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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6
이사야 53장 2-6절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지위 혹은 신분을 가지시는데, 하나는 낮아지신 신분과 다른 하나는 높아지신 신분입니다. 낮아지심의 첫 번째 내용은 성육신에 대한 것인데, 본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계속해서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그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친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인성을 취하시되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하게 영혼이 있는 육체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동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죄는 없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심으로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셨는데, 이때 두 본성, 다시 말해 그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칼케돈 신조의 내용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두 본성은 혼합이나 전이나 나눠지거나 분리가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성이 인성을 취함으로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또 다른 본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혹은 신성이 인성으로 변하거나 인성이 신성으로 바뀌는 그런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성이 인성을 취한 이후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고 연합되어 있는데, 신성은 신성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또 인성은 인성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연합이 되어 있어서 두 본성의 교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때로 신성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 인성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항상 신성은 신성으로, 인성은 인성으로만 말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주 언급하지 않았지만, 두 본성이 연합되어 있고 또 그런 연합으로 교류를 하기 때문에 한 본성에 속한 것을 다른 본성에 적용해서 말씀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20장 28절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표현하는데, 피 흘려 죽으신 분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신성이 아닌 인성이 피를 흘렸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부 고난설까지도 주장하지만, 지금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인성을 취하신 성자께서 피 흘리셨지만 두 본성이 교류하고 교통하기 때문에 한 본성에 속한 것이 다른 본성에 적용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성에 속한 것이 때로는 신성에 적용되어 말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인성에 속한 것을 신성에 적용한다는 것으로 성부 고난설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해석에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이제 낮아지심의 두 번째 내용을 살피겠는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부분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하시고 난 뒤 30년 이상을 사셨습니다. 특별히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난 뒤 그의 마지막 3년 정도는 그의 공생애 사역 시기로 있었는데, 사도신경은 이 모든 것을 담아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할 때 그의 성육신부터 시작해서 그의 모든 생애가 고난을 받으신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이신 분이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즉 낮아지신 신분 자체가 고난의 전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그의 모든 생애를 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생애가 요약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모든 생애가 일일이 다 열거되지는 않지만, 그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난의 생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7문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37문. “고난을 받으사”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이 땅에 사셨던 기긴 내내, 특히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그가 몸과 영혼으로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으니(사53:4, 벧전2:24, 3:18, 딤전2:6), 이는 유일한 속죄의 제물로서 고난을 당하심으로(사53:10,12, 엡5:2, 고전5:7, 요일2:2, 4:10, 롬3:25, 히9:28, 10:14) 그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고(갈3:13, 골1:13, 히9:12, 벧전1:18-19),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으시기 위함이었다는 뜻입니다(롬3:25, 고후5:21, 요3:16, 6:51, 히9:15, 10:19).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고난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출생부터 시작됩니다. 그의 낮아지신 신분 전체가 고난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육체와 영혼으로 당하신 모든 비참함, 연약함, 괴로움, 고통, 치욕 등이 다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의 생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모든 생애가 고난의 생애인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인성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면 겪지 않으실 것을 겪으셨는데, 죄만을 제외한 우리의 본성의 모든 연약함을 겪으셨습니다. 주리기도 하셨고, 목마르기도 하셨고, 피로를 느끼기도 하셨고, 슬픔과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 의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극도의 궁핍함 가운데 계셨습니다. 시편 22편 6절에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란 예언의 말씀이 있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이런 일을 당하셨습니다. 무한한 모욕을 당하셨고, 치욕과 비방, 중상과 조롱, 시기와 신성모독, 거부와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의 종으로 묘사하는데, 오늘 본문으로 이사야 53장 2절을 보시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 요한복음의 말씀을 살피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외모를 봅니다. 그의 말씀을 통해 그가 어떤 분이신지, 그의 능력을 통해 그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그가 누구의 자식인가 이런 것만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외적인 면을 보면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귀하게 여길만한 어떤 것이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멸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심을,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이 되셨음을 알아야 하는데, 외적으로만 판단하니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 2절은 그가 주 앞에서 자라나는 연한 순과 같다,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지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이사야 52장 13절은 미리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그러니까 이사야 53장을 통해 고난의 종의 모습을 묘사하지만 무엇이 보장되었는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보장된 형통, 그리고 결국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만 받으시는 게 아니라 영광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낮아지신 신분만이 아니라 높아지신 신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할 때 몇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마귀로부터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이런 시험은 맨 첫 사람 아담의 시험을 떠 올리게 되는데, 아담은 마귀의 시험을 통해 죄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라는 결과를 낳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서 4장 15절은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사셨던 기간 내내 고난을 받으셨지만, 특히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받으셨던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크고도 치욕스러운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십자가 죽음이 가장 크고도 치욕스러운 고난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가 몸과 영혼으로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9문을 보시면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39문.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는 혹시 그가 다른 죽음을 죽으셨을 경우보다 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예,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이므로(신21:23), 내가 당할 저주를 그가 대신 당한 것임을 그것으로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갈3:13).
일단 한시적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재판법을 보면 사형제도가 있었습니다. 율법 안에 도덕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법과 재판법이 있었는데, 도덕법은 영구적이지만 의식법과 재판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기 전 한시적으로만 집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형은 엄밀하게 말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에 저촉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 이스라엘 나라의 재판법으로 사형제도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때 죽음 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형은 돌로 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죽은 자를 나무에 달기도 했는데, 신명기 21장 23절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인 얀 판 브뤼헌의 책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을 보면 참람한 죄인에 대해서는 돌을 던진 이후에도 영혼이 떠난 그 몸을 성 밖의 나무에 달아 두었다고 하면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 우리는 이 죄인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였으나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다 집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몸만을 죽일 수 있으나 주님은 영혼도 죽일 수 있으신 분이시기 에 이제 그를 주님께 넘깁니다.”
분명한 것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인데, 몸과 영혼을 포함한 전인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되 그의 몸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 본성의 연약함을 겪으셨지만, 그리고 그런 연약함 속에서 시험을 받기도 하셨지만,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죄에 대한 진노와 저주인데, 죄 없으신 분이 그런 진노와 저주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자신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가 몸과 영혼으로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다고 되어 있지만, 이때 온 인류는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한다고 할 때 문맥에 따라 차별이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지위가 높은 자든 낮은 자든, 부한 자든 가난한 자든,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차별 없이, 그러나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 그들에 한해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 53장으로 오면 이런 측면에서 4절 이하 6절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신 이후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의 모든 생애를 통해 고난을 받으시고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것은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의 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 때문에 그의 몸이 고난을 받으셨고, 나아가 그의 영혼도 고난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해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몸의 고난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고난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할 때 영혼의 가장 쓰라린 고뇌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순교한 자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영혼의 고난의 단면은 그의 십자가 위에서의 부르짖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을 외치십니다.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해석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에 외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서 기도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과 함께 올라가셔서 기도하셨는데,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나 하면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리는 것입니다(마26:39a). 여기서 잔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셨는데,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에 대하여 누가복음은 기도하시면서 땀을 흘렸는데 그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눅22:44). 물론 이 기도와 함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마칩니다만(마26:39b), 할 수만 있다면 십자기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셨습니까? 단지 십자가에서 받는 육체적 고통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 분리되는 일은 없습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로 계신다고 할 때 성부의 신성이 성자의 신성과 분리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눠지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다고 할 때 성자의 신성과 성자의 인성 역시 나눠지거나 분리되는 일도 없습니다. 언제나 교통하시고 교류하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받으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마치 신성이 인성을 버린 것처럼 느낄 정도로, 그러나 단지 그렇게 느끼신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런 고통을 당하여 괴로워할 정도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반면 순교자들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셨던 이런 고난은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고통과 고난을 받을지언정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데반의 순교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사도행전 7장 59절과 60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돌로 맞을 때 육체적 고난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맡길 정도로 평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사셨던 기간 내내, 특히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그의 몸과 영혼으로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의 고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신 목적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원인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요, 이 사랑과 긍휼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공의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3:16)습니다. 독생자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딛3:5)서입니다. 그의 사랑과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목적하시는 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해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내용은 그가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빌라도가 언급되고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8문입니다.
38문. 그는 왜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답. 그 자신은 무죄하셨으나 친히 이 땅의 재판관에게 정죄를 받으사(요18:38, 마27:24, 행4:27-28, 눅23:14-15, 요19:4)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처절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사69:4, 사53:4-5, 고후5:21, 갈3:13).
우선 누가복음 3장 1절과 2절에 보면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 당시 유대 땅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그때 유대 땅을 다스리던 사람이 빌라도 총독입니다.
물론 맨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 맨 처음 누구 앞에 끌려갔는가 하면 당시 대제사장으로 있던 안나스입니다(요18:12-13). 그리고 심문을 받다가 다시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가게 되는데(요18:24), 안나스와 가야바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가 됩니다(요18:13). 그러니까 먼저 가야바의 장인인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가, 다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 심문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대제사장들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마26:5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마26:59)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찾지 못합니다. 이후 신성모독을 한다는 이유로 모욕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마26:65,67) 죽일 권한이 없다는 것으로 빌라도에게 넘깁니다(요18:31). 그래서 심문을 하게 되지만 죄가 없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이런 빌라도의 판결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무리들은 백성을 소동하는 자로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합니다(눅23:5). 이때 예수가 갈릴리 출신인 줄 알고 당시 갈릴리를 다스리던,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와 있던 헤롯에게로 보내게 됩니다(눅23:7). 그런 이후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어 죄가 없다고 판결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벌로 죽게 만듭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죽음 배후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 또한 유대인들, 그리고 당시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과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빌라도가 언급되고 있는가? 그가 공적 재판의 대표자로 결국 형을 집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것이 왜 중요한가? 왜 그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서인가?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언한 것처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공적 재판장의 공적 선언으로 예수님에게서는 아무런 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통해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는 것처럼 정죄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는 사실과, 무죄한 그가 정죄를 받아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된 것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의 죄 때문인가?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자기 백성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그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물론 요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요5:41).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요5:34). 특히 사람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공적 재판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공평과 공의의 결과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의 재판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을 통해 자신의 기쁘신 뜻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빌라도라는 공적 인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마치 죄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정확하게는 그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지심으로 십자가 형벌과 그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공적 죽음임을 나타냅니다.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증거처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사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사53:5). 다시 말해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 죽음 가운데 놓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9문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나타냅니다. 본래 그 저주는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가 찔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찔려야 하고, 그가 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요리문답 38문은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처절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처절한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신뢰하도록 이끄는 그런 믿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출생의 순간부터 온갖 종류의 비참함을 견디고 인내하셨다는 것과, 또한 그가 특히 그의 생애 마지막 기간에 빌라도 아래에서 육체와 영혼의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과, 또한 그가 자기 백성의 죄를 보상하며 죄로 인하여 촉발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는 중에 하나님의 처절한 진노를 느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셨고, 그리하여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를 보상하셨고, 나를 위하여 죄 사함과 성령과 영생을 공로로 획득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고 그리하여 그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