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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
에베소서 1장 11절 [3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3항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신성의 통일성 안에서 한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으로부터 세 위격들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각 위격의 고유성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성부는 누구로부터도 존재하지 않고 발생하거나 발출하지 않으신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 이때 발생한다, 발출한다는 것이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발출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2장 1항에서 고백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 성령에게도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부가 영원하신 분이라면 성자도 영원하신 분이고 성령도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발생한다, 발출한다고 해서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발출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영원한 발생, 영원한 발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위격으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되시지만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하신다고 할 때 존재 방식 혹은 질서가 발생, 발출로 계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발생과 발출에 대하여 다수의 신학자들은 사역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내재적 사역과 외재적 사역으로 나눈다고 할 때 내재적 사역을 둘로 나누는데, 이런 발생과 발출을 위격간의 사역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 방식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발생과 발출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 혹은 질서에 대한 것이지 사역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오늘부터 살피게 될 시간 전에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를 시간 속에서 실행하신다고 할 때 이런 사역 이전부터 본래 한 분 안에 세 위격으로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역으로 돌릴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분류하는 것을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을 살피겠는데, 오늘은 전체 8항 가운데 1항만 살피겠습니다. 1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습니다(엡1:11, 롬11:33, 히6:17, 롬9:15,1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죄의 저자인 것도 아니며(약1:13,17, 요일1:5),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이 제공된 것도 아니며,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도 아니라 오히려 확립되었습니다(행2:23, 마17:12, 행4:27,28, 요19:11, 잠16:33).
앞서 하나님의 사역을 둘로 나눈다고 했는데, 작정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것을 내재적 사역이라고 하는데, 어떤 일을 외재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 하나님 안에서 그 모든 일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정은 시간 전의 일하심입니다. 작정의 실행으로서 창조가 있고, 섭리가 있다고 할 때 시간은 창조의 역사 가운데 생기게 됩니다. 그런 시간 이전, 다시 말해 창조 이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자신 안에서 정하신 것이 작정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미 우리가 신앙고백 2장 1항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의지에 대한 부분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그때도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1장 11절을 본문으로 봤는데, 작정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우리말 성경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좀 더 원문에 맞는 번역은 이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대로 일하시는 이의 작정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모든 일을 정하시되 그의 뜻의 의논대로 작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의지인데, 모든 일의 궁극적인 원인, 유일한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그대로 일어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의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하심입니다. 이때 교통하심은 우리처럼 의견을 나누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지혜에 있어 한계가 없으십니다. 성부가 그러하고, 성자가 그러하고, 성령이 그러합니다. 그런 하나님께 부족함이라는 게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의논을 뭔가 부족함이 있어서 삼위께서 교통하심으로 채워가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교통하심 가운데 동일한 뜻으로 나타나는데, 영원 전부터 모든 일에 대하여 결정하신 바가 작정입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은 작정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고 하는데, 모든 만물에 대한 것이 작정이라면 예정은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된 것으로 선택과 유기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3장 3항 이하에서 살피게 될 것입니다.
작정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몇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는데, 다시 1항의 첫 부분을 보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영원 전부터’라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들기 전부터 자신의 뜻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역사는 공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됩니다. 때문에 시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이라는 것은 공간도 만들어지기 전,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 아무 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정하시되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하셨는데, 이때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지혜에 있어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부분에서 우리는 지혜와 지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아시는 것이라면, 지혜는 자신의 지식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시는데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정하시되 가장 지혜롭게 정하셨다는 것은 속성 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에 합당하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거룩은 이런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에 합당하게 정하셨다는 것은 비교하자면 자신이 만들 피조물과는 구별되게, 당연히 거기에는 도덕적으로도 구별되게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있다가 보게 될 죄 문제와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대하여 작정하셨다면 죄도 작정 안에 있는 것이고, 죄가 작정 안에 있다면 하나님이 죄의 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미리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모든 것을 작정하셨기 때문에 결코 죄의 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작정 안에 죄가 있다고 하지만 죄의 저자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정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는데, 자유롭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원하시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성과도 연결이 됩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죄는 분명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아니십니다. 죄의 저자가 아니지만 죄조차 작정 안에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죄 때문에 그가 작정하신 바가 틀어지거나 변경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셨지만 작정하실 때만 자유로우신 분이 아니라, 작정의 실행으로 모든 피조물이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분은 피조물로부터 자유로우십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충족적인 분이십니다. 그런 분으로서 어떤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뜻의 의논에 따라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다는 것은 작정하신 바의 변경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작정하신 바의 변경이 없다는 것은 실행의 역사 속에서도 작정과 다른 실행으로 나타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작정하실 때는 이렇게 정하셨다가 죄 문제가 등장하니까 정하신 바를 변경해서 실행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리로 가는 과정까지 하나님은 다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된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거짓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작정하셨기 때문에 죄가 실행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죄가 나타난다고 해서 죄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변경하고 저렇게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불변하게 정한 그대로 실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만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 유일한 원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4장에서 창조를 다룹니다. 무에서 유로, 6일 동안 창조하시되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다룹니다. 이런 창조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자유롭게, 불변토록 정하신 결과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5장에서 섭리를 다룹니다. 섭리란 5장 1항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과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유지하고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리는 것인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자유롭게, 불변토록 정하신 결과입니다. 5장에 이어 제6장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죄와 그에 대한 형벌에 대해 다루는데,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따라 인간은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타락했다고 해서 버리시는가? 예정에 대한 내용도 다루겠지만 영원 전부터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예정하신 대로 택하신 자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거기에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을 두셨는데,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사 의롭다 하시고, 양자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 결국 영화롭게 하시고야 마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자유롭게, 불변토록 정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정과 상관없이, 또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작정의 결과요, 그렇게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의 결과입니다. 창조도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요, 섭리도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요, 섭리 안에서 죄가 들어오는 것도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인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 속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을 말하는데, 크게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일단 죄와 관련해서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죄의 저자인 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 그리고 그러한 작정을 불변하도록 정하셨다고 할 때 죄도 그러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것인 아닌가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지혜롭고 가장 거룩하십니다. 때문에 죄를 작정하시되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죄의 원인자가 아닌 방식으로 작정하실 수 있습니다.
일단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죄의 저자인 것도 아니라고 할 때 야고보서 1장 13절과 17절, 그리고 요한일서 1장 5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데, 야고보서 1장 13절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물론 아브라함의 시험과 같은 것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할 목적으로 시험하는 분으로 있지, 죄와 악을 위한 시험을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고자 하시는 분,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한 것만을 주고자 하시는 분으로 있지, 죄를 저지르도록 악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시험 하시는 분은 아니란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도 그러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한편 이사야 45장 7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얼핏 보면 요한일서 1장 5절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어둠이 조금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사야 45장은 빛도 지을 뿐 아니라 어둠도 창조하신 분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는 빛과 어둠을 선과 악이라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라면, 이사야서는 낮과 밤이라는 측면과 함께 도덕적인 악이 아니라 물리적인 악이라는 측면에서 평안만이 아니라 환난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도덕적인 악과 물리적인 악이 그것입니다. 도덕적인 악은 한 마디로 죄입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악은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우심에 따라 죄에 대하여 벌은 내리십니다. 모든 환난이 죄에 대한 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부분 환난은 죄에 대한 형벌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납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원인자요, 주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악에 대해서는 결코 원인자요, 주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죄의 저자가 아니면서도 죄를 작정하실 수 있는가? 여기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이 제공된 것도 아니며,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도 아니라 오히려 확립되었다고 고백하는데, 하나님은 분명 타락 하기 이전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이용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기 싫은데 억지로 죄를 짓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창세기 3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작정하신 그대로 된다고 할 때 죄를 작정하셨기 때문에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고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을 제공한 결과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하기를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이 아닌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연성은 피조물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인데, 마태복음 17장 12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임의로 대우하였다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도 대우하고 저렇게도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율성, 임의성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확립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하는 작정은 이런 자율성, 임의성까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작정과 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는 신앙고백의 첫 번째 내용 자체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셨다고 할 때 분명 신앙고백서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죄의 저자인 것도 아니며,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이 제공된 것도 아니며,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도 아니라 오히려 확립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까지 작정하셨다고 할 때 우리 이성으로는 결코 속이 시원할만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앞에서 배운 하나님의 속성을 토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가, 죄의 원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까지도 작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선택과 유기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2절과 23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즉 죄는 철저히 예정론, 택자와 유기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되고, 그 가운데 택자를 통해 영광 받기로 하시되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고, 유기자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로 하시되 그분의 오래 참으심 그러나 결국 그분의 능력을 알게 하실 목적으로 죄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토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해야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일하심에 있어 다른 어떤 속성보다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를 앞세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속성을 살필 때 말씀을 드렸지만 전능하시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존재와 본질, 속성과 모순되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소위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다고 할 때 이 둘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해서 자신이 움직일 수 없는 바위도 만드실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모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115편 3절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는데,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그만큼 높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을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그분의 의지가 그분의 전능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전능만이 아니라 전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가 믿을지, 누기 믿지 않을지 아시고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지예정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예정론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는 것이 불과할 뿐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이때도 오늘 본문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고 예정하십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작정하시고 예정하시되 그렇게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관련해서는 의지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의 의지를 사용하시지만, 분명한 것은 신앙고백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강제성이 제공된 것이 아니라는 것,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확립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작정대로 되지만 특별히 죄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잘못이 있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을 언급하자면, 사도행전 2장 23절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이어지는 24절은 저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4장 27절과 2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요한복음 19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저들에게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들로 억지로, 강제적으로 예수님을 해하도록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권한으로 해할 수도 있고, 해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즉 자율성, 임의성이 있었지만 그런 권한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해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이고 작정 안에 있기 때문에 실행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저자가 아닌 하나님은 죄를 짓도록 강제로 그 일을 행하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칼빈의 욥에 대한 설명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 1권 18장 1 내용 안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의지에 따라 사탄과 사악한 사람들을 굴복시키시거나 이끄시거나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기에게는 그들의 악으로부터 아무런 더러움도 초래되지 않게 하실 수 있는가 질문하면서 욥의 예를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만 읽어드리면, “욥기 1장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원해서 순종하는 천사들과 다를 바 없이 사탄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워 그의 명령들을 받고자 한다(욥1:6, 2:1). 사탄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지 아니하시면 그 무슨 일도 착수할 수 없다. 비록 거룩한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단순한 허용이 그때 더하여진 것 같아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이 사탄과 흉악한 강도들을 일꾼으로 삼으신, 그 연단의 조성자시라는 사실을 추론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는 일이 그대로 이루어질지라”(적용. 욥1:21)라는 말씀이 참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력을 다하여 거룩한 사람이 광란에 이르도록 몰아간다. 스바 사람은 잔인하고 불경건하게 덤벼들어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한다. 욥은 자기가 모든 소유를 탈취당하여 거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과 사탄이 어떤 선동을 일삼는다 해도 그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가 자기의 심판들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노력들을 자기가 원하시는 다른 방향으로 돌리신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피조물들의 의지를 사용하시지만 자신이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그러나 강제가 아닌, 제2원인들의 자율성, 우연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확립하는 방식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모든 것을 작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볼 때 우연일 수 있는 일도 하나님께 우연은 없습니다. 죄도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환난도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연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든 일까지 작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 때문에 죄도 괜찮다, 환난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2원인들의 자율성, 우연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확립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뜻, 적어도 말씀을 통해 알리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개하기도 하고 어떤 환난을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어거스틴의 은총론에서 말한 내용이 우리에게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어거스틴의 은총론4, p.493). 어떤 수도원에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이요,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의 비난에 대하여 그가 어떤 말로 대꾸하느냐 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수도사에게 어거스틴이 어떤 말을 했느냐? 한편으로는 옳지만 한편으로는 옳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옳은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는 차원에서는 옳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상관없이 우연히 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에서 벗어난 일은 없기 때문에 작정대로 된 것이라고 한 말은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옳지 못하다고도 말했는데, 그것은 진리의 도움을 받아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에 대하여 선하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악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있다면 그런 지식과 이해가 선하게 사용해야 되는데, 오히려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 양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작정대로 된다는 것이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사용해야 될 부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죄 문제, 환난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다고만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진리의 말씀을 따라 회개하고 열심을 내는 등 마땅히 해야 할 부분에 있어서는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할 때 그 방편으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이라는 과정을 두신 것처럼 과정 없는 결과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결과를 위한 과정까지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대로 일하시기에 그분에 일하심과 일치하여 일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방향으로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