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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8강) 메시야가 하는 일
본문<요1:35~42>
당시 세례요한은 유대교에서 크게 이목을 끌던 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에 이 분이 ㅎ님이 보낸 선지자 아니면 메시야로 여겨져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대표격인 두 제자가 요한이 하는 말(저 분이 ㅎ님의 어린양이시다)를 듣고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장면이다. 두 제자란 안드레였고 익명의 사람인데(요한)이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계속 자신을 익명으로 기록 함(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언급)
중요한 것은 세례요한은 자기의 유능한 제자 둘을 먼저 예수께 양보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자기 양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교회로 가면 ‘내 양을 훔쳐간 도둑’이라고 분을 낸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같은 교단에서는 교회 개척할 때에 근처 몇 키로 밖에서만 하도록 교회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양 도둑질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처방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수많은 다른 교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때문에 이런 교회법도 유명무실하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게 있다. 목사가 신자보고 ‘내 양이다’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종교 집단에 속해 있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그 유대교에서 빼내오는 일이었다. 알고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양 도둑의 원조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감당치 못하는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설교는 복음으로 주님의 양들을 세상에서 빼내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만드는 일이다.(눅11:21-23)을 보면, 전도를 통해 주님의 양으로 모으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소유를 지키지만,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가져간다’라고 말씀 하신다. 유대교의 주인들인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이 무장을 하고 자기 양들을 지키고 있었지만, 더 강하신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의 유대교 교리를 깨뜨리시고 복음으로 양들을 불러내어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신자를 자기 소유로, 자기 재물로 삼고 있는 종교의 감옥에서 복음으로 해방시켜서 자유케 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유대교와 다를 바 없이 거의 흡사하다. 말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행함과 열심과 정성을 강조한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것인데, 대다수 교회에서는 사람의 종교적 열심과 정성이 있어야 구원도 받고 나중에 천국에 가서 상급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사람의 열심과 정성이 많은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호도하여 사람의 행함을 가장 큰 믿음의 가치로 삼게 하는 면에서 유대교와 동일한 노선을 지향한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가르쳤는데, 기독교는 다시 바리새인의 의로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꼴이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이 없고,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가 없는 교회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신앙의 진수이고 전부이고 핵심이고 알맹이인데, 어느새 이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인간의 열심과 헌신이 중요한 신앙의 요소로 둔갑한 거짓교회가 판치는 종교세계가 되고 말았다.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에 눈이 열린 목사들이 많이 등장하여 거짓 교회에서 거짓 복음을 듣고 있는 주의 양들을 다시 사로잡아 빼내오는 일이 많이 벌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배당은 큰데 정작 ㅎ님을 아는 진리에는 소경인 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신천지 같은 이단이 숨어들어가도 진리로 대응하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교회가 수두룩한 현실이 참 안타까울 뿐이다. 어찌 보면 변질된 기독교나 신천지나 매일 반이라는 말이다.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종교 집단일 뿐이다.
ㅎ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약속하셨다. 이른 비로 상징된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초대교회가 생겨나서 지금까지 2천여년 동안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면, 늦은 비는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말씀의 회복 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한번 성령에 의한 말씀의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서 세속화되고 율법화된 기독교가 십자가 복음인 은혜 구원으로 회복되기를 믿고 기대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보냈듯이, 유대교처럼 변질된 기독교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 다시 십자가 복음의 교회로 신자들을 보내는 역사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ㅎ님은 자기백성들을 시대를 물문하고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해 가심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 전체가 회심한다는 것은 인본적인 욕심일 뿐이다.
ㅎ님은 결코 실패가 없으신 분이시다. 가라지 집단에서 알곡을 찾아내어 구원하시는 게 ㅎ님의 일하심이다. 시139편의 말씀처럼 ㅎ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그가 바다 끝에 가 있든지 음부에 가 있든지 상관없이 빼낼 자는 다 사단의 손에서 빼내어 구출해 가시는 것이 ㅎ님의 능력이다.
본문을 보면,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으니까 주님이 그들에게 질문하신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것은 주께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던지는 동일한 질문이시다. ‘너는 무엇을 얻기 위해 예수를 따르냐? 너는 무슨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냐?’고 물으신다.
*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무엇을 얻기 위해 교회를 다닐까요?
-(좀더 쉽게 압축) 왜 그리, 여기저기 대형교회들이 즐비하게 존재할 까요? 거기에만 생명이 있어서? 거기에만 구원이 있기 때문일까요?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 봅시다.
<고전1:22~24> 읽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 유대인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말함. 이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함. 표적이란 겉으로 들어난 이적과 기적들을 말함. 무엇이 있을까요?( 병고침?, 축사?, 아말감 이빨을 금이빨로?, 장풍?, 예언? 등등의 소위 신사도 운동?~에서 강조하는 각종 신비주의, 은사주의 등을 말함). 뭔가 여기에 ㅎ님이 계신 것 같은 생각에 몰려든다.(복음 몰라서~ 소경)
(각종 은사?-고린도교회 .가장 말썽 많은../우상 창궐하는 데서 은사 주심의 이유?/ 마7장..불법을 행함..유기)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기복주의 설교일 것이다. 아마도 표적 중의 표적은 ㅎ님 믿고 부자 되었다는 말일 것임 (ㅎ님께 무엇을 했더니 부자됐다. 성공했다.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간증=아마도 이게 가장 크게 선호하는 기적일 것임).
엊그제 우연히 어느 유명한 목사 설교~유튜브 서핑하다가 잠깐 궁금해서..(~여러분 그냥 무턱대고 돈 달라고 기도하는 건 틀렸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크게 액수까지 말하라..나는 400만원이 필요하니 ㅎ님 언제까지 책임져 주세요! 했더니 정확히 주셨다=>아멘,아멘!)
모두가 돈에 목말라 있는 자들 아닌가? 그들에게 이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거짓된 응답사례를 예를 들면서 강대상에서 외치니 신자들은 그 말에 감격스러워서 그저 감지덕지 할뿐이다. 아니 그런 천기누설 같은 비밀이 있다니 하며 우리 목사님 최고~,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대형교회를 이루었나요? (10만 신자, 혹은 70만 신자가 모이는 교회가 되었나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두 부류로 나누어짐에 유의해야 함(하늘의 별/바닷가 모래, 무가치)
교회 간판은 분명 정통교단의 옷을 입은 교회이지만 속에서 가르치는 목사의 설교는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무당잡교의 푸닥거리인 것을 누가 알랴?(아는 자만 앎). 그래서 이사야 1장에서 ㅎ님은 대회로 모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신다. 대회로 모여 하는 짓이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바치면서 우리 소원 들어 주세요~식의 ㅎ님을 우상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술로는 ㅎ님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교회의 모습은 초대교회처럼 소수로 모여야 한다. 그래야 목사가 우상이 안되고 거짓말도 못한다. 많아야 오병이어의 모습처럼 50~100명 정도?, 아니 그 이하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래야 진리 안에서 서로 교제하며 ㅎ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에 적절하다. 그래서 ㅎ님은 계속 흩으신다. 초대교회 때도 행8장에서,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각지로 흩어지게 하셨다. 행8: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하더라’(함).. ㅎ님은 흩으시기 위해 스데반의 죽음을 허용하시는 비상수단을 사용하셨다. 대형교회로 모이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가 않다. 또한 정통교단도 믿을 게 못된다. (양의 옷을 이리 떼들임. 거기서 나와 독립교단, 독자적.. )
유(표적을~)/다음, 헬라인은 지식을 구한다는 의미는? (헬라인은 모든 이방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교회 생활을 통해 좀 더 고상하고 품위있는 종교를 갖으면서 상류급인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제하며서 지적인 면이나 정서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받고자 신앙 생활하는 자들을 말한다.
제가 집사 때, 곽선희 목사라는 분 설교를 몇 번 들었는데, 이 분 설교는 예수에 대한 내용은 없고 마치 대학교 철학교수나 윤리교수 같이 인생지침적인 교양과 고상한 인격함양 등을 강의한다. 그런 걸 추구하는 자들은 거기가 좋아 몰려드는 것이다.(무늬만 교회, 교회가 다 같은 게 아님. 다 각기 색깔이 있음, 가라지들도 형형색색 제각기 단으로 묶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4절,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의 표적도 아니고, 헬라적 지식도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생명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당면한 영적인 기근과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오직 하나의 정답은 IX밖에 없음을 아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18~21절> 보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정답이라는 말씀. 십자가의 도(로고스)는 말씀, 한마디로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ㅎ님의 구원 방식을 십자가의 도라고 함
(실화/예),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하고 귀국하는 미국의 어느 선교사를 환영하는 의미로 항구에서 기념설교를 하게 됨.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기대에 찬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데 그 선교사의 설교는 간단명료하게 끝남-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만 구원되니 모두 예수 믿으라는 것(복음을 전하고 끝냄)-선교지에서 있었던 무용담을 기대하고 수십 년 간의 선교 성과가 어떤가를 듣고자 했던 자들이 실망하고 돌아감. 가장 기본적인 복음 설교를 하게 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예수 십자가 외에 내가 해줄 말은 없다, 다시 해도 그 말 뿐이다..) 이런 분이 참된 ㅎ님의 종이요 복음의 제사장이다.
21절,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그리 정하셨다는 의미)
전도란 복음을 전해서 ㅎ님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내는 것이지 인간의 말재간으로 설득시켜서 교회 구성원으로 등록시키는 게 아니다. 그래서 24절처럼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지 표적이나 지식으로 공허함을 채우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도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지만, 한결같이 다 성경에서 벗어난 인간냄새가 풀풀 나는 타락한 모습들이다. (총동원 주일; 연예인들을 동원한다거나 상품이나 경품을 걸고 모이게 한다? -마치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라는 세상의 풍토처럼 수단방법 안 가리고 많이 모이게 하는 걸 장땡으로 여김, 이미 ㅎ님의 교회가 아니라 장사하는 집이고 강도의 굴혈이다.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 ..개 같이 벌면 개같이 쓰게 되어있지 절대로 정승같이 못 쓴다. 붕어빵 틀에 들어간 밀가루가 나올 때는 인형 모양으로 나올까요?
인간적 방법으로 모여진 자들은 단물이 빠지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목사는 이들을 놓칠까봐 계속 말씀에 꿀과 누룩을 섞어서 설교한다. 이게 기복주의요, 성공주의요, 고지론 설교다. ㅎ님 잘 믿으면 부자되고 성공 출세하고 세상에서 높임 받는 다는 것이다.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이들이 바로 거짓 목사, 거짓 선지자들이다.(거짓말 쏟아냄). 그러나 주님은 오병이어를 보고 예수를 왕 삼고자 벌떼같이 몰려든 군중을 다 흩어 버리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언제나 주님은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정작 예수를 구하는 게 아니라 예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바라고 모여든다. 그게 돈이든 성공 출세든 구원이든 탐심으로 예수를 찾는다. 어제까지 무당 찾고 부처를 찾아 빌던 자들이 예수가 더 용하다는 전도를 받고 신을 예수 신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새벽부터 철야까지 수많은 기도제목을 써서 주세요주세요 하고 있으니 여기가 무당 잡교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이 신봉하는 예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지니와 같다. 예수는 그저 자기 욕망을 이루어주는 힘센 종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욕망들을 잘 이루어 줄 것 같은 신의 대리자로 특화된 목사를 찾는다. 그래서 용하다고 소문난 목사를 추종하기 때문에 특정교회들이 대형화 되는 것이 이시대의 교회 모습이다(명성교회). 그러나 안드레와 요한은 달랐다. 정말 예수님이 바라시던 대답을 한다.
주님의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대답한다. 이 대답은 엉뚱한 대답이 아니라 당시에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통용되는 관용구였다고 한다.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의미인데, ‘나의 존경하는 스승님’이라는 뜻의 아람어이다.
두 제자는 비록 세례요한으로부터 저 분이 ㅎ님의 아들이시고, ㅎ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자신들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할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랍비라는 말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예수님께 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대답을 관용적으로 한 말이 ‘어디 계십니까?’로 되묻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기거하시는 호텔이 어디냐고 물은 게 아니라, 당신의 제자로 거두어 주세요라는 요청인 것이다.
그러자 39절에 주님이 흔쾌히 수락하신다. ‘와 보라’ 하신다.
그래서 두 제자가 주님과 함께 가서 거했더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다고 한다. 이게 비밀스런 말씀이다. 갑자기 시간 얘기가 나오면서 그것도 하필 십시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메시지를 하고 싶으신 걸까? 궁금하다.
다시 본문 <39~41>을 보자
41절에 놀라운 말을 한다. 안드레가 형제 시몬에게 가서 하는 말이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거하였더니 그 결과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거했을까? 당일 하루? 아니면 며칠?, 중요한 답이 바로 십시라는 용어에 있다. 십(열)은 충만을 상징하는 수다.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던 자들을 주가 함께 거하니까 충만해 졌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충만인가? 주님을 알아보는 면에서의 충만이다. 또한 구원받아 ㅎ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면에서의 충만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암시한다.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주를 주시라 알아볼 수 없고 고백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마16장에서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주님의 질문에), 베드로(주는 X시오, ~ㅎ님의 아들이니이다.), 주님(잘했다 바요나 시몬아, 이를 알게 한 것은 네 실력이 아니라 하늘의 내 아버지야 , -> 성령이 알려주셨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제자들에게 말을 해도 온전히 깨닫지를 못한다. 그래서 요16장을 보면 ‘너희가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그동안 해 준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바르게 깨닫게) 하실 거야’(하심). 또한 요14에서도 ‘그날에는 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 있음을 알거야’(하심). 즉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은 성령이 오심으로 성취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 성령의 역사로 지금 본문처럼 두 제자가 온전히 주를 그리스도로 깨닫고 거듭났음을 계시하는 메시지를 주는 내용이다. 두 제자는 모든 성도에 대한 모형이다.
창 1장에서, 6일 동안의 창조와 7째 날의 안식은 사람의 구원 단계에 대한 설명을 마치 물질 창조를 빗대서 비유한 것임을 우리는 이미 배워서 안다. (예전) 창 1장의 7날의 비밀에 대해 28강 설교한 바 있음., 세상에서 책을 사면 목차와 서언(머릿말)이 있다. 목차(순서별 내용 전개를), 서언(전체 내용 요약, 저자의 책을 쓴 목적이나 취지 기록) 하듯이,
성경도 성령께서 기술한 한 권의 책임, 당연히 목차와 서언이 있다. 목차(창1장의 7날의 창조..사람 구원을 6단계로 기술, 그리고 7날에 안식), 서언(창 2장- ㅎ님의 사람 창조의 목적과 결과를 압축함-아담의 배우자 탄생과 한 몸 됨: IX십자가로 교회가 탄생되고 성령으로 하나 됨을 함축한 청사진임. 조감도임), 그 최종 결과가 계21장(거룩한 성..그 안에 보좌와 어린양)
그런데 요1장부터~2장의 가나안 혼인잔치까지.. 6일 동안 진행되는 내용이 창 1장의 구원 내용과 일치함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주에 29절의 이튿날에서, ‘보라 ㅎ님의 어린양으로 보라’는 언급이 곧 십자가에 달리신 IX를 비유하는 창1장의 둘째 날의 내용과 일치된다고 공부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오늘은 며칠이겠는가? 바로 셋째 날이다. 그래서 아까 읽은 35절에 또 이튿날이라는 말을 하고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다. 창1장에서의 셋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둘째 날에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되었으니까 당연히 3째 날에는 부활사건이다. 그래서 물이라는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서 그 뭍(땅)에 씨맺는 나무와 채소가 자라기 시작했다고 언급된다. 씨를 가진 나무와 채소란 ㅎ님의 부활 생명을 가진 성도의 출현을 말한다. 그러니까 롬6장의 말씀처럼 주와 합하여 세례받고 죽고 장사되더니 주와 합하여 부활한 날이 셋째 날이다.
오늘 본문 요1장 35~42절까지가 바로 창1장의 셋째 날의 사건과 일치한다.
게21장을 보면, 새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함). 옛 하늘과 옛 땅은 나의 옛 사람의 영과 혼을 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거듭난 성도의 영과 혼을 말한다. 그래서 바다가 다시 있지 않더라라고 한다. 바다란 사단의 영을 비유한다. 죄와 사망의 세력에 갇힌 모든 사람은 바다에 빠져 죽어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창1장2절에서 땅이 물속에 잠기어 있기 때문에 혼돈, 공허 깊은 흑암이라고 부연하고 ㅎ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그들을 건져 내기 위해 일하시는 모습을 은유한 것)고 한 것이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시키면 바다에서 건짐을 받아 산자가 된다. 이게 3째 날이다.
이를 마13장에서는 바다에서 잡혀 올라온 물고기로 비유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다 구원되는 게 아니라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되, 못된 물고기는 다시 버려진다. 여기서 못된 물고기는 바리새인처럼 자기 행함의 의를 가치 있다고 여기는 자기 의로 충만한 자들을 상징한다. 자기 행함에 가치를 두는 자들은 얼핏 교회라는 그물에 걸려 구원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날에 주님에 의해 다시 불못에 버려진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자기 의가 있으면 결코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지를 못한다. 그래서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를 못하기에 사망이 여전히 그를 지배한다. 옛사람이 살아서 여전히 바다라는 마귀의 영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셋째 날은 행전 2장에서의 오순절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성령의 임재로 일어난 거듭남이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이다. 창1장에서 물속에 잠기어 있던 땅이 물(바다)가 물러가니 뭍이라는 땅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비로소 기식하는 산 자가 되었다. 그동안은 세상영으로 비유되는 궁창 아래의 물(사단의 영)에 속해서 사망의 존재였지만, IX께서 십자가로 사단을 이기시고 그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사, 마귀의 손아귀에서 자기백성들을 구출해 내신 날이 셋째 날이다. 이날 성령을 받아 생명의 호흡을 하는 산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본문 39절에서 주와 함께 거하니 십시쯤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주님과 성령 안에서 한 영으로 연합된 것을 주와 함께 거했다라고 표현한다. 성도로 예표된 제자들이 무슨 일을 행해서 얻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창세전에 택하심을 입고 두 제자처럼 역사 속에서 부르심을 통해 IX의 십자가 공로를 믿어 구원 받았다. 그래서 은혜 구원이다. 만일 구원을 목적하고 소원해서 ㅎ님께 충성하고 말씀 지키기를 한다면 이것처럼 가련한 존재들도 없을 것이다.
구원이 숙제가 되어 온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니 얼마나 버거운 짐인가? 그것도 행동 여부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갈라진다면 신앙생활이 즐거운 게 아니라 지옥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는 알미니안식 구원관은 이미 성경에서 벗어난 사단의 궤계일 뿐이다. 또한 알미니안식 구원관은 인간의 행함에 방점을 둔 교리이니 유대교와 다를 바 없는 율법주의의 한 분파이다. 이것은 이미 복음(기쁜 소식)이 아니지 않은가?
ㅎ님이 주시는 구원을 엡2.8절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ㅎ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안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의 자랑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ㅎ님의 은혜로 주신 구원이라서 복음이다.
롬1.17절도, ‘복음에는 ㅎ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은 IX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의인은 행함의 의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믿음의 의로 의인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믿음마저도 ㅎ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위에서 주신 믿음이 발현되어 내가 믿어짐으로~)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선물이라고 한다.
41절 읽고,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함). 여기서 ‘우리’에 주목하자. 내가 메시야를~ (아님). 우리가...인간 개개인의 능력으로 깨닫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이 우리는 엡 1장에서 이미 언급된 창세전 IX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그 우리다. 그러므로 구원은 개인의 조건과 자격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교회라는 우리가 단체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다. 한 교회에서 복음의 가르침을 받은 무리가 함께 구원을 받는 거지,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패가 갈리지를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 운명체이다.
42절 읽고, 요나의 아들 시몬임(오 번역). ‘네가 지금은 시몬이나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아람어), 베드로는 베트로스(헬)이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말이다. 지금 주님은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 자고로 사람의 이름은 누가 지어 주는가?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작명해 준다. 지금 주님이 베드로의 영적 부모요 주인 되심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옛사람으로 네 부모가 지어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았지만, 장차 성령을 받으면 베드로로 살아갈 거야 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의 사역적 사명이 이름 안에 명시되어 있다. 이것이 마16장에 가면 더 명확해 진다. 베드로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오 ㅎ님의 아들이니이다). 그러자 주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하심. 결국 수제자 베드로의 속에 계신 IX의 성령이 실제적인 교회의 반석 되심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갈2.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과 일맥상통한다. 성도의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사는 자들이다.
창17장을 보면 할례 받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셨다. 아버지가 바뀌었다(데라->ㅎ님으로). ‘이제부터 너는 내가 낳은 하늘의 아들이야.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 거야. 너는 은혜로 구원 받은 자의 표본이고 샘플이라’는 의미가 아브라함이다. 할례 받았다는 말은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장차라는 말씀을 하셨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병행해서 베드로가 3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죽음에 넘기우는 과정을 거쳐야 그 뒤로 성령을 부어 주셔서 거듭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시의 세계에서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주님에게는 엉터리 같은 베드로가 지금도 그리 사랑스러운 거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말한다. 고후5.17절(누구든지 IX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서 죄도 안짓는 천사와 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속사람을 겉 사람 속에 숨겨둔 것이다. 그렇다고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분해서는 안된다.
마치 골뱅이가 갑각(甲殼)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골뱅이 살을 따로 갑각에서 빼내면 죽는다. 성도들도 갑각 속에 골뱅이가 있듯이 겉사람 속에 속사람이 있다. 이는 마치 시몬 속에 게바가 있는 것과 같다. 아브람 속에 아브라함을 담고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시몬과 아브람 상대하지 않고 게바와 아브라함을 상대한다. 시몬과 아브람은 다만 게바와 아브라함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몬과 아브람이 개판 쳐도 하나님은 끝까지 붙잡고 가는 것이다. 시몬과 아브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게바와 아브라함 때문이다. 게바와 아브라함은 주님의 분신이다.
ㅎ님은 시몬과 아브람에게 너 앞으로 착하게 살라고 하지 않는다. 그 놈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껍데기라서 불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ㅎ님께 불순종하여 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해도 약속을 취소하지 않은 것은 처움부터 약속을 그 껍데기하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사람하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약속으로 난 속 사람은 개과천선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성화할 필요가 없이 거룩성에서 이미 완벽하다. 거룩은 이 세상에는 없다. ㅎ님의 것이 임하였기에 거룩이다. ㅎ님은 이 속사람에게 약속을 하셨던 것이다. 이 속사람은 죄가 주관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속사람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도 그 속사람을 담을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한다.
<고후 5:1-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 ~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하늘에 준비된 영원힌 집이 따로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한다. 그러니 살든지 죽든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게 믿어지니 신기하다. 성화주의자들은 이게 안 믿어지기 때문에 끝까지 껍데기를 치장하려고 하는 거다. 신앙생활은 ㅎ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카멜레온처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한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변화되지 않는다. 본성이 변해서 인간 자신이 거룩해질 수 있다면 굳이 예수께서 오실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서 달리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니 예수께서 ㅎ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속죄의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우리 성도는 그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 때가지, 아니 육신의 장막이 끝날 때가지 성도가 마땅히 할 일은 날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더 깊이, 더 높이 알아가는 일이다. 그것이 곧 주를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감격에 겨워 신랑 되시는 예수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복된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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