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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헤라디야
마크 포스터는 제가 참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선 <스트레인저 댄 픽션(Stranger than Fiction, 2006)>을 가장 좋아해서, 혹여 실존상담과 관련된 주제로 강의를 나갈 때면 학생들과 함께 보는 시간을 꼭 만드는 영화예요. 감독의 2004년작인 <네버랜드를 찾아서(Finding Neverland)>도 저를 펑펑 울렸던 영화입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켄싱턴공원에서 조니 뎁과 아직 어렸던 프레디 하이모어의 진솔한 대화로 구성된 엔딩씬은 늘 생생합니다.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 2007)> 또한 이 감독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영화죠.
마크 포스터의 영화에는 언제나 미묘한 서정이 흐르는데요. 미묘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서정의 탄생이 영화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에 대해 정직함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의 영화 속에는 정직하게 삶을 맞이하고 살아내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가득 그려집니다. 너무나도 명백한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슬프고도 경쾌하게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작은 호흡을 일구어가는 '인간 외에 다름아닌 그 존재'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거기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담긴 의도는 결과적으로 소박한 서정과 과잉되지 않은 온기를 자연스레 관객의 가슴으로 이끌게 되죠.
진정성(authenticity)이란 단어에서 우리가 곧잘 담보하게 되는 교조적인 중력이 소실된다면, 아마도 마크 포스터의 영화는 바로 그 단어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들이 아닐까 하네요. 뭐 그렇단 얘기입니다. 정직하게 드러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추구가 여러모로 마크 포스터의 영화를 즐겁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2. 영웅은 실존한다: 반항, 그 참여와 초월의 몸짓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전지구에 좀비화가 진행되고 인류는 괴멸 위기를 맞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UN 소속의 조사관 제리(브래드 피트 역)가 파견되고, 그는 세계의 각 지역을 탐색하며 정보들을 수집해갑니다. 2시간 가량의 런닝타임 동안 영화는 제리의 여정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삽화들로 구성된 원작소설과는 사뭇 다른 구성이기도 합니다.
제리는 우수한 조사관답게 정합적 인과관계를 따라 탐색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단서를 따라 이동하게 된 다음 지역에서는 기존의 단서가 무의미하게 되는 현실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현상의 논리적 필연성이 구조적으로 붕괴된 것이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러한 과정은 영화 속에서 강렬하게 묘사됩니다. 그렇게 사건들은 쉽사리 유의미한 선을 이루어 떠오르지 못하는 개별적인 점들로만 남습니다. 현재의 사건은 과거의 원인을 견인하지 못하고, 기대된 미래로 인도하지도 못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의 자각은 마침내 만나게 된 선지자적 전문가의 진술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우린 좀비가 왜 생겨났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발원지 또한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굳이 그걸 아는 일이 중요합니까?"
네. 세계의 부조리함이 이제 막 태동하였습니다. 그 말은 베팅할 칩이 실존주의로 넘어 왔다는 얘기이기도 하죠.
이 시점에서 카뮈의 대표적인 소설인 <페스트>는 함께 주목해볼 만한 작품입니다. 이유도 없이 갑자기 페스트가 창궐해 무수한 시민들이 죽어가는 오랑이라는 해안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이 영화와 흡사합니다. 좀비와 페스트라는 소재는 사실 유사한 면이 많죠. 둘 다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파괴력과 전염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영향력을 통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인 자체를 이해할 수도 없다는 점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처럼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사건의 발발, 바로 그 무시무시한 불가해성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오직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한다는 점이, 두 작품의 공통적인 실존적 주제로 가장 특징 있게 드러납니다.
사실상, 삶(세계, 운명)의 부조리에 대응하는 실존의 형식 속에서 '왜?'라는 질문은 억울한 항변의 외적 표현이 되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기능도 갖지 못합니다. 선험적 본질이 결여된 인간의 한계 속에서는 대답이 허락될 수 없는, 즉 애시당초 물을 수 없는 것을 묻고 있다는 모순을 우리가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다면, 해당 질문에 대한 그 어떤 대답이라도 해석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겸허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유려한 해석이라 할지라도, 해석은 결코 실재에 직접 가닿지 못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괜히 멋부리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라고 강조한 건 아니죠.
<페스트>에서도 이러한 주제에 대한 구성이 돋보입니다. 연구자들, 정치인들, 종교인들, 도시 안의 전문가들은 저마다 '왜' 이러한 고통이 우리를 습격했는가에 대한 해석들을 제시하죠. '왜'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을 제시하면, 마치 그 고통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이건 너무나도 구태의연한 고전적 착각입니다. 인간의 도구적 이성을 전능하게 신격화하고 있는 맹신이 불러일으킨 착각. 실존주의는 정확하게 이 지점을 파고 듭니다. 부조리 앞에서 해석놀이를 멈추고 '어떻게' 실재에 접촉할 것인가? 실존적 인간상은 이렇게 기획됩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리외는 의사입니다. 그 또한 재앙의 원인들을 규명하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는 것을 경험하였고, 또 그만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또 하나 둘 치료해나가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힘들고, 지치고, 외롭고, 해답 없는 현실 속에 절망하지만, 해석을 통한 비실재의 초대에 대한 욕구를 뿌리친 채 정직하게 그 자리에서 발버둥칩니다. 리외는 얘기합니다.
"사람이란 병을 고치면서 동시에 그걸 알아낼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치료부터 합시다. 오직 그것만이 급선무입니다."
그의 발버둥은 그렇게 실재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지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순수한 '참여' 외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실재를 삶으로 끌어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카뮈의 제안에 따라, 발버둥이라는 단어를 보다 감칠 맛 나는 표현으로 치환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반항'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실존적 인간상으로서의 '반항하는 인간'이 바야흐로 탄생합니다.
그는 비실재를 양산하는 모든 관념, 논리, 해석에 반항합니다. 아니, 참여가 거세된 모든 비실재에 반항합니다. 그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살아내는 일입니다. 그는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고, 인간 이상의 권능을 꿈꾸는 자도 아닙니다. 그는 차라리 슬퍼하고, 분노하는 자입니다. 의사 리외가 느꼈던 슬픔처럼, 그의 슬픔은 "모든 인간이 함께 나누는 고통과 마주 섰을 때 느끼는 견딜 수 없는 분노"입니다. 그렇게 그가 슬퍼하고 분노하기에, 그는 가장 겸손한 자가 됩니다. 그를 슬프고 화나게 만드는 그 한계, 바로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이처럼 가장 정직한 형태로 고백하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아마도 '반항'이란 '한계에 참여하는 겸손한 행위'로 정의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모든 문을 열리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문 앞에서 그 문을 두드리는 것뿐입니다. 닫힌 문에 참여하지 않고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즉, 한계에 참여하지 않고는 한계를 돌파할 수 없습니다. 그 한계 자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바로 비실재입니다.
<페스트>에서는 비실재에 영합하여 참여를 소외시킨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들은 늘 자신(인간)만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즉, 그들은 휴머니스트였다. 그들은 재앙을 믿으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재앙이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그저 비현실적인 악몽이고, 곧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재앙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건 오히려 사람들이다. 특히 휴머니스트들은 맨 먼저 사라진다. 물론 그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겸손할 줄 몰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 때문에 재앙 같은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재앙이 존재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오늘날 역시, 모든 비실재는 유혹합니다. 자아팽창과 해결중심적 기술패러다임이 결합된 뉴에이지는 특히 심합니다.
"네가 있는 곳, 그곳이 이미 문 저편이다." "문은 인간의 관념이 만든 환상이다. 문과 싸우지 말고 오로지 그대의 환상과 싸우라." "문을 두들기며 증오와 불신과 고독 속에서 삶을 낭비하지 말라. 그대가 이미 가진 날개를 사용하라." "지혜로운 자는 닫힌 문이 있으면,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지 않고 문 옆으로 돌아간다." "문은 그대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닫혀 있으면 그것은 그대의 문이 아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어느 문이든 소용없는 것이거늘. 쯧쯧." "두들기며 힘빼지 마라. 열린 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예쁘게 황금빛 테두리로 담아 소망하면, 열린 문이 존재하는 현실이 끌어 당겨진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뾰로롱-"
반항하는 인간, 실존주의자는 그냥 촌스럽고 투박하게 울면서 문을 두드립니다. 뒤에서 밀려오는 페스트의 악의에 찬 숨결과 좀비군단의 거친 괴성에 겁먹고 두려워져,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빽 지르면서도, 그는 쉬지않고 문을 두드립니다. 개처럼 정직하게. 그리고, 문은 반드시 열립니다. 실재는 반드시 그를 문 안으로 영접합니다. 이처럼 실재가 그를 허락하도록 이끈 것은 오로지 그의 참여, 그의 반항, 그의 발버둥뿐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됩니다.
제리가 인류가 처한 한계상황을 돌파해낼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잡게 된 건, 모든 관념적 단서들이 개연성을 잃고 추락하여 사건의 정합적인 해결 가능성이 상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펼쳐진 그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한 걸음씩 정직하게 그 경험들 속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배웠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고, 실재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재가 정말 맞는지, 즉 문이 열린 게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 제리는 좀비 앞에서 표현 그대로 '문을 엽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들어서며 실재의 힘에 본격적으로 참여합니다. 아마도 이 영화 속 최고의 장면일 것입니다.
제리가 좀비에게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한 영웅이 된 방식처럼, 한 인간의 참여가 그를 영웅으로 화하게 합니다. 참여는 거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혹은 특정한 정치운동이나 이념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여란 그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과 내가 분리될 수 없는 맥락에 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그 맥락 안에서 실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 그게 가장 정확한 참여의 의미입니다.
잘못 이해된 '초월'의 개념은 마치 '참여'와 대립각을 형성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아초월심리학의 대가인 윌버가 곧잘 인용하는 개념인 "포함하고 초월한다."의 의미가 참여에 대한 진실한 묘사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초월은 오직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감지하는 데 우리가 이미 충분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잭 엥글러의 잘 알려진 선언을 다음과 같이 의역한다면 조금 더 명료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월하기 위해선 먼저 참여해야만 한다(You have to be somebody, before you can be nobody)."
바로 이처럼 참여라는 개념이 그 자체로 초월성을 담지하기에, 한 인간은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발버둥치는 한계를 정직한 한계로 보지 않으려는 비실재의 요구에 대해 실재를 수용함으로써 반항하는 길, 한계 속에서 자신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위치시키는 목소리에 대해 적극적인 능동자로서 반항하는 길, 피조물임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겸손한 피조물로서 반항하는 길, 이 반항의 길들, 카뮈에 따르면 곧 참여의 길들을 우리는 대체적으로 '실존적 삶'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껏 멋을 부린 표현으로, 실존주의는 자기 삶의 무수한 영웅들에 대한 생생한 무용담입니다. 영웅이 되고 싶나요? 실존주의의 문을 두드리세요. 제리가 증언합니다.
"당신이 싸울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싸워라."
3. 자연과 초자연, 혹은 생명과 비실재
혹시 깜깜한 밤에 아무도 없는 산 속에 머물러 본 적이 있다면 '외경'이라는 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초적 심상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자연에는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자극하는 것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거대한 대상에게 느끼는 무력감과 위축 그리고 공포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늘 우리에게 외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곧 자연이기도 하죠. 시작과 끝이 자연법칙에 철저하게 귀속되어, 그 법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네의 삶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인간의 삶에는 이미 외경의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확실하게는 '죽음'이 그렇겠죠. 얄롬이 제안한 실존상담의 4가지 주제들인 죽음, 자유, 무의미, 고립 역시도 우리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외경을 야기하는 개념들일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통제권을 주장하기를 멈추고 그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이처럼 삶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과 외경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 외경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상기시켜줍니다. 사실상 우리는 문명화된 오늘날의 삶에서 외경적 요소들을 많이 상실해왔습니다. 그럼으로써 삶의 근원적인 부분의 활력 또한 함께 잃어버렸죠. 미국의 실존상담자인 슈나이더는 이 외경의 회복이 얼마나 많은 신경증을 치유하고, 한 인간을 그의 삶의 생동감 넘치는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지에 대해 거의 기적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외경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끊임없이 펼쳐놓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놀이동산에서 보다 강도 높은 롤러코스터를 체험하기 원하고, 지랄같이 매운 떡볶이를 입에 넣으며, 더욱 자극적인 미디어 소비에 열을 올리는 이유들은 모두 다 이 외경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것'이기도 하죠. 외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험이 창조됩니다. 모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신선하며, 활력있고, 빛나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우리는 외경을 잃은 만큼, 모험을 잃었고, 삶의 신비를 잃었습니다.
자, 좀비영화요. 앞서 얘기한 슈나이더는 공포영화들을 실존적 주제로 엮은 흥미로운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공포영화들이 외경, 즉 원초적인 공포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의 좀비영화는 외경에 대한 현대적인 요구와 아주 친밀하게 보입니다. 스피드, 욕망, 대량생산, 생존경쟁, 보편화, 개체정보의 확산 등의 현대적 기호품들이, 폭력, 살해, 포식자, 야성 등의 외경을 자극하는 고전적 감성과 아주 잘 결합된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좀비영화는 외경에 대한 수요를 잘 충족시키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말은 다시 얘기하면 좀비영화가 곧 생생한 삶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켜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외경의 회복에서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이제 삶이 이 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삶이 아닌 것이 정당한 대극으로 저 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좀비영화에서는 이 구도가 인간 대 좀비라는 형식으로 그려집니다. 좀비, 즉 삶이 아닌 것에 위협받음으로써 인간의 삶이 더욱 절실한 생생함을 띠게 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이 구도는 진실입니다. 삶이 아닌 것을 직면함으로써 삶은 그 생기와 온기를 비로소 담보하게 되는 까닭이죠. 그런데 이 영화의 구도는 좀 더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삶과 대립하는 요소가 더 절묘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먼저 이 질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삶(live/life)'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는 '죽음(dead/death)'이라고 얘기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재치있어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면 '악(evil)'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삶의 반대요소, 즉 인간과 대립하는 좀비의 명칭을 바로 '죽지 않은 것(undead)'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삶'의 대극인 '삶이 아닌 것'은 '죽지 않은 것(죽음이 아닌 것)'이 되어 삶과 대립하게 됩니다. 언어적으로 이 구도는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삶이 아닌 것은 곧 죽음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에 대응하는 반대편에서 삶은 곧 죽음이 되고요. 결국 삶과 죽음은 이러한 방식으로 근원적인 생명의 한쌍으로서의 입지를 회복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도식이 가능할 수 있겠죠.
(삶=죽음) VS (삶이 아닌 것=죽음이 아닌 것)
이제 우리는 괄호로 묶인 전자의 모둠에 '자연'이라는 이름을 붙여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의 순환을 내포한 보편적인 자연법칙 속에서 온전한 전체성을 획득한 유기체적 삶의 표현으로서 말이죠. 그리고 후자의 모둠에는 자연법칙을 벗어났다는 의미로 '초자연'이라는 표현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도식은 결국 다음과 같은 형태로 치환 가능합니다.
자연 VS 초자연
자, 그렇다면 인간은 이 운명적인 대결의 장에서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 이 질문은 잘못되었습니다. 애초에 인간이 우리에게 제공된 생명의 탯줄을 끊고, 생명이 없는 쪽을 택하는 일이 과연 성립 자체가 가능하기라도 한 얘기일까요?
그러나 놀랍게도 이 시대에는 후자를 선택하라고 달콤하게 미혹하는 목소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초자연적 법칙을 선택해, 죽지 못하는 자신의 욕망을 비실재적으로 끝없이 추구하는 좀비와 같은 존재가 되라는 유혹이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더는 새삼스럽지도 않게, 영성장사꾼들이 득세하는 뉴에이지 영성판은 개판 일보 직전입니다.
유혹하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우리에게서 자연을, 외경을, 그 생생한 삶의 실재를 앗아가고, 대신 우리에게 공허한 담배연기와 같은 장미빛 신기루만을 주입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초자연적 법칙의 본질은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서 회색사나이들이 사람들의 시간을 뺏아가며 주장하는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시간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진짜 시간'을 우리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당신을 힘들게 하는 당신 눈 앞의 '거짓 시간'을 버리고 줄여가며, 우리만 따르세요. 거기에 대한 큰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때론, 아니 빈번히 협박도 있습니다.
"어허, 사장님 참, 말 안듣네. 지금 당신이 헛되이 보내는 시간을 빨리 없애고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당신에게 중요한 시간이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진다니까요. 빨리 5000달러 계좌이체하시면 특별히 당신의 시간을 저축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알려드릴 수 있어요. NASA의 잭슨 폴럼 박사가 오메가양자물리학과 테슬러 박사의 무한동력원리를 응용해서 개발한 반양자마이크론시공중합기로 우리는 당신의 구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거, 잉카 피라밋 만들어진 원리랑 똑같아요. 자, 소행성 충돌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10, 9, 8, 7-"
이러한 비실재의 목소리에 맞서 싸우는 회의주의(Skeptics) 학파의 연구자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파괴를 위한 파괴자들이거나, 종교 또는 영성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있는 그 자체로서의 온전한 자연법칙을 존중하고, 미지의 자연에 대한 외경을 담고 있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 연구자들의 목표는 인간이 진리에 대해 정당한 의문을 갖고 탐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실재의 함정에 빠져 있는 동안, 실재에의 길은 가로막히게 된다는 것이죠.
회의주의 학파 중 『주술적 과학: 어리석음에서 사기로 가는 길(Voodoo Science: The Road From Foolishness to Fraud)』의 저작으로 유명한 로버트 파크 박사는 비실재를 야기하는 대표적인 분야인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그 기만과 허위를 파헤치기 위해 사이비과학이 갖고 있는 7가지 특징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1. 발견자가 비판과정을 거치지 않고 주장을 직접 인터넷 등의 대중매체에 발표한다.
2. 발견자는 강력한 기성체제와 권력이 자신의 연구를 방해한다고 말한다.
3. 항상 발견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4. 발견에 대한 증거가 정서적이고 일화적(逸話的)이다.
5. 발견자가 자신의 발견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믿음이어서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6. 발견자가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작업을 한다.
7. 발견자가 보편적 자연법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연법칙을 먼저 제시해야만 비로소 어떤 관찰내용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중에서 7번의 특징은 비실재를 종용하는 목소리들이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초자연적 개념을 이용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우리의 생생한 삶이 기반해 있는 자연을 버리고 초자연의 논리를 따라야 할까요? 우리가 무슨 이유로 생명을 감사히 누리는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욕망에 착취당하는 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지상에서 바로 우리의 눈 앞에 존재하는 실재를 외면한 채 비실재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까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제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건 동시에 '삶이 아닌 것'의 위협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닌 비실재에 위협받는 비실존적 존재, 그건 정확하게 <미생>의 작가 윤태호 화백의 표현처럼 '아직 살아있지 못한' 미생(未生)의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게 초자연이, 비실재가, 우리의 실존을 질식시키기 위해 우리의 목줄을 거머쥐려고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삶과 죽음의 실존이 있는 곳으로 생명의 여행을 떠나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는 바로 그 여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모든 구원은 한 개체가 자신의 한계를 자연법칙 안에서 적극 설정하고 그대로 행위했을 때, 즉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실제적인 죽음의 가능성을 정직하게 삶에 '투여했을 때' 발생합니다. 이처럼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가 모든 것을 앞설 때, 그때서야 비로소 '죽음이 아닌 것'이 '죽음' 자체를 통해, 또 '삶이 아닌 것'이 '삶' 자체를 통해 극복됩니다. 아직 살아있지도 못하고, 차마 죽지도 못하던 비실존적인 미생(未生)의 존재가, 생명에의 참여를 통해,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생명의 길에 서있는 그를, 어느 누구도 더는 감히 위협하거나 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음을 삶에 투여한 그를 다시금 죽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산 자를 살릴 수는 없고, 죽은 자를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는 완벽하게 온전합니다. 그게 생명, 아니 여기서는 생명이라는 표현의 이음동의어가 보다 수사학적으로 유용하겠네요. 네. 그게 '존재 그 자체'의 힘입니다. 바로 그렇게, 생명이 승리합니다.
4. 읊조림
"그대는 현재 그대의 조건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인생을 그대가 살든지, 그대는 정확히 지금 그대가 놓여 있는 경험들 가운데서 살아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대는 승리하거나 패배해야 합니다. 어떤 불안이나 불평도 그대의 몫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조건이 있을지 몰라도, 여기에는 그대의 것이 있습니다. 그대는 그대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현재의 조건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 제임스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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