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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제 16 장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협착한 길의 복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여러분! 찾는 이가 적은 이 좁은 문, 협착한 길을 가는 이것이 저는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기쁘고 행복한 좁고 협착한 길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도 또한
큰 행복이라 어찌 내가 이 복을 가졌을까 생각하면 기쁘기가 한량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 제목
도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협착한 길의 복>이라고 붙였어요. 내겐 이것이 너무나 큰 복이니 숨길
수가 없더란 얘깁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원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
님을 따르고 예수님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좁
은 문은 들어가도 되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만 예수님의 생명을 얻고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좁은 문입니까? '좁은 문'은 '좁다'와 '문'이라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좁으냐? 14에서 협착하기에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협착하다는 것은? 그만큼 가는 길이 험하고 아
주 불편하고 힘든 방해물이 있다. 괴롭히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지름길이
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다음 문은 무엇일까요? 요10:9에서 예수님 자신이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시고, 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알도록 요10:9에서 내가 문이다
하셨고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 얻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을 믿는다는 이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시고, 그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그
문으로 들어와 가는 길은 방해가 있고 많은 방해물이 있지마는 그 길만이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
이라는 것을 구체화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요14:6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문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은 아주 협착하다는 것을 알고 가야 할 것임을 분명히 제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편안한 길이 아니고 그저 사람이 생각하는 무슨 복 받는 것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협착한 길이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따라오려면 그것을 마땅히 받을 것으로 알고
오도록 하셨습니다. 방해가 있고 괴롭히는 것이 있고 고난이 있고 자신과의 싸움도 있는 그 길은
아주 협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아주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
다고 이미 확실히 말씀을 하셨으니, 찾는 이가 적은 것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찾는 이가 적다
는 것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아는 것이니 왜 그렇게 사람들이 이 믿음 안에, 이 말씀 안에 들어
오지 않는 것이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정말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도 좁은 문이 무
엇이냐? 했을 때 도대체 좁은 문이 무엇인지 여러분도 모르고 있잖아요? 대답 못하잖아요? 수 번을
말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며 협착한 길을 갈 수 있는 것이겠습
니까? 자기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데 어떻게 모르는 길을 가겠는가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문
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가는 것은 아니지요. 지식으로 아는 것이야 얼마든지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또 있는데 그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
다고 하십니다.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불신자들도 해당이 되지마는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
는 이들을 말씀합니다. 믿는다 해도 협착한 길에 대하여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자유로운, 자신
에게 맞는 길을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거지요. 인간은 누구나 안일한 길 편안한 길 쉬운 길 넓은 길
을 원합니다. 그렇기에 믿는다 해도 결국은 인간이 가진 육체의 소욕대로, 육신이 좋아하는 대로,
자기가 원하는 안일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넓은 길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분명히 답
을 말씀하셨으니, 오늘날 협착한 생명의 길로 가는 이는 아주 적은 수일 것이고, 어마어마한 많은
수가 분명히 멸망으로 들어가는 넓은 길에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답은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요10:8에 나는 양의 문이라 9에 내가 문이니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들어가는 문이라 하셨습니
다. 그렇기에 이 길을 택한 자는 육신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편안한 길이 아니어서 핍박을 받고 괴
로움이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부터 어떤 복이 그냥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만 예수님은 오히려 고난이 따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 하
기 때문에 그 길이 협착한 것입니다. 그 길은 죄악 된 자신을 깨트리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 길은
육체의 소욕대로 자기 맘대로 방종하며 살던 것들에서 돌이켜야 하고 버려야 됩니다. 세상에서 온
전히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협착한 길입니다.
눅13:23-27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하니 예수
님께서 적다 많다 하지 않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습니다. 내
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한번 문을 닫은 후에는 너희가 밖
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주소서 하면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지금 여러분 다 먹고 마신다고 예수님 앞에 있
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와서 먹고 마셨으며, 말씀 듣고 예배드렸으며, 내 아까운 헌금도 내고 기도
도 했으며, 찬송으로 영광 돌렸으며 가르친 말씀 좋다고 잘 들었으며, 주님이 우리를 가르치셨잖습
니까? 그런데 왜 모르십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이같이 내세우며 아는 척 하려 하지마는 저가 너희에
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너희가 밖에 쫓겨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
씀했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우리를 가르치셨다 그러니 문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하는 것,
오늘날로 말하면 '나도 열심히 교회 다녔습니다. 말씀대로 주일 빠지지 않고 지켰습니다. 나도 성
경 말씀 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모른다 하십니다. 교회 열심
히 다녔든, 성경 말씀 다 알든,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고, 내가 아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찾
는 이가 적은 좁고 협착한 길을 온 자, 생명을 얻고 나와 함께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
예수님을 믿는 것, 오늘날 믿는다 하는 이들의 가는 그 길이 지금 예수님께서 난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실 곳으로 열심히 같이 휩쓸려서 따라가고 있다는 것 아십시오. 사람들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이 워낙에 장대한 세력이 되니 그 기세와 힘에 '야, 여기가 진짜구나!'하
고 거기에 자기 믿음이 가는 겁니다. 그것이 믿는 힘이 되고 그 기운을 받게 되니, 하나님의 심판
에 대한 두려움도 감각도 없습니다. 그저 편안한 길 세상이 가져다주는 온갖 것들, 온갖 문화 다
누리고 싶고, 다 취하고 싶고, 다 보고 싶고, 다 가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이름 내고 싶은 그
넓은 길을 좋다고 따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손에 가진 것 없으면 슬프고 괴롭고 힘들고, 세상 일에
쫒기며 일에 중독되다시피 하며 따라가는 그런 것이 좁고 협착한 길이겠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열리지 않느다. 영적으로 가증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함에도 그것들에 집착하고 아끼
듯 하는 것이 좁고 협착한 길이냐는 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기 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새겨들어보는 진정이 좀 있고, 그
말씀을 행하며 사는 믿음이 되고자 힘써야 하지 않습니까? 협착한 길이라는 것을, 아주 갈 것으로
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문 닫히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 많다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으니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힘
쓰라' 즉 싸우라 전투하라는 말이에요. 전력을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 것
은 힘쓰고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구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지 내가 힘쓰고 애써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합당한 자가 돼야 합니
다. 구원받을 자격이 되려면 말씀을 따라 살고 능력이 되고자 힘쓰고 전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
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임을 진정으로 알아 인정하고, 예수님이 자
기의 구주시라는 것 진실로 믿고 '예수님은 내 구주십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
외는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나의 구주십니다' 모셔 들이고 믿음의 고백하여 시인하
면 구원이 씨와 같이 마음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나 씨로 있어서는 절대로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
다. 씨가 싹터서 자라 열매 맺듯이 그 같은 과정으로 나아가야지, 그 마음에 씨로만 있으면 마귀
가 빼앗아 가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마24:24에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하신 말씀이 여기
에 해당됩니다. 믿고 시인한 것으로 인해 구원이 씨로 임했는데 자기 방법대로 자기 생각대로 믿
는 것이면 그 구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크고 넓은 길을 가면 마귀에게 구원의 씨를 빼앗겨
버립니다.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고 영접했다면 이제 육체의
정욕에서 나는 것으로 죄 짓고 불의하고 가증하고 부정한 죄들을 짓지 않은 것이 돼야 하는 것입니
다. 죄 된 삶의 습관들을 버리고 고치고, 육의 소욕을 좇아 행하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하고, 육신
이 즐거워하던 것을 버리고 떠나 나와야 하겠지 않습니까?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
으니 말입니다. 자기는 깨어져야 하고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핍박도 받고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
님 가신 길을 나도 따라가야 하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살아야 하는 그것은 곧 마음을 다해 힘써야
만 되는 것이니 그래서 좁고 협착하다고 한 것입니다.
저의 이런 말씀에 무슨 협박하는 말로 들려질까 싶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 목적이
무엇인지 성영님의 감동으로 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참으로 사랑하여
따르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와서 왜 있고 또 어디로 가야 되는 것입
니까? 이것을 안다면 좁고 협착한 길이라 해도 이 협착을 기꺼이 기쁘게 갈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야 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만 영생의 생명을 얻고 영원히 사
는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요 사람이 창조된 이유입니다.
우리가 소소한 문제들이 있잖습니까, 직장인들은 예수님의 날은 쉬는 날이니 모든 부담감 좀 다 잊
고 쉬고 싶을 것이고, 그동안 충분치 못한 잠도 자고 싶을 것인데, 일찍 일어나서 예배드리러 나와
야 하잖아요. 오히려 직장에 가는 것보다 더 마음을 써야 하고, 전날부터 예배의 정신을 가지고 마
음도 몸도 준비하면서, 예배 날에 일찍 일어나 나와야 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육체적으로 힘들잖아
요. 또 모든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오히려 주일이 더 영업이 잘되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 예
배의 날은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하나님의 날이라, 자기의 유익이나 오락을 금해야 하니 물질적
인 손해가 따를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다니는 그것이 즐거운 일이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 그런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니 돌이키고 버려야 하니 다 협
착한 길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좁은 문의 길 그 길만이 구원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힘써
싸우며 협착한 길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부부가 함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핍박은 물론이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믿는 아내는 그까
짓 세상 이야기는 정말 듣기도 싫은데, 남편은 그냥 세상 이야기만 하자고 하니 괴롭지 않겠어요.
그래서 벧전2:19-21에 권고하기를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
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
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왜 입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며 가신 그 길을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어도 참고 따라가야 합니다. 좁고 협착하지만 예수님 따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됩니다. 잠시 잠깐 후에 다 떠난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똑똑한 척 별말들을 다 하지만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어머니 배 속에 열 달 동안 잉태됐
을 때 열 달 후에 나가면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온 이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 좀 보여주면 믿지""천국이 있으면 왜 안 보여준대?""지옥이 정말 있
으면 보여주면 믿을 것 아냐?" 그러나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 안다고 했습니
다. 하나님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지은 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육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겠습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기가 이 자연 우주 만물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 나온 것이 아니듯, 천국
과 지옥 또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아는 어머니가 배 속에
아기에게 "이제 네가 열 달이 차면 세상에 나올 텐데, 그 세상에는 너무나 밝은 태양 빛이 있다. 아
름다운 꽃과 새들이 있고 온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라고 말해줄 때에, 아기는 "나는 보이지 않는
데 어떻게 믿어요, 정말 있다면 내게 보여주세요" "지금은 네가 볼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니 열
달 차면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든 것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다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
상은 어머니가 말한 대로 존재합니다.
천국과 지옥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의 천국을 가겠느
냐? 어머어마한 고통의 장소, 영원 영원히 겪어야 하는 그 지옥불로 가겠느냐? 천국도 영원, 지옥
도 영원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좀 여러분! 생각 좀 해보시잔 말이에요. 안 믿으니까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믿지 못하겠으니까? 지금 "내가 육체의 소욕, 즐거운 것들 다 버리고 예수님 위
해 협착한 길 살다가 만일에 천국 없으면 억울해서 어떻게 해" 그런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협착한
길 가기를 그렇게 외면하는 거잖아요?
한번 잉태된 생명은 내가 나갈까 말까 하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때는 선택의 여지 없이 존재하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께서 성경에다 일일이 다 계시해 놓았
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고 받겠느냐? 믿지 않겠느냐? 선택하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시길 "내가 좁은 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협착하다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여러분이 찾는 이가 적다 하신 그 적은 수에 드는 것을 원치 않고 그렇게 피하시
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의 말씀을 응하려고 그렇게 협착한 길을 피하십
니까? 좁고 협착한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길이라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가지 않는 것은
그 적은 수에 들지 않을 자라는 것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좁고 협착한 길만이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찾는 이가 적은
이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영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가자는 말입니다.
인간은 육체에서 떠나면 가야 할 다음 세상이 있다는 것 분명히 명심하십시오. 처음은 우리가 다
한세상에 왔지만, 다음 세상은 한세상이 아니라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 곳은 말할 수 없
는 고통만이 있는 곳이요, 한 곳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일만 있는 곳입니다. 그 두 곳 중
에서 선택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가 배 속의 아이에게 네가 나올 세상
은 이러이러하다고 일러주는 말에 '보여주면 믿지' 했어도 그러나 정한 때가 되니 나오게 되었고,
어머니가 일러주던 그 세상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같이 우리가 육체에서 떠나면
이러이러한 곳으로 들어간다고, 좁고 협착한 예수님의 길과 넓고 쉬운 사단의 길인 이 두 길이 있
다고 너무나 자세하고 자명하고 분명하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
라 갈 곳이 정해지는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한 길은 하나님께로 다시 나서 들어가는 천국의 문이고, 한 길은 세상의 길로 사단이 이끌어 가는
지옥의 문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니 그 선택은 각자의 몫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지만, 선택은 각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택 잘하십시오. 이 땅에서 각자 남은 날이 그까짓 이십 년, 삼십 년, 오십
년, 칠십 년, 팔십 년인 동안 자신의 육을 위해 살자고,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다고 그렇게 생명
얻는 길을 외면하는 그것이 진짜 자신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사는 동안은 편한 길이였을지는 혹 몰라도 그러나 목숨 끝나면 그 영혼은 고통의 장소인 지옥(불못)
으로 떨어져 영원히 거해야 하는 것이니, 여러분이 참으로 믿기 원하면 좁고 협착한 길 하나님 나
라 영광에 들어가는 그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수없이 말씀하셨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을 수없이 전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니고, 이 길을 가자니
힘들고 손해 보는 것 같고, 양다리 걸치는 신앙생활 하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
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깨끗이 과감히 돌아서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든 말든 손가락질하든 말든,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는데 있어서 손해
볼 일이면 손해 보고, 사람들이 욕하겠으면 하란 말입니다. 손가락질하란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면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이제 우리의 선택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좁은 문을 들어가 협착한 길을 가면 하나
님께서 확실히 천국으로 보장해주시는 것이지마는 사단을 따라 넓은 문의 길을 가면 그것은 사단이
확실히 지옥을 보장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 따라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바로 협착한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
고 나를 따르라,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하셨으니,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뭡니까? 자기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러므
로 이 믿음이 분명하다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힘든 것만이 아니라 성영님께서 도와주
시기 때문에 기꺼이 기쁘게 따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이 있음을 전제
로 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휴, 예수님을 믿으러 나왔더니 무슨 저런 협박 같은 말이나 하고
괜히 예수님을 믿었나! 나 잘되자고 예수님을 믿었는데 도대체 뭔 소리야! 고난은 또 웬 고난!"할지
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런 분 없기를 바랍니다.
좁은 문이요 협착하다니까 거기에는 아무 낙이 없고 고통만 있는 것으로 오해는 마십시오. 도리어
세상이 가져다줄 수 없는 하늘의 참 기쁨이 있어요. 영의 기쁨, 생명 안에서 나오는 천국의 기쁨이
있으니 기쁘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는 참된 희락이 있고 생명이 있게 되니 기쁨이 있습
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는 것이요, 세상의 어떤 고난도 다 이겨낼 수 있
는 능력입니다. 좁은 문에 들어와 협착한 길을 가는 우리에게는 현재의 수고와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복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는 것은 현재는 편
하다고 할지라도 오직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신 그 뜻을 사람이 깨닫고
보고 알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바로 구약 성전입니다. 구약 성전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
지도 모르는 것이요 예수님도 바로 알 수도 없고 바른 믿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늘 지성소를 모형으로 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곳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러 들
어가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이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 성막 문을 들어서면 번제단이 있는데 그곳에서 흠 없는 소나 양을 잡아 피 흘리고 번제로
제물을 드려야 다음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두 번째 물두멍이 있는데 그곳에서 수족을 깨끗이 씻어
야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세 번째 성소 안에는 등잔이 있고 떡상이 있
고 분향단(향로)이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온 것은 예수님 안에 들어온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번제
단과 물두멍을 통과해야만 예수님 안에 들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네 번째 성소에서 안쪽으로 들
어가면 지성소라고 하는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쳐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
는 장소로서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의 처소이기에 휘장으로 쳐놓았습니다.
그곳은 오직 하나님께 선택된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엄격한 규례로 자신을 정결케 하고 휘장
안(지성소)에 들어가서 피 뿌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정결의 규례를 한
가지라도 범할 시 들어가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휘장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림자이고 모형일 뿐입니다. 이것은 인간 중에는 지성
소 하나님께 들어갈 자가, 하나님을 만날 자가 아무도 없는데 오직 한 사람 대제사장만 하나님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전 지성소에 인간 대제사장이 들어간 것은 바로 하늘의
지성소 하나님께 들어가는 것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하늘의 대제사장만 들어간다는 예표요
상징입니다.
인간 중에는 지성소의 문, 휘장을 열 수 있는 죄 없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계획하신 뜻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자신의 몸을 찢
으심으로 휘장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 뜻대로 오직 죄도 점도 흠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몸 찢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심으로 그 휘장을 둘로
갈라 지성소의 문을 열어버리시고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께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입니다. "내가 문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막고 있는 이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께
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을 여셨습니다. 육체를 찢었
다는 것은 마27:51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신 말씀이 그 증거입
니다. 이같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하신 것은 사람은 누구든지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
고는 하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살길이 없습니다. 이 문
을 통하지 않고는 복을 받을 길도 없고 영원한 생명으로 갈 길도 없고 평안한 길도 없고 감사할 길
도 없고 용서할 능력도 없고 사랑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몸을 찢어 열어놓은
그 문은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지만 그것은 생명의 문이며 길이니 그 문으로 들어와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종교 중에 믿고 싶은 것 하나 택해서 믿으면 살길이라고 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기도 하
지만, 기독교 안에서도 요10:1에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라고 했습니다. 왜 다른 데로
넘어갑니까? 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단이 다른 데로 넘어간 절도요 강도입니다. 그러므
로 사단에게 속한 자는 목자(예수님께 속한 자)인 척은 하나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누룩을
섞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데로 넘어가는 절도요 강도인 사단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문
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니 예수님이 찢어져서 열렸습니다. 생명을 바친 희생이 없이는 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외는 누구도 문이 될 수 없는데 문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절도요 강도요 속이는 것입
니다. 속이는 문은 넓은 문이니 사람들이 쉽게 그리로 넘어가지만 생명을 도적질 당하고 강도질
당하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서 자연적 발생한 신심은 미신이요 그 미신에 교리를 붙이면 종교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
는 것은 인간 속에서 발생한 신심에 의하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하신 말씀을 받아들여
믿는 것이므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넓은 길입니다. 그런데 교회들도 넓은 길로
가라고 그것이 믿는 자의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의 길이니 속지 마라 하
십니다. 죄인 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게 된 이것은 문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와 협착한 길을 가기 때문인 것이요 그 소속은 천국이 되었으니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
신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우리의 영에 오신 성영님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것입니다.
천국의 것을 공급받는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굳게 닫혀있던 하늘의 문이 처음 열린 것은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영님이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임하시는 그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사역의 문
을 여시기 위해 성영님이 내려오셨을 때입니다. 이때는 예수님께만 열린 하늘입니다. 그다음 완전
히 열린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부활하여 하늘로 가신 뒤 성영님께서 오순절 날에
오셨을 때입니다. 성영님이 오신 사건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자는 열린 하늘이
되었으므로 지성소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성영님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하는 것은 뜻도 모르고 하는 잘못된 기
도요 삼위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기도입니다. 아니, 이미 열린 하늘 문을 또 열어달라고 하면 그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기도이겠습니까? 그래서 좁은 문은 하늘 들어가는 생명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
이요 이제 열린 문이 되어서 하늘지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께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니 이것이
복이요 하늘의 생명책에 자기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의 고통이 따른다
할지라도 오직 저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의 말이 문인 줄 알고 '랍비여'하며 따라다니며 들었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도 서기관보다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선생이여 하며 따라다녔
습니다. 메시아로 따른 것이 아니고 성경 해석을 잘하는 선생으로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많아도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 성전의 관계가 된 자가 없
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는 말씀을 잘 쪼개서 잘 전해준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말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잘 쪼갠다,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등등의 말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기 영혼을 말씀 쪼개놓는 목사에게 맡기고 죽을 말인지 살 말인지 알지 못하
고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말씀은 기차가 목적을 향해 가듯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에,
쪼개서 분산해놓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교회 가면 복을 받는다. 저 교회 가면 복을 받는다 말하고 또 복 받을 교회가 어딜까,
사는 것에 복을 좀 받았으면 좋겠는데 어떤 교회 가면 복을 받을까 하고 찾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의 관점에서 볼 때 복을 많이 받은 교회, 세상에서 명예 얻고 돈 많고 세상으로 성공하고 하는 쪽
으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힘쓰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능력을 갖추
게 해주고 협착한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기를 원하여 찾는 자는 극히 적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믿음 있는 자를 천 명 중에서 한 명 찾기가 어렵다고 하신 말씀이 맞는다는 생
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저울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
일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믿기 원하는 사람은 어떤 교회가 어떤 목사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말씀을 전하는 것인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신이 몸담으면 세속의 복을 받을
지를 찾는 것은 저주입니다. 삶의 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따르는 것이지만, 성경의 뜻을
바르게 전해주는 생명의 말씀은 아무 곳이나 있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누차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요,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복을 물질에다, 세속적인 것에다가 둘까 염려해서
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잘못 믿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면 신학교를 가야 하나 하지마는 신학교라는
곳은 하나님의 영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을 다 듣고 배워 자기에게 적용하기만 한
다면 신학교를 몇 번 나온다 해도 얻지 못할 영적인 복을 크게 얻을 것입니다. 지옥과 천국으로
나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 맺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여 우리로 좁고 협착한 길임을 알고 기꺼이 기쁘게 갈 수 있도록 은혜 베푸신 예수님께
무한 감사 올립니다. 아멘!!
제 16 장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협착한 길의 복.p335-p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