㅡ 예술작품으로 보여줄 것이 없으니, 작업을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 인간됨을 그리 강조했겠군요... 진짜 황홀한 예술작품을 보거나 작업한다면 태도와 자세, 마음가짐은 마법적으로 달라질텐데요. ㅎㅎ
마지막으로 쓸 쉴러부인의 그림교실 3은 안 써도 되겠습니다. 마지막 과정에서 배움이 있었다면 그건 쉴러부인이 가르친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 배운 것일 수도 있겠다 싶네요(거만함은 아닙니다).
근데 그렇게치면 이곳은 진짜 가짜공화국인걸요?
이름없고 쪼매한 곳에 있을 때는 사람도 쪼들려있다가, 이름있고 큰 곳으로 옮기면 자의식도 거대해져 자신과 속한 공간을 하나로 여기는('당신이 있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 같네요. 하하)
가짜들이 서로 함께 화목하게 어울려지내는
진짜 가짜 공화국!
@장승규 독일 가짜 인지학 공화국 속국, 혹은 지부 정도 되겠져.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조직에서 처세가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 시기하며 내치는 거 인지학계에서 숱하게 보았고, 제가 그 상황에 있어 봤기 때문에, 카렌 스바스얀Karen Swassjan의 말처럼 인지학자의 인지학이 아니라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번역을 하기 시작한 거에요.
그런데 번역을 하다 보니 인지학자들의 인지학이 슈타이너의 인지학과 얼마나 무관한지가 더욱 더 명료해지는 거지요.
인지학을 인생의 내용으로 만들었다면, 사실 괴테아눔, 인지학계, 발돌계, 이런 거 필요없어요.
달리 말해 그런 외적 기관, 명칭이 필요한 사람은 아직 인지학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지학을 자신의 인생 내용으로 만드는 데는 전집 360권 모두가 필요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까지 번역한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관건은 얼마나 집약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자신을 반추하는가, 겠지요.
어제 레나테 쉴러의 작품이 어디 한 구석에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검색을 좀 해봤더니 작품은 전혀 떠오르지 않고 저술한 책 세 권이 떠 올랐어요. 거기에 약력도 나오고, 약력 맨 마지막에 "인지학과 예술, Korea"라고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상급 미술 과정'이라는 제목은 아이라움이 선전용으로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 쉴러는 머리 속에 담아둔 인지학 인식론 전달하고, 부인 쉴러는 자기 것으로 승화되지 않은 그림 연습을 '예술'로 전달하는... 인지학 부부의 활약상.
그래서 장쌤이 설명한 그런 과정이 되었고, 마지막 학기에는 인간이 되라 뭐 그런 결론이 내려지고... ^^;;
네, 과정 시작할 땐 상급미술교육을 다룬다고 시작했다가 글에 쓴대로 시간이 지나며 예술과정으로 바뀌었어요. 그럼에도 템페라의 진행 주제는 학년에서 다뤄야 할 내용이었습니다. 마지막이 12학년으로 랜드아트를 했고요...
아마 제 기억으론 수료증에는 '예술, 그리고 교육학'으로 적혀있었네요.
아이라움 까페에 쉴러부인의 그림이 몇 점 있던데요...
https://m.cafe.daum.net/iraum/WdHt/384?svc=cafeapp
@장승규 그림 보니까 음,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한 수채화 기법이로군, 하는 생각은 드는데, 안드레아스 마이어의 연필 소묘 보았을 때처럼 '헐, 이게 뭐야!' 하며 심장 뛰는 감명은 없네요. 가운데에 네 가지 그림색 그림, 이 주제를 인지학적 예술가들이 많이 다뤄요. 그런데 이들과는 좀 다르게 해석했고, 이른바 인지학적 건식 수채화가 아니라 일반 수채화 기법을 이용했다는 차이가 있네요. 안드레아스 마이어도 이 주제로 몇 점 그렸는데, 인지학적 화풍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이었어요. 쉴러 부인의 그림은 사진이 아니라 실물을 보면 좀 다를까... 저는 그냥 수채화 잘 그렸다는 정도 이상으로는 별 느낌 없네요. ^^;;
그리고 상급은 9학년에서 흑백 소묘, 원근법, 10학년에서는 흑백 리놀륨판, 동판, 목판 등으로 흑백만 다루고, 11학년 되면 비로소 색채를 도입한다는 기본 사항이 있고, 건식 수채화든, 유화든, 템페라든, 아크릴이든, 랜드아트든 뭐를 할지는 미술교사 스스로 결정하면 되요. 그리고 조소도 미술 과목으로 따로 있어요.
제가 10학년 실습 들어가서는 한국식 수묵화 했어요. 완전히 다른 흑백 기법이라 애들이 굉장히 좋아했었어요.
@최혜경 조소는 상급과정에서 대략적으로 뭐 하나요? 지난 번에 변형 하면 좋다고 하셨는데...
구리, 돌 등 다양한 재료 만나기?
참고할 만한 책이 있나요? 그림 많은 걸로. ㅎㅎ
@장승규 이에 대해서는 언제 시간 내서 제 카페에 쓸게요.이에 관한 책은 장쌤도 아시다시피 제가 인터넷 고서점에서 마지막 남은 영어판 구입했잖아요. ^^;; 독어판 하나가 고서점에 나와 있는데 넘 비싸여. 안 그래도 제가 그걸 구입하고 영어판을 장쌤한테 보낼까 생각하는 중인데.. ^^;;
그리고 저는 11학년에서 70년대 발돌 건식 수채화 하는 거 대단히 좋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저게 뭐냐 하고 비판 많이 했었는데, 일반인한테 그림 가르치다 보니, 그 조화로운 이상한 그림이 미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도 쉽게 따라할 수 있으면서 색채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형태 변형 소조도 그런 방식 중에 하나예요, 조소에 재능 없는 사람도 기본 조형감을 체험하도록 해요. 게다가 모사할 대상이 없이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누가 잘했다 못했다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12학년에 이태리 가서 석조 하는데, 한국에서는 어려우니 목조 하면 됩니다. 이미 중등부 작업 시간에 나무로 숟가락, 그릇 등을 만들어보는 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