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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 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샬롬!
제 13 장 뱀에게 흙을 먹어라, 잉태의 고통을 크게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창3:13-16:20)
오늘 말씀은 앞의 말씀과 이어집니다. 깨닫는 말씀으로 받아 참된 믿음이 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요6:44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65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고 오게 하여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6:45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셔서 곧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것임을 말합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것은 곧 구약의 말씀을 말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사건들과 또 율법 속에
넣으신 뜻(예수님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을 잘 배우고 그 믿음이 되는 것이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잘 듣고 배워 예수님께 온전히 들어가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어떤 것도 걸리는 것 없이 연합된 관계, 확신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저는 또 강조합니다.
지난번에 13절 말씀까지 듣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물으시니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담과 여자에게 사실을 직고해 받은 하나님께서는
뱀에게는 질문도 할 필요도 없이 14절에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더욱 저주를 받아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뱀에게 직접 저주를 선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뱀을 저주하신 것 같지만
저주하신 것이 아니에요.
사단은 사람이 창조 되기 전에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과 탐욕을 가지고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범하여
스스로가 저주를 가진 흑암에 갇힌 저주의 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느냐? 용서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단 스스로가 그 교만함을 자기의 것으로
하였으므로써 사단에겐 용서라는 단어가 해당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단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여러분께 그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한 이 말은 사실 제가 하나님에 대하여
크게 잘못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난 이후부터 저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는
느낌 같은 것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전한 이 창세기 말씀을 다시 살펴보던 중에 이젠
느낌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단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사단이 스스로 저주를 가진 악한영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이 기회를 통해 사단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저주를 가진 영이 되었다는 것을 정정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아셨습니까?
그런데 사단이 뱀의 간교함을 이용하여 자기의 속성인 속임으로 사람을 유혹하였으므로 그래서 들짐승
중에 뱀이 사단의 저주를 가진 짐승이 되었다, 사단의 간교함과 동격(사단의 속성과 같은 저주에 속한 짐승)
이 되었음을 그 같이 저주를 받아 하신 것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제 사단이 뱀과 같은 간교함으로
사람을 속여 묶을 것이요, 자기 존재를 뱀의 형상으로 나타내고 섬김을 받으며 지배하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십시오, 하나님은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저주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저주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지 하나님은 누구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뱀에게 저주를 받아 한 것은 저주받은
사단과 함께 동격이요 동질인 짐승이요, 그러므로 이제 사단이 짐승의 영이 되었음을 선고하신 것이요,
사단의 정체를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은 어떤 존재냐, 바로 뱀과 같은 존재다.
용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뱀을 통해, 용을 통해 사단의 정체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단은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저주를 가진 영인데 여러분이 이 부분도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하신 것 아니에요,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자꾸 첫 사람이 선악과 먹는 죄를 범했으므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그런
엄청난 거짓된 말로 실언을 하는데 만일에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면 그것은 하나님과 완전히
끝장난 것이 되어서 사람은 사단이요, 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하시기 위해 지으신 것
아닙니다. 죄지었을지라도 죄에서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이시지 저주하시기 위해 지으신 것 아닙니다.
인간이 사단의 저주를 받아들여 따라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또한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은
뱀까지도 저주하신 것 아니에요. 그 저주가 사단으로부터 왔다는 것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단이 자기 존재를 형상으로 드러내 준 것이 바로 뱀이요, 용입니다. 그 뱀에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즉 여자를 꾀어 선악과를 먹는 죄를 짓게 하였으니,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하셨습니다.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뱀이 자기 간교함으로 사단과
뜻을 같이 하여 하등 짐승이 사람을 속여 죄짓게 하였으므로 저주의 영인 사단의 저주가 뱀에게도 적용
되어서 이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얻을 모든 인류와 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짐승 중에서도
가장 간교한 뱀이 땅의 짐승의 대표가 되어서 악한 일에 쓰였으므로 이제 모든 육축이나 들의 모든 짐승도
악에 쓰일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하늘과 바다와 육지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통치권을 주셨는데 다스려야 할 짐승에게 오히려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다스리는
통치권을 짐승의 영인 사단에게 넘겨준 것이 돼 버렸습니다. 사단은 땅에 내려온 짐승의 영입니다. 짐승의
영! 그러므로 계시록에서는 계시록 뿐 아니라 성경 전체 속에서도 사단과 그 악의 영들과 이것들에 종노릇
하는 인간을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이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진 짐승의 영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마음을 미혹하여 짐승으로 살도록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한 사람을 육의 본능만 있는 짐승처럼 살게 하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
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오로지 육의 본능(육체와 정신)의 것만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이요, 사단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한, 사단의 무리인 악한 영들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자연 만물을 신격화하여 절하고 섬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짐승을 섬기고 절하게 하는 것에 그 마음이 미혹되어서 짐승의 말을 듣고 따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지각이 있어 눈을 열어본다면 전 세계의 샤머니즘이나 종교들이 다
사단에게 속해 있음을 분명히 그리고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했을 때는 속을 수도
있지만,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지 하늘의 복음을 들으면서도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겁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천지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창조된 인간이 죄 가운데 빠져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건져 구원해주신 구주시라는 복음을 전해주어도
돌이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자기가 원하는 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했습니다. 복음
앞에서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그대로 버려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복음이 없을 때는 속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인간의 영혼에 새겨 놓았기에, 그 영에 하나님을 사모하도록
새겨 놓았기에 복음의 빛을 받으면 영의 동(動)함이 일어나 빛을 따라오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같이
하나님을 알게 하신 빛의 복음 앞에서도 마음을 굳게 하여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악을 사랑하는
자라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니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빛으로 오지 않는
자는 자기 행위가 악하여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그래서 빛을 미워하므로 오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배로 다니고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뱀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을 때부터 배로 다니는
짐승입니다. 걸어다녔는데 하나님께서 '배로 다니고'라고 하셔서 배로 다니게 된 것이 아닙니다. '뱀이
다리가 달린 짐승으로 창조 되었는데 여자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벌로 뱀에게
배로 다니라고 해서 다리가 없어졌구나, 뱀이 배로 다니는 것은 벌 받아서 그런 것이구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배로 다니고'하신 것은 뱀의 습성을 말씀하시면서 그 배후에 함께하고 있는 사단이
어떤 존재인지, 짐승의 영인 사단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드러내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짐승을 좋아하고 사랑하렵니까? 그것은 아니라는 것 분명히 알겠지요? 짐승은 짐승의 격이 있고
사람은 사람의 격이 있습니다. 분명히 짐승과 사람은 구분 돼야 합니다. 오늘날 집집마다 짐승이 각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짐승이 주인 노릇하고 사람이 전부 다 짐승화가 되고 짐승에게 지배받고 있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짐승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하여 한 방에서 함께 살면서 형제요 자매요 자식
이요 혈통 관계처럼 되고 그 집안이 울고 웃게 하는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믿는다 하면서도
짐승을 좋아하고 이런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이면 이렇게 말하는 나를 적으로 알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반발심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빛에 거하기 원하는 자면 자신의 무지하고 더러운 행위들에 충격을
받고, 어둠에서 벌떡 일어나서 깨끗이 하고 회개할 것입니다. 만일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짐승과 이런
누추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면 가정에 문제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우환이 침범해 들어와 그 가정에서
기거하며 악한 병들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악의 영들은 짐승을 통해 역사하는 짐승의 영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배로 다닌다는 것은 첫째 '속이는 자'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자기 정체를 숨긴다'는 말입니다.
'배로 다니고'가 무슨 말입니까? 배가 바닥에 밀착되어 기어 다니니 배가 보이지 않잖아요? 배를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사단의 속성입니다. 사단은 자신이 속이는 자라는 자기 정체를 숨깁니다. 뱀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처럼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독을 품고 있는
짐승입니다. 입속에 독을 품고 있다가 순식간에 물어 해를 끼칩니다. 이처럼 사단이 자기 정체를 감추고
인간을 속이는데 뱀처럼 인간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독을 품은 짐승의 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속이는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첫째는 사람을 사망으로 끌고 가는 자기
정체를 숨깁니다. 둘째는 사람에게 저주를 가져다준 존재, 저주를 내린 존재임을 숨깁니다. 사람들에게 그
정체를 숨기고, 짐승을 따르고 섬기게 하고, 자연 만물을 신처럼 섬기게 하고, 형상을 만들고 온갖 것으로
우상이 되게 하고, 온갖 종교들을 만들어 섬기게 함으로써 복을 받고 죽은 뒤에 좋은 곳으로 가는 것처럼
속인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인간에게 자연 만물을 형상화하고 신격화 하여 섬기게 함으로써 배후에 역사하는
악의 영들이 섬김을 받고 저주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지게 하는 자기의 정체를 숨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밑에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실과를 네가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하셨잖습니까? 땅이 아담으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여러분, 저주의 원흉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통치의 권한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그 권한이 사단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저주의 원흉인 사단이 주인 노릇하는 땅이 되어 자연
만물을 지배하고 섬김을 받는 이용물로 삼게 되어 자연 만물도 타락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땅의 물질을 좇으면 그것은 사단을 주인으로 하는 육으로써 예수님과
관계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라는 말입니다. 또한,
사단이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삶의 목적이 되게 하고 그것이
믿는 자가 받을 복인 것처럼 속임을 베풀어 생각을 땅의 것에 집중하게 합니다. 세상을 좋아하게 합니다.
예수님과 관계된 믿음이 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단의
존재와 이와 같은 사단의 일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으로 드러내주시고 속지 말라는 것을 계속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좇아가지 말라는 것을 창조를 통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했습니다. 종신토록은 '네가 존재하는 날까지 흙을 양식으로 삼아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흙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대로 뱀이 흙을 먹습니까? 뱀의 양식이 정말 흙이라는
말입니까? 뱀이 먹는 음식이 흙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다 아는 것입니다. 뱀은 육식동물입니다. 쥐나
개구리 두더지 새 등등을 잡아먹습니다. 뱀은 자기 몸보다 더 큰 것도 먹을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모든 동물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습니까? 흙입니다. 그걸 말씀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된 것을
양식으로 먹으라'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뱀에게 이르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뱀에게 '너 흙을
먹으라' 말씀하시지 않아도 이미 뱀의 양식은 흙에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뱀이 흙에서 난
것을 양식 삼아 먹는 것처럼 이제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자기가 세상을 선택한 것이 되었으니 그것은 흙밖에 되지 않는 짐승과 일반이니 사단의
소유가 되는 것임을 공식화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자유 의지)할 권리를 가지고, 육의 것만을 위해 사는 것을 택했다면 그것은 흙밖에
되지 않는 악의 길을 택한 것이므로, 사단에게 먹히는 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육의 것에서
돌이켜 선의 길을 택했다면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사람으로 영생으로 들게 될 것임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선악과에서 선은 뭐냐?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요, 악은 뭐냐? 사단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따를 것이냐, 사단을 따를 것이냐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바로
사람에겐 하나님을 따르는 영의 길, 사단을 따르는 육의 길, 두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의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육의 본능이 원하는 것을 위해 믿는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흙으로 된 육체만을 위해 사는 자,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영혼에 관심 없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믿는다고 하는 자, 다 하나님과 관계 없는 것이므로
사단이 양식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핑계치 못한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말씀을 존중하고 사랑해서 따르지 않으면, 사단의 영들이
자신의 권리로 그와 그의 삶을 사단의 저주로 묶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사단은 저주받은
짐승의 영이요, 비인격적인 존재요, 뱀과 같은 존재요, 감추고 속이는 자요, 저주를 끼치는 악한 자요,
사망으로 끌고 가는 독을 품은 짐승의 영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으니 모든 인간은 사단에게 속하지 말고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 주심으로써 사단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다음 15절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의 영에 생명의 언약을 새겨 넣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죽으러 오심에 대한 언약을 넣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앞에서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얻을 신앙,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그 속에 넣으신 신앙을 말합니다.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한 여자의 후손, 즉 신앙에서 나오는 후손이 있는데 그 후손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앙의 계보 속에서 태어나실 것에 대한 예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 '여자의 후손'하신 이 여자를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만 말하는 것인 줄 알고 마리아만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 이지만 마리아라는 그 한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통에
죄를 유전시킬 수 없는 하와(여자, 신앙)가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생명을 생산하는 어미요, 그 어미로부터
'여자의 후손'의 언약이 신앙이 산 자에게로 또 산 자에게로 이어지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의
신앙이 산 자의 줄기에서 생명을 생산할 여자가 나온 것, 바로 그 신앙의 줄기에서 나온 이 신앙이 중요한
것임을 말합니다. 생명을 생산할 신앙이 산 여자에게 성영님으로 잉태되어 나셨다는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4장에 율법(계대 혼인법) 아래에서 생명을 얻기를, 생명을 보기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 생명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율법으로는 생명 얻지 못한다,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옳다' 그 남편에게는 생명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바로 예수님 자신이 여자가
소망하던 생명을 주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고, 이제 아버지(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예배, 산 자의
예배를 찾고 받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신약시대의 예배에 대한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넣으신 메시아의 언약을 가진 신앙,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도록 하는 사명, 그 사명을 가지고 죄를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기다린 이스라엘의 신앙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통이 아닌 그 신앙이 산 여자에게서 나시는
것까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알아듣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여자라고 하셨는가? 바로 예수님은 사람의 혈통에서 나시지 않는다는
것 남자의 혈통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고 맞이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그 신앙이 있음이 산 자요, 생명을 생산할 여자로 비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여자로 비유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5,16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라고 사단과 여자에게 이르시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아담이 듣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뭐라고 불렀다 했습니까? 20절에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 또는 '하나님께로 오는 생명의 씨를 가진 여자, 생명을 주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산 자의 어머니여''생명을 주는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자로 지음 받았고 그의 통찰력은 대단히 뛰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다스리라는 통치권을 위임하신 뒤, 들의 모든 짐승, 공중의 각종 새,
모든 육축,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그 모양새와 성격에 맞는 아주 적절한
이름들을 붙여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때 아담이 발견한 것은 모든 동물이 암수로 짝을 이뤄 생산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도 자기에게 맞는 짝이 있기를 소망하게 하신
뜻입니다. 그 소망을 품은 아담을 하나님께서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아담과
똑같은 사람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주셨을 때 아담이 곧 후손의 생산과 생육을 돕는 배필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아담 자신은 남자요, 자기의 몸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라고 아담이 칭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아담 자신은 남자, 즉 씨를 주는 것이고- 이것은 남자의 뜻이에요.
'남자'하는 것이 씨를 가졌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몸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 즉 씨를 받아서
똑같은 형체의 사람을 내놓는 역할임을 직감으로 알게 되어서 그 뜻을 가진 '여자'라고 칭한 것입니다.
자기는 '남자' 자기 몸에서 나온 사람은 '여자'라 칭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뜻이 남자는 '씨'라는
말이고 여자는 '밭과 같다' '바구니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것을 영의 직감으로 알고 남자,
여자라고 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통에 죄를 유전시켜 주는 것이 씨 입니까? 밭 입니까? 씨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인간 혈통의 씨, 남자의 씨가 아니라도 하나님 안에 계시던 인성의 생명이
성영님으로 잉태되어 여자의 후손이신 죄 없는 육체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요, 그렇다고 여기서
잉태되신 예수님이 여자의 피를 받았다고 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여자의 피도 죄의 피입니다. 여자의 피를
받았다면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영으로 잉태되어 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신앙을 가진 처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심이 증명이 되었고 구주이심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여자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의 사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하는
것이요, 그것은 여자에게서 이루실 것이요, 그래서 신앙을 '여자'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었습니까?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신 대로 선악과를 먹자 곧바로
자기가 보는 눈이 열려 벗었다는 것이 보였고 이내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벗은 자기 모습은 곧
흙인 육체뿐임을 직감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담에게 19절의 말씀으로 본질을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너는 흙이니 흙에서 나는 식물을 얻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한 가운데 그 흙의 기운이 다하면
흙으로 들어간다' 다시 말해 육의 자아( 자기 본위)가 된 너희가 이제 그 육의 본위로 산다면 육체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기 본위로 사는 자의 영혼도 똑같이 영이 두려워하는 그 죽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하신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가진 아담에게 그 두려움에서 건지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하시는 계시의
말씀을 듣고, 여기서 아담이 알게 된 것이 '아하! 선악과 먹도록 유혹한 뱀의 머리를(히브리어도 헬라어도
똑같이 머리는 권세, 주인, 임금이란 뜻), 뱀의 권세를 깨실 후손이 자기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에게서
난다는 것이구나, 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깬다는 것이구나'하고 알아들은 겁니다. 이것을 알아들은
아담이 자기에게서 나온 여자에게 '생명을 주는 산 자의 어미'라는 이름, '하와'라 부른 것입니다.
여자도 선악과 인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하신
말씀을 어겼으므로, 똑같이 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혈통에 죄를 유전시킬 수 없는 밭과 같은
것이기에, 아담이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여자에게서 빈껍데기(흙)인 자기에게 생명을 넣어
주실 후손(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부른 하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라 하는 것은 소생이 있을 때 어미라는 호칭을 붙듯이, 하와가 후손(생명)이 오시게
하는 어미로서 그 생명(예수 그리스도)이 오실 때까지 그 신앙이 산 자를 낳고, 또 산 자를 낳고 하는 일이
계속 존속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산 자'다 하니까 숨 쉬고 있는 모든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을 영혼에 가지고 그 후손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신앙을 말합니다. 죄가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혈통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여자에게서 나실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죄를 혈통 속에 가졌고 죽음 아래 있지만 하나님을 신앙하여
경외하며 바라고 섬기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신앙이요, 죄와 죽음에 속하지 않은 산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창조 때의 이 신앙의 뚯을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면
영적사람은 세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15,16절의 말씀을 아담만 들었습니까? 15절은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선고하시면서 우리에게는
구원에 대한 언약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단에게 선고하신 것은 사단이 들었잖습니까? '여자의 후손이 와서
네 머리를 깰 것이다, 상하게 할 것이다'하니 사단이 자기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 될 만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혈안이 되어 죽이려고 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는 것이지 않습니까? 가인을 사주하여
아벨을 죽였잖아요. 혹시 아벨이 여자의 후손이 아닌가 하여 가인에게 죽이도록 했잖습니까?
모세가 태어났을 때 바로왕이 여자아이는 살리고 남자아이는 다 죽이라고 산파에게 명령했잖아요? 그런데
모세 어머니 요게벳이 산 자로 존속된 여자, 하나님의 신의 감동을 받는 여자이기 때문에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웠는데 애굽의 아기 못 낳는 공주가 건져다가 자기의 아기로 삼아서 키워내
잖아요? 키워내는데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게 젖을 물리게 하셨잖습니까? 그 젖 먹이 아이에게 어머니가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너는 히브리 족속이다, 너는 애굽 족속이 아니다, 애굽의 바로 족속이 아니고
히브리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 신앙을 가져야 하는 후손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아기에게 젓 먹이는
동안에도 신앙을 심어준 것입니다. 젖을 뗀 후에도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가 자기의 뿌리를 알도록 은밀한
가르침을 주면서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여자의 후손을 없애기 위해 이스라엘을 그처럼 무너지게
하려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계속 행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도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다고, 왕이 태어나신 별을 보고 왔다 하니
헤롯왕이 듣고 자기 왕권을 노리는 자가 태어난 것인 줄 알고 왕의 자리 빼앗길까 두려워 두살 아래 남자
아이는 다 죽이라고 비밀리에 군대를 풀었잖습니까? 여자의 후손이 될 만한 사람이 나오면 그렇게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인데 그러면 예수님 계실 당시의 사단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바로 대제사장 바리새인
율법사 사두개인 서기관 이들이 사단의 후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유대사회 전반에 걸쳐서 요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 사단의 후손이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다시 살아나셨으니 예수님의
상하심은 발꿈치 정도일 뿐이고 사단은, 믿는 자에게는 사망 권세를 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머리가 상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은 자를 사단이 사망으로 끌고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리니 하셨으니 사단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넣으신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가진 민족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해를 끼쳤는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고 알 수
있잖습니까? 이스라엘 신앙의 예표로 세운 욥을 통해서 이스라엘 신앙 형편을 알게 되었잖아요? 예수님
께서 오셔서 사단의 머리, 즉 사망 권세로 세상 임금이 되어 사람을 사망으로 끌고 가던 것을 완전히
깨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과 혼과 육, 삶에 모셔 들여 예수님과 사는 자는 사단이 참소할
수도, 사망으로 끌고 갈 수도 없게 돼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영의 죄뿐만 아니라 살면서
지은 모든 죄까지도 다 씻어주신 피가 되었으니 사단이 참소할 근거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사단이 참소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잖아요? 어쩌다 실수해서 지은 죄, 죄짓는 것
원치 않음에도 혹 어찌할 수 없어 지은 죄가 있을 땐 고백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 죄도 씻어버린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자유한 것입니다. 사단이 '야! 예수님 믿고 하나님 자녀라면서 거룩한 성도라면서 죄짓느냐?
너는 죄인이다'하고 나올 때 우리는 '죄를 사하신 예수님의 피가 내게 증거로 있으니 네가 나를 참소할
근거가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물러가라'고 명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영적 지식을 가진 믿음이 되지 못하니 그냥 자기 방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이 되어서
믿음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 속에 구주이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인간 세상에 오시게 되었는지 창세기에서 보이신 이 같은 가르침을 잘 듣고 깨달아 지식을 따라 믿는
믿음으로 능력을 갖추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16절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잉태하는 고통과 수고하고 자식을 낳는다는 이 말씀을 가지고 또 어떻게
전하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사단이 가려 놓은 눈을 가지고 잉태하는 고통을 인간 육체에 결부시켜서 해산의
고통이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가려 놓은 눈을 가지고 육의 눈만 가지고, 이 첫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사단의 관계를 알 수 있도록 보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뜻을 하나님과 어긋난 것들로 변질
시켜 왜곡되게 하여 열심히 전하는 겁니다. 사단이 볼 수 없도록 가리고 막는 것에 열심히 속고, 자신이 속은
것을 또 속도록 속이는 말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잉태와 해산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릅니다. 잉태라는 것은 임신이 되었다는 말이고 해산은 낳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잉태되었다고 해서 그때 고통을 겪습니까? 저도 아이 낳아 보았기 때문에 압니다. 아이를
잉태했을 때는, 여자들이 아기 낳을 때 겪는 그런 고통은 겪지 않고, 고통을 겪는다면 낳을 때 산통을 겪는
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라고 말씀한 것이니
'아, 이상하다 잉태했을 때는 고통이 없는데? 아! 해산할 때 산통 겪는 것 아기 낳을 때 산통 겪는 것을
가지고 잉태하는 고통이라 했는가 보구나! 해산의 고통, 맞아! 해산할 때 고통 겪지' 이런 식으로 잉태하는
고통에다 갖다 붙여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설교들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죄를 깨달을 수가
있겠으며 그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겠으며, 영적인 생명을 깨달을 수 있겠으며 하늘의
생명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자가 아기 낳을 때 산통을 겪는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인간은 '인간이 죄 안 지었을 때는 아기 낳을 때 조금 아팠는데 죄를 지어서 아기 낳는 고통을
크게 더하게 했다'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말장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죄짓기 전이나 죄지은
후나 상관없이 아기 낳을 때 우리는 산통은 겪습니다. 육체는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산통을 겪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따위 것들을 말하기 위해서 잉태하는 고통이라 하신 것 아니고 잉태하는 고통이란 바로 영적
고통을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선악의 실과를 먹은 것은 영적 죄가 되었고 죽음이 들어왔으니 이제
자녀를 생산하는 데 잉태된 자녀에게 죄를 유전케 하는 것이 고통이더란 말입니다. 죄를 유전하여 낳아야
하는 고통, 죄가 그대로 잉태된 자녀 속에 유전되어서 또 죄인으로 태어나야 하는 그것이 인간 속에 들어온
잉태하는 고통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넣은 그 영의 소원은 빛이고 생명인데 죄요 두려움으로
감싸고 있으니 영에 유전되는 그것이 영이 겪는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식을 낳으면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죄를 유전하는 영적인 고통, 곧 죄인이 죄인을
낳으니 부정하다 해서 자녀를 낳을 때마다 남아는 부정 기간이 7일이었고 성전에 가기까지는 33일이었고,
여아는 66일이 걸렸는데 부정한 기간에는 성전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보다 정결 기간이
배가 되는 것 가지고 사람들이 또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여자가 선악과 따 먹고 남편에게 준 죄가 커서
그렇게 부정한 기간이 긴 것이고, 남편에게 죄짓게 해서 그렇다, 그래서 아주 여자가 문제다 문제!'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기 수준, 인본주의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성경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만일에
선악과 먹은 그 죄질, 죄의 무게를 하나님께서 정말로 따지신다면? 사실은 하나님께 직접 들은 아담이
더 큰 것입니다. 여자보다 아담의 더 크다는 말입니다. 여자에게는 사단의 유혹이 있었지만, 아담은 자기
의지로 먹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죄질을 따지신다면 직접 들은 아담이 더 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가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를 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질을 따지신 것이 아니예요. 정결
기간이 남아보다 여아가 더 긴 것은 바로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감당
해야 했기에 구속의 정결 기간(인간 육은 죽음에 내줘야 한다는 의미)이 배가 더한 연단의 기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 남자아이는 아담이요, 아담은 예수님의 예표요, 여자 아이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예표한 아담도, 신앙을 예표한 여자도 정결례를 거쳐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남자 아이는 정결 기간이 하나님의 수를 의미하는 33일
이었고 여자 아이는 인간의 수를 의미하는 66일이 정결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바로 반드시
피 흘리실 예수님의 상징인 어린양을 잡아서 성전에 나가 부정을 벗기는 속죄제를 드려야 했어요.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자(신앙)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있는데 또 그 위에 가중된 고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이 이중의 고통임을 말씀합니다.
고통 위에 고통이 있다는 말씀이에요. 후손에게 죄를 유전하는 것과 그 위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시기 위한 고통임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성전 건축과 율법과
모든 율법의 규례를 지키고, 흠 없는 소나 양을 잡아 피 흘리는 제사 등의 끊임없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말로만 듣는 여러분은 실감이 없지만 죄를 범한 자가 자기 손으로 직접 짐승을 잡아서 죽이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소나 양을 죽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느냐는 말입니다. 피 흘려서 제사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큰 과제였는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여러분이 욥기를 통해서 사단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무너지게 하려는 것들과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던 그 고난의 고통들을 들었잖아요? 후손이 될 만한 아이가 태어날 것 같으면 다 죽였고 또
얼마나 많은 선지자와 의인, 즉 산 자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엄청난 고통이
었습니다. 죄의 유전으로 겪는 그 영적 고통의 수고와 예수님을 낳아야 하는 그 수고의 고통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 오실 일을 돕는 배필의 역할에 대한 고통입니다. 이스라엘이 배필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님을 기다리며 고통을 겪고 또 기다리며 고통을 겪고 또 기다리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여자, 이스라엘의 신앙의 수고와 고통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사단의 엄청난 핍박과 죽임과 그 고난 속에서 예수님이 오시게 되었으니 그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고 사랑해야 하겠는가? 깨닫는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뱀에게 흙을 먹을지니라 의 말씀의 뜻과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의 말씀의 뜻을 알아보았고
여러분이 또한 믿음의 능력으로 받는 말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여기에서 또 이어질 말씀은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모든 영광을 삼위의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제 13 장 뱀에게 흙을 먹어라, 잉태의 고통을 크게. p299-p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