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에 일본 정부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神社參拜)와 황궁요배(皇宮遙拜)를 강요했다. 이런 요구가 교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부당한 조건을 제시하고 계속 강요한 데는 이면에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 속셈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지만, 쉽게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교회를 사로잡아 정치도구로 이용할 계획이 아니라면 사단의 깊은 계교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술책에 넘어가 한국교회사에 큰 오점을 남긴 교단들도 있었다. 그러나 침례교단은 당시 교세가 크지 않은 작은 교단이었지만, 그들의 강요에 끝까지 불응하여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우리 교단은 1935년 김영관 감목의 이름으로 일제의 황궁요배와 신사참배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공문을 각 교회에 발송했다. 나는 그 정신을 지킬 수 있어서 더욱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일본 정부는 급기야 강경책을 펴서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 김영관 감목, 백남조 목사, 이종덕 안사, 전치규 안사, 노재천 목사 등 5인을 원산경찰서에서 3개월간 구금되고, 함흥형무소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시켰다. 일본 정부는 수개월 동안 강압적인 강요 또는 회유를 꾀했지만 우리 교단이 요동하지 않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다음 단계로 1942년 9월부터 우리 교단의 주요 임원(목사, 감로)들을 일제히 전국 각처에서 총검거하여 연금했을 뿐 아니라, 매일 혹독한 고문을 감행하고 강제로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하지만 본래 복음의 신앙으로 무장된 임원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나갔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미 가지고 있던 복안(腹案)대로 의법조치하여 우리 교단 임원들을 실형에 처했다. 그리고 2년 뒤 교단해체령을 내렸다. 당시 감리교단과 장로교단이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거부하지 못하고 총회에서 교단적으로 이를 지지하도록 가결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일제의 교단폐쇄령을 받은 동아기독교는 오히려 한국 교회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교단해체령과 함께 각 교회들도 역시 폐쇄를 당했다. 국가 행정기구를 통해 각 교회에 해산통지를 내렸다. 우리 교단의 지역교회들은 집회를 열 수 없었고, 소위 국방헌금이란 명목으로 교회 재산마저 강제로 몰수당해야 했다. 모교회(母敎會)인 원당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편집자주] 김용해 편, 「대한기독교침례회사」에는 그 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교단해체령은 함흥재판소 법정에서 五월 十일부로 나렸었다. 각 지방 관헌들의 핍박으로 집회금지는 물론이고 우선 교회 종들(弔鐘)은 강제로 헌납시키고 예배당은 매각처분하여 그 대금을 국방(國防) 헌금에 납입(納入)시켰다. 만일 불응하면 소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교단의 교회들은 흑운(黑雲)으로 덮어졌고 탄압의 거센과[파]도는 여지없이 휩쓸게 되었다. 예배당을 빼앗긴 신자들은 목자와 우리를 잃고 헤매는 양들과 같이 이집 저집으로 몰려다니면서 예배일을 지켜오던 곳도 있고 어떠한 곳은 그렇게 조차도 관의 감시와 제지로 불가능 하였던 것이다”(68-69쪽).
통장(統長) 직분으로 교회의 일을 주도적으로 보셨던 아버지는 일본 관헌으로부터 교회 재산을 바치라는 강압적인 지시를 받으셨다. 고민하던 아버지는 하는 수없이 친구이자 동네 이장이었던 김순배(金順培) 씨를 찾아갔다. “지금은 일제의 명령에 의해 부득불 교회를 내놓지만, 앞으로 멀지 않은 앞날에 다시 우리가 교회로 사용하도록 반환해 줄 수 있겠느냐”고 아버지는 질의했고, 이장은 이에 쾌히 승낙했다. 이런 약속은 아버지의 선견지명이며, 믿음의 결과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교회건물은 일제에 몰수당했고, 교인들은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일이 되면, 열심 있던 교인들은 관헌의 눈을 피해 우리 집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해서 교회의 명맥은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초대교회의 박해 상황이 이 땅에서 다시 재연된 것이다. 그 후 1년 3개월만인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이 되어 흑운은 물러가고 새 천지가 찾아왔다. 성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무너진 교회도 사전 약속대로 성도들이 헌금하여 되찾아 복원되었다.
교단해체의 후유증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나마 재정적으로나 교세 면에서 매우 약했던 우리 교단은 일제 말 발악하는 그들의 탄압에 더욱 쇠약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젊은 인재들이 교단을 떠나 타 교단으로 넘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황진흥, 임정일, 박약슬 씨 등이 다른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교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우리 교단의 뿌리를 아끼고 지키기보다는 더 큰 교단과 합동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런 몰지각한 행동들은 순교의 길을 걸은 우리 교단 선조들의 신앙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순교의 길을 간 교단지도자들(좌로부터 문규석 목사, 3대 감목 전치규 목사, 5대 감목 이종근 목사, 4대 감목 김영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