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에서 반계선생 유적지로 여정을 고쳤다
반계선생은 유형원을 말한다
본관은 문화. 자는 덕부, 호는 반계. 아버지는 예문관검열 유흠이고, 어머니는 우참찬 이지완의 딸이다. 처는 부사 심은의 딸이다. 이원진·김세렴(金世濂)에게 사사했다. 2세 때 아버지 유흠이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다.
그렇게 북적되던 인파는 이곳에 오니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듯 완전 인적 제로이다
말로는 실사구시니 조선 민중을 위해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국가를 재조하려 했다며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극찬하고 있으나 이에 관심있는 이들은 현 장소 사정만큼 겨우 한마리 개미 오줌만큼도 안 되는 듯 싶다
사람이 없어서인지 처도 올라가길 꺼리는데 겨우 의미를 곱씹어 이야기해서 서당 발치까지 오르게 하였으나 이내 나만 두고 내려온다
데크길은 관리를 하는지 언제 조성하였는지 바닥 나무가 뒤틀려 지압용 길로 쓰기엔 적당했다
반계 선생은 1653년(효종 4) 가족과 함께 선대의 사패지지인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으로 이주했다. 1654년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뒤 고금의 전적 1만여 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악습을 제거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는 실학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따라서 종래에 소홀히 되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어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치·경제 문제의 연구에 힘썼으며, 국방을 위해 군사학도 연구했다.
인적이 느껴지면 떠드는 컴퓨터 방송음만이 적막한 산속에서 벌 윙윙대듯 울어댄다
그의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기호남인을 통하여 계승되어, 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의 실학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반계선생도 바라보았을 줄포만 및 곰소갯벌이 먼발치 아득히 보인다
1653년 평생을 마칠 계획으로 부안으로 낙향한 반계 선생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리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하며 살아야겠네
이후 부안 우반동 변산의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성리학과 실학 사상 연구와 농업,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 등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32세에서 49세까지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사색당파 북인이었던 아버지 유흠이 반계선생 2세때 유몽인옥사로 장살당하자 5세 때부터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을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원진은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었던 사람이다. 이원진과 절친이자 유형원의 대고모부인 김세렴은 최초 동인을 만들어낸 김효원의 손자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감사를 역임했고, 대사헌까지 지낸 당대의 이름 높은 외교관이기도 했다.
선생은 1648년 2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지냈다.
그 뒤 1654(효종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효종 때 북인계 인사들을 발탁, 등용하던 남인4선생인 허목,윤휴의 천거 등 관직에 나갈수 있는 주변의 배경이 있었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이후 남인 실학자의 첫 세대 인사 중의 한사람이 된다.
이후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고사 및 외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 유형원의 명성이 얼마 동안은 세상에 묻혀 있다가, 100년 뒤에 와서야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국왕(영조)도 관심을 가져 초고(草稿)를 직접 읽어보고 크게 칭찬함과 동시에 인쇄해 세상에 널리 반포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그 당시 반계수록 반포에 우리 약산 오광운 선조의 역할이 어느정도 차지한다.
약산 오광운(吳光運)선조는 반계수록의 서문을 지은 바 있고 그의 일대기인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오광운 선조는 "우리나라 같은 조그마한 나라를 위해서 설계했지만 그 범위가 넓고 커서 실제로 천하 만세에 유용한 책이다"라고 찬양하였다.
서당 근처에는 그 당시 반계선생이 파고 사용했음직한 우물이 3개 남아있다
반계학문의 충실한 후계자는 누가 뭐라 해도 성호 이익 선생이다. 성호선생과는 고종형으로 사촌이었으나 나이차이가 거의 60이 되어 생전에 보지는 못했다. 성호선생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당대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으로 역사 이래 두 사람을 꼽는다면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이라고 확언을 했다. 세상을 경륜할 능력의 소유자도 율곡과 반계를 꼽은 성호의 주장은 옳았다. 그래서 성호는 "조선을 세운 이래로 세상을 경륜할 인재로 말하면 모두가 반계를 첫머리로 꼽는다"라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서당 왼쪽으로 돌아가면 최초 반계선생 묘가 조성되어 있다
반계 선생의 묘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있지만 예전 이 곳에 처음 묻히셨던듯 하다
가묘라 그런지 크게 볼품있게 조성되어 있진 않았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부민(富民)·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작지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원의 최대 목표는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육성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 경제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즉, 유형원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과 균전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북쪽으로 200여 미터 이동하면 반계선생 고택지가 나온다
사진은 고택지 옆 우물이다 당시 사용한3개의 우물 중 하나로 가장 큰 우물이다
그 밖에도 반계선생은 병농일치의 군사 제도, 즉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원래 유형원이 주장한 균전제와 부병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중시한 제도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확립시키기 위해 세제와 녹봉제의 정비도 주장하였다. 세제는 조(租)와 공물(貢物)을 합쳐 경세(經稅)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며, 경세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운을 건 과감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유형원의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유형원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안정복(安鼎福) 등으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게 하였다.
모내기가 가까와서인지 고택지 앞 논에는 물이 풍부하다 물은 마음의 풍요를 가져다 준다 물에서 우리 생물이 나오고 생존의 필수 요소가 되고 먹이가 나오니 당연히 넉넉한 물을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이곳엔 곳곳에서 작약꽃(함박꽃) 군락지가 보인다
작약꽃의 꽃말이 수줍음인데 반계선생이 커다란 이상세계를 꿈꾸고 또 현실화할 수 있었지만 이 우반동 작은 골짜기에서 수줍게 조용히 살다 가신 그 모습과 매치되어 더욱 소담스럽다
반계선생 사상은 나중에 정조에게도 영향을 주어 수원화성을 건립하는데 중요한 한 축의 명분을 만들게 하였고 후계자 정약용이 실천으로 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