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민중의 십자군
 
 
 
카페 게시글
* 민중의 투쟁 스크랩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 .
아리랑 추천 0 조회 185 15.02.03 07:3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체게바라(Ernesto Guevara, 1928. 6. 14 - 1967. 10. 9)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사르트르)으로 평가받는 체게바라는 위대한 혁명가이자 가슴 속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서정을 품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집시생활과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한 아르헨티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문학에 조에가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소포클레스, 랭보, 세익스피어에 심취했고 잭런던과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글귀를 암송하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의대를 졸업한 후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나환자들의 삶과 궁핍한 농민들의 현실을 목격한 다음,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 후 쿠바로 건너간 그는 카스트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게릴라 혁명투쟁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게릴라 전투기간 동안에도 그의 배낭 속에는 언제나 괴테,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네루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닌 등의 책들이 떠나질 않았다. 일기에는 수많은 전투기록과 그 기록 곳곳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간절한 시(詩) 같은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그만큼 그의 역사와 민중에 대한 애정은 뜨거웠다.

그리고 쿠바혁명 성공 이후, 또다시 게릴라복으로 갈아입은 체게바라는 눈앞에 열린 권력의 열매를 따기보다는 고통받는 민중의 편을 택하여 볼리비아 밀림으로 들어가 혁명운동을 이끝다. 아내와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쿠바의 권력도 모두 반납한 그는, 자신의 순수한 초심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볼리비아에서 장열하게 싸우다 불과 39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

체게바라는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 그대로 실천한 혁명가의 전형이다. 고난의 행군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 중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시와 일기를 썼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그의 많은 일기와 시와 편지와 기록들을 읽어보면, 그는 이미 자기 생애의 모든 의미를 완성하고 예증한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토록 바라던 혁명이 왔지만, 그는 달콤한 열매를 외면한 채 총을 메고 또 다른 새로운 땅으로 씨앗을 뿌리러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외로운 별처럼 죽었다.

그가 늘 쓰고 다녔던 검은 베레모의 별은 순수한 영혼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처럼 보인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결코 그 목숨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적들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결코 그 적들의 영혼에는 쏘지 않았다. 그는 혁명가요, 시인이요, 노동자 농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인간이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는 '100년에 하나 나올까말까하는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었다...

문화산책 [체게바라 시집] 중에서...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만남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 이건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쿠바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체 게바라에 대해 내린 평가다. 그러나 어차피 완벽은 인간의 덕목이 아니다. 그래서 체 게바라는 전설과 신화 속의 존재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쿠바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이른바 ‘체 게바라의 물결’에 놀란다고 한다. 쿠바 전역에 체 게바라의 모습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사진 초상화 판화 동상에서 티셔츠에 이르기까지. 반면 카스트로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니 흥미롭다.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를 내세워 쿠바 국민을 40년이 가까워오는 쿠바혁명의 달콤한 추억에 묶어두려는 건 아닐까?

 체 게바라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계 중류 가정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다. ‘체’는 기쁨 슬픔 놀라움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어원은 ‘나의’라는 뜻을 가진 인디언 토속어다. 그러니 체 게바라는 ‘나의 게바라’라는 뜻인 셈이다. 아버지는 건축가였고 어머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니,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고,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라고 부를 만큼 시에 심취했다. 낭만적인 혁명가? 말이 안 되는 말이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말이 안될 것도 없다.

 

 

 

 

 

체 게바라는 5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로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평소 여행광이던 그는 공부를 끝내고 중남미 대륙을 탐사하는 본격적인 여행길에 나섰는데, 이게 그만 그의 운명을 바꿔놓고 말았다. 그는 대륙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면서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큰 충격으 받았다. 그는 54년 민중을 위한 개혁을 단행한 콰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이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대의 쿠데타로 무너지는 걸 목격하면서 제국주의의 횡포에 분노했고, 그 분노를 못 이겨 아르벤스의 편에서 싸움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곧 멕시코로 탈출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카스트로를 만났다. 이 만남은 후에 체 게바라의 첫 부인이 된 페루인 마르크시스트 힐다 가데아가 주선한 것이었다. 둘은 금방 의기투합했으며, 서로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나이는 카스트로가 한 살이 더 많았는데, 둘이 ‘형 아우’하며 지냈는지 그건 모르겠다. 그게 1955년이다. 체 게바라는 후일 “나는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는데,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체 게바라의 가슴에 붙기 시작한 불에 기름을 끼얹는 셈이었으리라.

 카스트로의 유격훈련에 동참한 체 게바라는 56년 11월 25일 그랜마호에 승선해 쿠바로 떠난다. 물론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쿠바혁명 성공 후 ‘그랜마’는 쿠바의 정부 기관지 이름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린건 아니었다. 체 게바라 일행은 12월 2일 쿠바 동부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바티스타 친위대의 공격을 받고 82명 가운데 12명만 간신히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산으로 도피하게 된다. 게릴라로서 체 게바라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불멸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릴라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체 게바라의 국가 경영 실험


 체 게바라의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게릴라전을 편지 2년여만인 59년 1월 1일, 드디어 쿠바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일당의 수중에 떨어졌다. 체 게바라는 혁명정부에서 상공부 장관 겸 중앙은행 총재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경제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는가. 아니 체 게바라는 오히려 경제의 법칙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그는 물질적인 것 대신에 도덕적인 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움직이려 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상’을 강조했다. 인간의 본성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경제에는 실패했는지 모르지만, 의사로서 의료개혁만큼은 확실하게 추진했다. 지금까지 쿠바가 자랑하는 세계최고의 무료 의료시설은 바로 체 게바라의 작품이다. 지난해 쿠바를 찾은 3천5백여 명이 입국 서류에 방문 목적을 ‘의료’라고 적었다는 걸 무얼 의미하는가?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호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잇다.

 “피델 카스트로의 장기 집권으로 부패와 빈곤이 만연하고 있는 쿠바지만 병원과



의료제도만은 일류급이다. 인국 2백명당 1명꼴인 의사수, 서유럽 국가보다 낮은 영아 사망률을 자랑하는 쿠바는 ‘치료비 전액 무료’의 완벽한 의료보장제도도 갖추고 있다. 암, 신경통, 심장, 신장 이식수술은 물론 안과와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쿠바의 의료수준은 미국이나 유럽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치료 비용이 값싼 것도 외국인에게는 매력적인 부분이다. 쿠바 당국도 의료시설 개방에 적극적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외화난을 겪고 잇는 쿠바는 지난해 ‘의료관광’으로 2천4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제약 부문에서도 서방 자본이 군침을 흘릴 만큼 쿠바는 세계적 강자다. 사회주의 인민을 위해 건설된 쿠바의 첨단 의료 기술이 지구촌 난치병 환자들에게 복음이 되고 있다.”

 체 게바라는 외국 방문도 열심히 했는데, 이게 그의 명성을 전세계적으로 떨치게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는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의 모택동을 비롯해 북한의 김일성까지 만나고 다니면서 혁명 의지를 끊임없이 천명했다. 쿠바의 외무장관 자격으로 UN총회에 참석해선 상호 공존과 민주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하며, 폭력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혁명을 위한 유랑


 체 게바라는 말로 떠드는 것엔 만족할 수 없었을가? 그는 벨기에령 콩고(지금의 자이레)에 눈을 돌려 그 지역을 해방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고 콩고로 떠나는데, 그게 65년 3월이었다. 그는 콩고로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곳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카스트로와의 갈등 때문에 떠났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카스트로가 자신의 혁명 동지이자 친동생인 라울 카스트로를 국방장관에 임명해 실질적인 2인자로 만든게 무얼 의미했겠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또 그런가 하면 체 게바라의 정책을 영 마땅치 않게 생각한 소련과의 갈등 때문에 떠났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쿠바를 왜 떠났건, 체 게바라가 오로지 혁명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혁명에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였다는건 분명하다. 그는 언젠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의 마르크시즘은 단단히 뿌리박고 있으며 정화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들의 단 하나의 해결책은 무장투쟁이라고 굳게 믿고 이 신념에 따

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는 단지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험주의자라는 공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콩고에서의 실패


 그의 콩고행은 모험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게바라의 말마따나 당시 콩고는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였다. 이미 61년 11월 벨기에의 낙하산 부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콩고 스탠리빌에 투입되었는데. 그런 서방의 개입으로 인해 콩고의 세력관계는 서방 지원을 받는 모이세 촘베 정권과 파트리체  루뭄바의 승계자인 좌익혁명그룹으로 양극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싸움을 해야 할 좌익혁명그룹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콩고에 도착한 게바라는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나세르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는 65년 초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밝혔는데, 나세르는 놀라서 “제2의 타잔이 되는 것, 흑인들 사이에서 흑인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는 백인이 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콩고 혁명을 시도하는건 문화적으로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작전에 참가한 160명의 콩고 병사들 가운데 60명은 이미 공격이 개시되기도 전에 탈영해 버렸고, 남아 있는 1백명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단 한발의 총알도 쏘지 않았다. 게바라는 콩고인들이 사격을 배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에게 기관단총을 쥐어주면 두 눈을 감고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공중을 향해 쏘아대기 일쑤였다. 콩고인들이 총탄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준다는 이른바 마슬의 음료인 다바를 굳게 믿고 있다는 데에 이르러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 게바라는 콩고 체류 반년만에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들은 전투 의지가 없다. 내전에서 이기려면 우리(쿠바 지원부대)가 직접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쿠바인들의 불만도 커졌다. 그들은 체 게바라에게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결국 체 게바라는 콩고를 떠나고 말았다. 우선 문화적으로 비교적 동질적인 중남미부터 혁명하자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66년 12월 볼리비아에 잠입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사정도 어렵긴 마찬가지 였다. 무엇보다도 소련 편향적인 볼리비아의 반군 지도부가 그의 지휘를 거부하는 바람에 그는 고립무원 상태에서 소규모 게릴라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볼리비아는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로 둘러쌓인 나라다., 바다는 없으며 산과 언덕으로만 이루어진

고원지대인만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볼리비아 국민 대부분이 인디오 종족의 농민들로 정부 전복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결국 체 게바라는 별 성과도 없이 채 1년도 버티지 못한 채 포로로 잡혀, 67년 10월 9일에 총살당했다. ‘현지 사정에 맞는 게릴라전’을 강조했던 게바라가 콩고는 물론 볼리비아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사라진 건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에게 혁명의 정열이 넘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스틸

 

레지스 드브레의 변신


 여기서 잠깐 레지스 드브레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다. 체 게바라의 게릴라 부대는 53명의 대원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건 한마디로 다국적군이었다. 30명은 볼리비아인, 17명은 쿠바인, 3명은 페루인, 그리고 아르헨티나인, 동독인, 프랑스인이 한명씩이었는데, 프랑스인이 바로 드브레다.

 드브레는 67년 4월 20일에 체포돼 30년형을 언도받았다. 전세계의 유명 지식인들이 볼리비아 정부에 그의 석방을 호소했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도 선처를 바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런 운동도 시들하게 되었는데,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카스트로에게 드브레와 쿠바에 갖혀 있는 한 포로와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드브레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100명의 포로와 체 게바라의 시체를 교환하자고 거꾸로 제안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아주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한 두 사람의 증언이라 100%믿을 수 있는 건 못 된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드브레로선 이만저만 섭섭한 일이 아닐것이다. 두 사람은 어떤 괸계였던가? 63년 25살 먹은 드브레는 당시 사르트르가 주관하던 <현대>지에 카스트로주의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 논문을 읽은 게바라는 <현대>지를 카스트로에게 보냈다. 카스트로는 그 글에 반해 드브레를 아바나로 초청했으며, 나중에 볼리비아로 보내 게바라를 돕게 했다.

 또 하나 놀라운 증언은 드브레는 체 게바라가 숨어 있는 곳을 당시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도했던 CIA에게 자진해서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은 나중에 볼리비아 정부군과 CIA요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세계적인 석방운동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드브레는 징역을 3년만 살고 풀려났다. 드브레가 석방된 후 파리로 돌아갈 때 칠레의 좌파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자신의 친서를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미테랑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미테랑이 10년 후 집권하자 드브레는 그의 비

서로 채용되었다. 그 후 드브레는 점차 이념과 역사와 인간과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혁명의 변절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엉뚱하게도 미디어 학자로 변신하는데, 92년에 나온 <이미지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은 94년 우리말로 번역돼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그해 11월 그 책의 출간에 맞춰 방한한 드브레는 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받았다.

 “본인이 원하든 아니든 당신은 과거 체 게바라, 카스트로 등과 혁명운동을 같이 한 ‘전력’으로 죄파 지식인에 속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당시의 활동을 돌아보며 어떤 평가를 하는가?”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로 본다.”

 

 

 

체 게바라의 죽음


 드브레의 배반에 관한 두가지 증언 가운데 하나는 미국에서 90년에 출간된 <그림자 전사>라고 하는 책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쿠바계 미국인인 전직 CIA요원 펠릭스 로드리게스의 자서전이다. 이 책엔 체 게바라를 잡기 위해 볼리비아로 비밀리에 파견된 로드리게스와 체포돼 처형을 기다리는 체 게바라와의 대화가 실려 있는데, 한 번 들어볼 만하다.(<월간조선>90년 2월호의 발췌 번역본을 참고한 것임.)

 로드리게스는 초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체 게바라에게 담배를 주고 개인적인 존경의 뜻을 표하면서 그의 말문을 열게 만든다. 로드리게스는 게바라에게 왜 볼리비아를 택했느냐고 묻는다. 게바라는 마치 무슨 논문을 쓰듯이 성실하게 대답해준다.

 “베네수엘라, 중앙 아메리카, 도미니카 이들 세 지역은 양키들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혁명을 하자면 양키들이 방해할 것이 분명하지. 그래서 양키의 제국주의 영향력이 아직은 덜 미치는, 현재로는 양키의 즉각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볼리비아를 최적격지로 선정한 거지. 볼리비아는 가난한데다 이곳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할 경우 인접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우루과이 칠레 등에 혁명을 수출하기도 좋고, 그런데 볼리비아는 너무 지방색이 강한게 문제였어. 볼리비아인들은 좀 더 넓은 시각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범세계적인 게릴라운동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들은 쿠바인이 아닌 볼리비아인 게릴라 대장을 원했어. 이런 일에는 우리가 전문가인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어.”

 또 로드리게스는 게바라에게 “아프리카에서 당신은 1만명의 게릴라를 거느렸는데 왜 실패했느냐?"고 묻는다. 게바라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에게 진정한 의미의 게릴라 1만명이 있다면 1년안에 아프리카 전역을 혁명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거야.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매우 열등한 군인이었어.”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상공부 장관과 국립은행장을 역임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게바라는 역시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농담 한마디 할까. 어느 날 회의 도중에 갑자기 카스트로가 들어오더니 경제(에봇노미스따)를 아는 동지가 없느냐고 물었지. 나는 그말을 공산주의자(꼬뮤니스따)로 잘못 들어 번쩍 손을 들었고, 그게 바로 피델이 나를 쿠바 경제 책임자로 임명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 농담쯤으로 들어두게나.”

 로드리게스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는다. 게바라도 이제 자신의 목숨이 곧 끊어질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가 남긴 건 딱 두마디였다고 한다.

 “피델에게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

 둘은 껴안았고 굳게 약속했다. 로드리게스는 감방을 나와 CIA본부에 무전기로 보고하려는 순간 M2 카빈 소총의 날카로운 총성이 두 발 울리는 걸 들었다고 적고 있다.

 

 

 

 

 

체 게바라와 제임스 딘


 게바라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신화는 그때부터 더욱 뜨겁게 살아난다. 그가 죽은 67년 10월부터 1년여 기간은 미국에도 신좌익운동이 거세게 꿈틀대던 시절이었다. 죽은 게바라는 당시 미국 신좌익 운동가들의 7대 영웅으로 게바라와 더불어 알베르트 까뭐. 노암 촘스키, 폴 굿만, 레지스 드브레, 프란츠 파농, 허버트 마르쿠제 등을 꼽고 있다. 서로 다 이질적인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건 특별한 상관은 없다고 본다, 그 잡지 기사의 필자는 한 운동가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체 게바라가 남긴 책들은 당시 급진 성향의 대학생들 사이에 널리 읽히는 필독서였다. <게릴라 전쟁>(1961), <쿠바혁명전쟁의 회상>(1963), <사회주의와 인간>(1966), <볼리비아>(1969) 등이 유명하다. 체 게바라는 혁명의 기본적인 원동력이 젊은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학생들로부터 더욱 큰 인기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자 엄창현씨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은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중반에 체 게바라의 책이 제법 읽혔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한때 많은 진보적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게바라 신화는 신좌익의 물결이 사라지고, 아니 동구권이 몰락한 지금까지도 살아 꿈틀대고 있다. 95년 말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로부터 6백90킬로미터덜어진 발레그란데시에서는 그의 유골 찾기 작업이 벌어졌는데, 이는 체 게바라 일당 소탕작전에 참가했던 볼리비아의 두 퇴역 장군이 체 게바라가 살해 암장된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다고 밝힌 뒤 정부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볼리비아인들 가운데엔 아직도 게바라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래된 신문지에서 오려낸 게바라의 사진을 모셔놓고 예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산체스 로자다 볼리비아 대통령이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견되면 가족들에게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자, 발레그란데 주민들은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되면 체 게바라 기념관을 건립해 보존하겠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게바라에 대해 좋은 기억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볼리비아의 어떤 늙은 농부는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농민들에게 해준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우리를 돕겠다고 했지만 도움을 받을 사람은 그 자신이었을 정도로 초라한 행색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과연 게바라가 해준 일이 무언가? 그러나 신화는 아무건도 해준 게 없더라도 무엇을 할려고 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더 끈질기게 따라붙는 건 아닐가?

 신화는 이데올로기마저 흡수해 녹여 버리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오늘의 게바라 숭배자들에게 중요한 건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 같다.

 지난 93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그의 일기 <젊은 날의 얘기>는 스테디설러로 2

년만에 12만부가 팔렸는데, 주 독자는 이데올로기를 떠나 기성 정치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이라고 한다. 한 이탈리아 언론인의 다음과 같은 말이 게바라 신화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 같다.

 “부패와의 전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게바라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해방투사이자 완벽한 도덕 실천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의 제임스 딘과 같은 존재다.”


 유럽에서 부활한 체 게바라


 97년은 체 게바라의 사망 30주년이 되는 해다. <신동아> 96년 8월호는 벌써부터 유럽에 ‘게바라 열풍’이 불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의 일요 신문인 <존탁스 차이퉁>지는 6월 2일 ‘불멸의 행진, 68년 세대의 우상 체 게바라, 그에 대한 열광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혁명은 끝났고 공산주의는 막을 내렸는데, 게바라만은 살아 있다.”고 단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시위하는 곳에는 1967년 살해된 ‘사령관’ 게바라가 항상 함께 있다.

수수께께 같은 일이다. 68년 운동의 다른 우상들인 호치민, 마오 쩌뚱, 루디 두취케 등은 이후 세대에게서 잊혀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비교적 오래갔지만 역시 뒤로 밀려났다.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커트 코베인과 같은 대중적인 우상들만 티셔츠와 포스터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모두를 압도하고 있다.”

 게바라의 사진은 내의, 핀, 포스터로 팔리고 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시계회사 스왓치는 체 게바라의 얼굴 사진이 든 시계를 제작, 판매하고, 영국의 모 맥주회사에서는 ‘체’ 라는 이름의 맥주 시판에 들어갔다. 그의 이미지는 유럽 각국의 디스코 텍, 소형 승용차, 백화점 등의 광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팔리는 게바라의 이미지는 항상 똑같은 모습인데, 그건 긴 머리, 거친 수염, 별이 달려 있는 베레모로 구성되어 있다. 게바라가 웬만한 할리우드 스타 못지 않은 미남이라고 하는 것도 ‘게바라 열풍’의 무시 못할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것이다. 모든 혁명은 종국엔 부패하기 마련인데, 게바라는 부패할 틈도 없었다. 게바라를 숭배한다는 한 젊은이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다소 유치하게 들릴 망정 게바라가 모든 정치인들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아닌지 모르겠다.

 “1965년 게바라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게릴라 투쟁을 벌였습니다. 편안한 장관 자리 대신에 영구 혁명을 위해 나아갔습니다. 게바라 외에 누가 이렇게 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위대한 혁명가들은 모두 자신의 사무실에서 죽어 갔습니다. 카스트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진은 체포직후부터 구금 되었던 라 이게라< la Higuera> 마을 초등학교벽을 배경으로 처형 두시간전에 찍은것이다. 이사진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게바라의 체포와 제거를 증거로 남기기위해 찍은 일급 정보문서중의 하나이다. 옆의 기름지고 의기양양한 미소의 주인공은 언론의 눈을 피하기위해 볼리비아 정부군복장을한 미 중앙정보국 중남미담당 agent 펠릭스 로드리게스다

 

 

 

 

 

ㆍ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지금 이 시간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오른다네, 자네를 마리아 안토니아 집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자네가 나에게 자네 그룹에 합류하기를 청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대비해 누구에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지를 미리 말했을 때, 이 가능성은 갑자기 우리 모두에게 현실로 나타났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진실로 현실임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혁명을 할 때-그것이 진정한 혁명이라면-우리가 승리할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 말일세. 실제로 수많은 동지들이 혁명에 목숨을 바치지 않았는가.

오늘에는 이 모든 것들이 덜 극적으로 보이네. 우리가 더욱 성숙했기 때문일테지만, 그러나 또한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쿠바 땅에 국한된 쿠바 혁명에서 내 몫을 다했다는 느낌이네. 이제 나는 자네와, 동지들과, 그리고 이제는 나의 것이기도 한 자네의 인민들과 작별하려 하네. 나는 내가 점하고 있는 당의 직책과 장관직과 사령관의 직위, 그리고 쿠바 시민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네. 이제 나와 쿠바를 잇는 어떤 법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네. 오직 공문서 따위로는 파괴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관계만이 나에게 남을 것이네.

내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건대, 나는 지금까지 정직하게 또 한결같이 혁명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다만 하나 내 잘못이라면 시에라마에스트라 시절 처음부터 자네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 자네의 지도자적 자질과 혁명가적 기질을 좀더 빨리 이해하지 못한 것이겠지. 나는 경이로운 세월을 살았고, 미사일 위기가 계속되는 최근에까지 자네 곁에서 우리 인민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네. 이런 경우에는 어떤 국가원수도 자네만큼 영민하게 대처할 수 없었을 터, 보고, 사고하고, 위험과 원칙을 형량하는 자네 뒤를 주저 없이 따른 것이 자랑스럽네. 지구상의 다른 땅들이 나의 미천한 힘을 요구하는군. 쿠바의 영도자로 남을 자네의 책임이 자네로 하여금 포기하게 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것을 나는 하려 하네. 이제 우리가 작별할 시간이 온 게지.


내가 기쁨과 고통이 교직하는 가운데 떠난다는 걸 이해해 주게. 나는 여기에 건설자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희망을, 내가 사랑하는 자들의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남겨두고 가네. 나를 아들로 받아준 인민의 곁을 떠나네. 내 정신의 한쪽을 남겨두겠네. 새로운 전장에서 자네가 나에게 심어준 믿음을 간직하겠네. 우리 인민의 혁명의식과 내 의무의 가장 고결한 부분을 완수한다는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간직하겠네.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그곳에 이들이 모두 함께할 것이네. 내 아픔을 쉽게 치유하고 위로하는 바는 이것뿐일세.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쿠바에 대한 모든 책임을 벗고, 오직 이상형의 쿠바만을 기억하겠네. 그래서 다른 하늘 아래 내 최후의 시간이 도래한다면, 내 마지막 생각은 쿠바 인민들에게, 특히 자네에게 향할걸세. 자네의 가르침과 자네의 모범에 감사하네. 내 행동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충실하게 간직하려 노력하겠네. 나는 늘 우리 혁명의 대외관계에 집착하곤 했지.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언제나 쿠바 혁명가의 책임을 완수할 것이며 또 그렇게 행동할 것이네. 나는 나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어떤 물질도 남겨주지 않을 터,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들이 먹고, 교육받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국가가 줄 것이기 때문일세.



자네에게, 인민에게 할말이 많았는데, 그것도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어찌 말로써 다하겠는가. 종이만 더럽힐 뿐이겠지.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뜨거운 혁명의 열기로 얼싸안으며



 


 A justice withou action is useless.힘없는 정의는 무용하다.!!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5.02.03 15:28

    첫댓글 오직 고통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총을 들었던 혁명가 체 게바라!!
    그는 진정으로 민중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민중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자랑
    스러운 민중의 혁명가였습니다.필자는 이러한 민중혁명가들이 오늘 이 시
    대에도 세계 곳곳에서 많이 나와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