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으로 처조카의 딸 돌잔치에 참여했다 하나뿐인 처남의 손녀딸 돌잔치. 오히려 계기에 처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여 잔치상을 받는 분위기이다
탄방동 비씨씨킹덤 부페집에서 11시부터 시작한 모임이 시끌시끌 소란하며 2시에도 일어설 줄 모른다
모임을 마치고 인근 도산서원을 찾았다
대전에도 도산서원이 존재한다. 이쪽은 한자가 陶山이 아니라 道山으로 다르다. 1693년(숙종 19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득기와 권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1711년에는 사액도 받았으나 서원 철폐 당시 훼철되었고 나중에 안동권씨 집안에서 자력으로 복원하였다.
도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으며, 1921년 지방유림이 단(壇)을 세우고 춘추로 향사를 계속하여 왔다. 그 뒤 1968년 사우(祠宇) 3칸과 묘문(廟門) 3칸을 중건하였으며, 1973년 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대문·전사청(典祀廳) 등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함덕사(涵德祠), 내삼문(內三門), 5칸의 명교당(明敎堂), 3칸의 시습재(時習齋), 3칸의 지선재(止善齋), 2칸의 전사청, 정문인 향직문(向直門), 4칸의 재실(齋室), 4칸의 수호사(守護舍) 등이 있다. 사우인 함덕사에는 권득기와 권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권득기는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 권박(權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령 권덕유(權德裕)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권극례(權克禮)이며, 어머니는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선공감역 권극관(權克寬)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권득기는 당대 거유로 박지계(朴知誡, 1573-1635)와는 도의지교이었으나 학문적으로는 격물치지(格物致知) 논쟁을 전개하였다.
이 논쟁은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나,
성혼(成渾)과 이이(李珥)가 벌인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의 논쟁에 버금가는 성리학적 논쟁이었다.
권득기는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을 때에 포저(浦渚) 조익(趙翼)과 편지를 받으며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
탄옹 권시는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아버지는 좌랑 권득기(權得己)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도정(都正) 이첨(李瞻)의 딸이다.
남달리 총명하여 중국의 안자(顔子)에 비견되는 평을 받았다.
학문이 뛰어나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고, 후에 사돈이었던 송시열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서인(西人)으로 활동하다가 1660년 기해예송에 대한 의견으로 다툴 때 같은 서인인 송시열의 편을 들지 않고 남인 윤선도의 편을 들었다가 송시열 일파에게 미움을 받았다.
1649년.효종 즉위 후 특별 지시와 사돈이었던 송시열(宋時烈) 등 문인, 학자들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여러 요직을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승정원승지가 되었다. 1659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1660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상복을 입는 문제에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차남의 예로서 1년상을 주장하는 서인과 장남을 대신한 장남이며 왕통과 적통을 이간하려 한다는 남인간의 공세와 싸움이 벌어지자 그는 당론을 따르지 않고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게 되었다. 윤선도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생명을 걸고 서인을 공격하는 태도를 보고 이를 용기가 가상하다고 평가했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었다.
아버지와 아버지 친우인 박지계, 조익 등에게 영향 받아 예론에 밝았기에 서인의 당론이 학문에 위배됨을 알고 윤선도를 지지한 것 뿐인데 이에 대한 같은 당파 서인들의 보복은 참으로 비열하면서도 혹독했다.그렇기에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후 남인으로부터 일부 지지를 받아 서인 강경파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668년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충청도 공주(유성구 탄방동)로 돌아와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런 연고로 탄옹 권시 주변의 가족관계가 복잡하다
아버지와 친했던 박지계 가문인 박지경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젊은 시절 서인 기호학파로 예론에 밝았기 때문에 차남 무옹공 권유는 송시열의 큰딸과 결혼해 사돈을 맺게 된다
장녀 권아는 윤선거의 아들 윤증에게 시집을 보냈다
차녀 권혜는 백호 윤휴의 아들 윤의제에게 시집을 보냈다 서인과 남인 학계를 좌지우지했던 인물들을 아우르는 관계이다
이런 사정으로 이후 탄옹 권시의 후손들은 주로 남인계로 살게 된다
나중에 서인들이 남인을 몰살시키기 위해 행해진 천주교 박해에서 그 시초가 되었던 진산사건의 두 인물 윤지충과 권상연 중 권상연은 권시의 후손이다 권시-무수옹 권기-권이현-권기징-권세학-권상연으로 이어진다
권기징의 외손이 천주교 박해 초대 순교자들인 윤지충과 유항검, 유관검이다 그 외손자 윤지충과 외사촌형제가 바로 정약용 형제들이 되는 것이다
또 이 가문에서 주목할 인물은 유회당 권이진이다
유회당 권이진은 외할아버지가 송시열이고 스승은 윤증이었지만 남인의 삶을 산다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선생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학인(學人)으로서, 또 국정의 개혁과 복리증진에 노력했던 경세관료로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를 둘러 싼 남인·노론·소론의 척분과 학연은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학자요 경세가로 굴기하는데 자양분이 되었지만 정쟁의 와중에서 감수해야 했던 수난과 곡절은 결코 심상한 것은 아니었다.
호서지역 또는 남인 명가를 얘기할 때, 안동권씨 유회당 가문을 입론의 대상으로 삼는데 주저할 논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조야를 풍미했던 탄옹(炭翁) 권시(權 諰)·우암(尤庵)송시열 의 내외 혈손이라는 가문적 배경 때문만도 아니고, 과거를 거쳐 정경의 반열에 올랐다는 정치적 현달 때문만도 아니다.
만회 ·탄옹가의 자손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가정에서는 효제충신의 도를 익혔고, 사회적으로는 명사를 편방하여 유학적 소양과 경세가로서의 조예와 식견을 연찬·온축함으로써 치가는 물론이고 국가 경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27세에 용문에 올라 67세로 고종하기까지 꼬박 40년 세월을 환해(宦海)에서 부침하며 영욕을 교감하면서도 보본(報本)사업에 혈성을 다하고, 밀암(密庵) 이재(李栽),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등 당대 석학들과의 난상토론을 통해 퇴계학의 유연성을 강조하였으며, 동래부사 재임시의 외교적 치적, 어전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재정 관료로서의 지론과 엄정한 실무 집행은 분명 동시대의 여느 식자들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유회당에 대한 인간적·역사적 평가의 초점도 정치사적 관점보다는 학인으로서, 경세관료로서의 면모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만회에게서 망울을 맺어 유회당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운 유교적 실천의식은 이후 하나의 가풍으로서 전승·발전되었는데, 유회당 사후 10여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손들이 무실에 바탕하여 시대 사조와 학풍을 선도하며 청신(淸新)한 가풍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성호 이익이 유회당의 묘지를 찬하여 그의 행덕을 기렸고, 성호의 손자 이구환(李九煥)이 유회당의 증손서가 되어 통가지의(通家之誼)를 맺은 것에서도 실학 정신에 바탕한 소통의 구조를 확인 할 수 있다.한편 유회당의 선대는 대대로 서울에 세거하며 양주 및 광주낙생 일대에 분묘를 조성하였으나 1627년(인조5) 조부 탄옹이 탄방(炭防) 복거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호서사림에 편입되기에 이르렀고, 40세 되던 1707년(숙종33) 유회당이 다시 탄방에서 2O리 떨어진 무수동(無愁洞)으로 솔가 이주 하였다.
이후 무수동은 단순히 주거의 공간을 넘어 보본추원(報本追遠), 돈친목족(敎親睦族), 학문연마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하며 유회당 가문의 백세터전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유회당의 학문적 성장과 정치적 현달은 탄옹가문의 가격(家格) 신장에 기여하는 한편 「유회당가문」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호의 형성을 수반하였다. 이후 그의 자손들은 만회⇒탄옹⇒유회당으로 이어지는 가학 연원에 바탕하여 문로(門路)를 확립하였고, 사환·학문·문화 등 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가성(家聲)의 유지와 발전에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