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청 신우회 수요예배 메시지
일자: 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로뎀 나무 아래서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열왕기상 19:4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86760/episodes/24659571?ucode=L-DuGGQwYB
1. 로뎀 나무 아래에 누운 엘리야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조상들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전에는 달리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에게 앞으로 몇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자기 이름의 뜻대로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온 백성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년 반이 지나 갈멜산에서 일전을 치렀습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비가 내리게도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 하늘이 열리고 세상은 바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자신의 기대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그 나라의 왕비 이세벨은 전혀 미동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엘리야의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산 위에서 부르짖은 백성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온 세상이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겠구나 라고 엘리야는 기대했겠지만 현실에서 이세벨은 24시간 안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합니다.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 일을 했는데, 그렇게 헌신을 했고 노력을 기울였는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엘리야는 절망했습니다. 이게 뭔 일이란 말인가! 그가 기대하던 모습은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환과 함께 달아났습니다. 왕비의 세력이 미치는 행정구역의 끝까지 달아났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나라 밖으로 벗어납니다. 여기서 사환을 머물게 하고 엘리야는 하룻길을 더 광야로 들어갑니다. 아마 더 이상 갈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날씨는 덥고 힘은 빠져서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의 그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이제 그만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지금 낙심하여 쓰러진 곳은 로뎀 나무 아래였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지금 절망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2. 사람은 실망하는 존재다!
사람은 실망하는 존재입니다. 만약에 실망하지도 않고 좌절하지도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실망은 기대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예측했다면 사람은 놀라지도 않을 것이며 실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대하고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어떤 결실과 반응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따라서 기쁨이 생기기도 하고 좌절의 고통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망은 기대의 이면입니다. 어떤 것을 기대하지 않은 사람은 실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하지요. 그 말은 우리의 실망은 기대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망이 두려워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기대하지 않는다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보람이 있을까요? 인간은 기대하고 바라보고 소망하며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좀더 나은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반드시 실망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누구나 죽듯이 누구나 실망하는 것이라고 해서 실망 그 자체가 우리를 덜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망은 마음에 이미 상처를 입힙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말합니다(잠언 13:12):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개역개정)
희망이 끊어지면 마음이 병들고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생기가 솟는다.
(공동번역 개정판)
사람이 실망하여 마음이 병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엘리야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3. 실망한 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은 죽여 달라고 하소연하는 엘리야를 어떻게 돌보시나요? 죽여 달라는 말은 사실은 날 좀 봐 달라는 애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논쟁을 벌이지 않으십니다. 그저 자고 먹고 또 자고 먹을 수 있게 천사를 보내십니다. 천사는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일어나 먹으라고 음식을 권합니다. 엘리야의 머리맡에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병이 있었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른 엘리야는 그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고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천사가 곁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엘리야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면서 어머니처럼 그를 깨우며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정신이 돌아옵니다. 충분히 쉬고 잘 먹게 한 다음에 하나님의 천사는 그가 가야 할 곳을 알려줍니다. 그 길은 멀기 때문에 힘을 내야 한다고 격려해 줍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40주야를 걸어서 하나님의 산에 올라갑니다. 아마 천사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산으로 가라고 권면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 천사를 엘리야에게 보내시면서 그를 돌보고 나서 정신이 들면 그를 하나님의 산으로 가라고 말해주라고 일러주셨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잘 쉬고 먹은 후에 기운을 차리자 이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40일이 걸려서 하나님의 산에 올라갑니다. 성경에서 40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기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또 점검했습니다. 전에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간 40일의 기간은 산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계속 신뢰할 것인 것 아니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시험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40일의 시간을 승리로 마감하셨지만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광란의 축제를 벌입니다. 그들은 시험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아마 엘리야도 40일 동안 하나님의 산에 오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뵙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을 되돌아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한 일과 마음가짐을 반성할 수도 있고요, 이세벨과 아합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40일의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하나님의 산에 도착했습니다.
4. 하나님이 계시는 곳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았습니다. 그 바람은 바위를 깨트릴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지진으로 온 땅이 흔들렸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금방 꺼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횃불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바로 그 자리에 계심을 의미하는 상징들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강한 바람이 불고 땅이 진동하며 불이 보입니다. 모세도 그랬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하나님을 뵐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현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강한 바람이 바위를 깨뜨리고 강력한 지진이 땅을 진동하며 횃불이 나타났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 속에도, 지진의 현상 속에도,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으로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하십니까? 그 방법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왜 그 길을 가야 하는지를 하나님이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말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이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자신의 뜻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낙심하지 않으며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든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기 계시는데 내가 왜 흔들리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왔는데 강한 바람 속에도 주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으시며, 지진과 횃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 그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고요 속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고요 속에 계십니다. 분주한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너무 바쁘면 망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는 한자로 바쁠 망(忙)자를 소개하면서 마음이 망한 상태를 바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쁜 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5. 다시 하나님과 함께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때 엘리야는 자기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두 사람을 만나라고 명하십니다. 한 사람은 왕이 될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선지자가 될 사람입니다. 그 둘 다 하나님의 심판에 도구로 쓰임 받을 일꾼들입니다.
그 심판은 엘리야의 고민에 대한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마침내 이루어지게 됩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을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에서 깨닫습니다. 엘리야는 어쩌면 자신이 그 열매를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다릅니다.
모든 식물과 화초는 각각 피는 시기가 있고 결실의 계절이 다르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조금 천천히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너무 바쁘지 않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사도 야고보는 말했습니다(약 5:17).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 엘리야는 기대했고 좌절했으며 포기하겠다고 애원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대하고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휴식과 양식을 제공하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엘리야처럼 바알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신실한 사람 칠천명을 남겨 두었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인생의 마지막까지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