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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의 광기를 다스리는 법>의 줄거리: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잘못 되었다고 사람을 미쳤다고는 하지 않지요. 예수님 믿음은 정상인의 상태에 믿음이 덧붙여지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 믿음은 정상인의 선택사항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믿음 없는 상태의 모든 사람이 이미 미친 사람이라고. 혹시 지금 내게 나타나는 광기를 느끼고 계십니까?
나의 광기를 다스리는 법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의 광기를 다스리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의 광기를 다스리는 법’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이르러 광인(狂人)에게서 귀신을 쫓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쫓겨나간 군대귀신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갔고 바다를 향해 내달려서 몰살합니다. 이 내용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남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우리는 본문의 말씀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5장에 마찬가지로 돼지와 연관된 비유가 등장합니다. 탕자가 돼지우리에 머물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돼지의 사료를 먹고자 한다는 것은 돼지와 같은 처지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부정한 짐승으로써 하나님과의 칼 분리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둔다면 본문의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사람이 무언가에 열중할 때에 미쳤다는 말을 합니다. “사업에 미쳤다, 게임에 미쳤다, 자녀에게 미쳤다.”라는 식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은 사업에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사람이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게임에 미친 것이 아니고 미친 사람이 게임을 하는 것이고, 자녀에게 미친 것이 아니고 미친 사람이 자녀를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에게 불을 주면 자기 집에 불을 지릅니다. 그런데 바로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미쳐있을 수 있습니다. 미친 상태이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미친 짓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스스로를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정상인의 상태에서 예수를 믿고 믿음을 선택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를 광인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세례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세례가 의미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죽음과 하늘에 대한 거듭남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정상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죽어야 될 이유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상태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그 상태가 광인으로 상징됩니다.
본문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의 삶이 어렵고 굴곡진 이유는 광인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열중한다는 의미에서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사람이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관계가 어려운 이유는 자녀에게 미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미친 사람이 자녀를 키우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관계가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친 사람들이 결혼해서 서로를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상인이라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마가는 정상인이 아니라 광인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고 진짜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를 정상인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비정상으로 보지도 않고 미쳤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믿음이 허술하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부족하다고는 여길 수는 있지만 미쳤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반증이 됩니다.
본문의 무대가 되는 거라사 지방은 이방인의 땅입니다. 갈릴리 바다 아래로 흐르는 요단강을 경계로 서쪽은 팔레스타인 지방으로써 선민의 땅이었고 동쪽은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본래 동쪽도 르우벤 지파나 므낫세 반지파 등이 거주하는 땅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소실되어 이방인들의 거주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들의 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나타납니다. 바로 돼지 떼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써 선민들이 먹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규모 돼지 떼가 있었음을 볼 때에 거라사 지방은 이방의 문화가 완전히 자리 잡은 곳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나 뒤집히게 될 뻔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거라사 지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사건 이후에 도착한 곳입니다. 해변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고 그곳에는 군대귀신 들린 광인이 있었습니다. 군대라 함은 여러 귀신에 들려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으셨고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대신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예수님은 허락하십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돼지 떼를 비탈로 내몰아 몰살합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사건을 동네에 알렸고 사람들이 나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에 달리 아무 사역도 하지 않으시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말씀을 전하시지는 않았지만 이 특이한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설교로써 성립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예수님의 행적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라사 지방에 전도를 하시고자 가셨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아셨기에 광풍이 일어날 것과 광인과 돼지 떼가 있을 것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이 행위 설교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연히 거라사 지방에 가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원치 않아서 우연히 말씀을 전하지 않으시고 그냥 돌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기 전에 광풍을 만났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건만으로는 믿음 없음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던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행동에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광인과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자면 제자들은 스스로를 정상으로 생각했지만 실은 미친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써 미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가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거라사 지방에서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왕이신 예수님이 최우선의 관심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면, 마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의 상태가 문제시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본문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잘못 믿고 있다면 그것은 정상인으로 믿음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애초에 미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극단적으로 느끼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한 위험성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설교를 하는 저야말로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을 모두 미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면 저야말로 미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서기관들에게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매도당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마가의 관점은 지극히 타당하기에 저 또한 가감 없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광인에게는 특이한 성향이 있습니다. 3~5절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타나는데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힘이 강해 쇠사슬을 끊기에 아무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합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모습이 바로 우리가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마음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믿음의 없는 사람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상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라사 지방의 광인과 다름없다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광인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쇠사슬을 끊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스스로를 해하는 자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첫 번째 특징인 강력함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광인의 강력함이 상징하는 것은 곧 마음의 흡입력입니다. 앞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광풍을 만났습니다. 이 광풍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의 목숨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가지고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살고자 예수님을 깨웁니다. 살려고 하는 마음은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정상으로 보시지 않고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이 제자들의 상태가 바로 마음이 삶의 현장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일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마음은 몸이 처해있는 삶의 현장상황을 빨아들입니다. 그 빨아들이는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세상의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설령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극한상황에 처했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세상 빨아들이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광풍을 만나서 살고자 애썼던 것과 같이 마음은 몸이 마주한 상황을 빨아들이며 더욱 강하게 얽매이고 맙니다.
한편 이 광인에게는 군대귀신이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 레기온(λεγεών)으로써 로마군대 편제상 6,000명 단위였습니다. 실제로 6,000이나 되는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아니라 군대라 불릴 만큼 많은 귀신에게 강하게 붙들려있었다는 것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광인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듯이 마음은 그만큼 강력한 흡입력으로 육체로 만나는 상황을 빨아들입니다.
다만 이것은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몸으로 접하는 일들에 마음을 두는 것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로써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일이야말로 미친 사람에게서나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본래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판단을 받아 살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인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류는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들을 마음에 담고 스스로 판단하며 하나님과는 칼로 베어낸 듯 분리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보는 대로 마음에 빨아들인 것들이 지정의를 자극하여 언행을 발생시킵니다. 이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아무도 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으로 세상을 빨아들이는 동안 본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과는 분리되기에 마음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마가는 거라사 지방의 광인을 통해 이 점을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실제로는 6,000이나 되는 군대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미친 삶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러한 상황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할 수 없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광인의 특징은 자해행동입니다. 자해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는 누구나 자해하며 살아갑니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이 본래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문제인 상황이 있습니다. 이때에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자녀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지정의가 언행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면 마음에서 붙잡게 된 자녀가 나의 지정의를 자극하여 언행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나의 지정의와 언행이 하나님의 지정의와 언행을 파괴하는 형태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광인의 자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진실입니다.
마가는 마치 엑스레이를 찍고 내시경으로 보듯이 마음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만 보아서는 결코 이 마음의 문제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곪아터진 속병을 안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마가는 광인을 상징으로 삼아 이 마음의 문제를 깨닫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돼지와 탕자가 동일시되고 있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돼지는 부정함의 상징으로써 즉 하나님과 칼 분리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겼기에 키우는 사람도 없고 먹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이방 땅인 거라사 지방을 찾으셔서 돼지 떼에게 귀신이 들어가게 하신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을 포함한 선민들의 마음 상태가 이방인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이라고 모여살고는 있으나 이들의 마음은 모두 돼지처럼 부정하여 하나님과 칼 분리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돼지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몰살당하는 장면은 마치 노아 홍수에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몰살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전혀 다른 이 두 사건은 실은 같은 연관성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가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마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연관성입니다. 군대귀신이 들린 광인은 쇠사슬을 끊는 강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강력함으로 세상의 상황을 빨아들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돼지와 동일시되는 하나님과 칼 분리된 부정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은 노아 홍수에 쓸려가듯이 바다에 빠져죽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마가복음이 세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는 바로 하나님과 칼 분리된 상태가 미친 상태임을 깨닫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는 사건입니다. 이 세례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광인은 군대귀신에게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을 때에 정해진 미래는 오직 물에 빠져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광인이 예수님을 마주하고는 달려와 절합니다. 이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향해야함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이 광기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간절한 바람대로 우리는 미친 상태에 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러한 내가 물에 빠져 죽어야만 하는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돼지처럼 물에 빠져 죽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주할 때에 달려가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을 빨아들이고자 하는 이 광기어린 힘을 중단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떤 수련도 어떤 방법으로도 어떤 무기로도 세상을 향하려는 마음의 흡입력을 중단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빨아들이려는 마음이 미친 상태에 놓여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돼지같이 부정한 상태가 되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거라사 지방의 광인의 모습이 나의 마음 상태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군대귀신이 쫓겨나가듯이 나를 정복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광기는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마가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은 몸에 난 병이 아닙니다. 돈이 바닥난 것도 아닙니다. 승진에서 탈락한 것도 아닙니다. 실직을 한 것도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도 아닙니다. 바로 마음이 세상을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상황이 제일 무서운 일입니다. 이 광기만 중단된다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 속에서 살고자 몸부림치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빨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기에 세상을 무서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을 빨아들이는 마음은 정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미쳤음을 깨달아야만합니다. 이 광기는 군대귀신처럼 우리의 마음을 세상을 향해 더욱 강력하게 몰아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에 세상을 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상황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미친 짓임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광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만 중단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자해를 통해 망가뜨리기만 했던 불행한 삶의 역사에도 종지부가 찍힐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스스로를 정상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미친 사람들을 향한 마가의 애끓는 심정이 느껴집니다. 성령에 감동된 마가의 바람대로 나의 마음상태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도록 우리의 믿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