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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없는 제정신을 성령이 대신하는 사람>의 줄거리:
성령으로 사는 삶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보편적인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이 드문 이유는 성령 역사에 대한 오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기사와 표적에만 연결하려는 경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으로서 성령의 본질적인 역사는 내 정신을 대신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십자가에 팔린 내 정신 대신입니다.
없는 제정신을 성령이 대신하는 사람
(사도행전 4장 1절~22절)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없는 제정신을 성령이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없는 제정신을 성령이 대신하는 사람’
본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잡혀 심문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은 비단 베드로와 요한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들과 교인들의 대표로써 그 자리에 섰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들은 제정신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정신이 없어진 그 자리에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시는 상태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제정신은 바로 십자가 예수님에게 팔려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예수님께 제정신을 쏟느라 삶의 현장에는 쏟을 정신이 없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교인이고 사도이며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흔히 일에 집중을 못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오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께 정신이 팔려서 삶의 현장에 도무지 집중을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인입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온 정신을 삶에 집중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대개의 경우 무엇인가에 제정신이 팔리면 일을 망칩니다. 도박에 정신이 팔리거나 회사에서 가정문제에 정신이 팔리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십자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정신이 없어진 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 참가한 분께서 “사도행전에 들어와서 성령의 역사가 계속 언급되는데 나에게 정말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의 역사에 대해 확신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살펴보았던 2장 43절을 보면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특별한 기사와 표적에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성령은 영어로는 The Holy Spirit입니다. spirit이 정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성령의 가장 본질적 역사가 정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정신의 속성이 나의 정신을 대신하여 성령께서 장악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발동되어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기에 외부적으로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내면에 존재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는 기존의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일으켰던 기사와 표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우리를 통해서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실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기사와 표적을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기사와 표적은 어디까지나 성령님의 선택적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상황과 때를 따라서 필요한 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성령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정신의 역사입니다. 나의 정신을 대신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정신인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선택적으로 기사와 표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고친 뒤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군중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예수님이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않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로 이루어져 있는 사두개인들에게는 이러한 증언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산헤드린공회에 잡아다 놓고 심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8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라고 하였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의 사형을 결정했던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마당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할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전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이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완전히 판이한 두 인격이 공존하는 것만 같습니다.
또 이어서 9~10절을 보면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육체의 장애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증언을 통해 성령충만과 예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계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벌어지는 현상 속에서 이 사람이 장애로부터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전부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이외에는 아는 것도 없고 기억하는 것도 없고 정신을 쏟을 대상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필코 단연코 필사적으로 이 상태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도이자 교인으로서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해 항상 깨어있는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온 정신이 십자가 예수님께 팔려있는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십자가 예수님께 온 정신이 팔려있는 자이다. 이러한 내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일으켜 세우도록 역사하셨다. 이 모든 일은 예수 이름을 통해 일어난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에게 온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이들의 정신을 대신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주목하게 하셨고 또한 성령께서는 그를 고치셔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산헤드린공회 앞에 섰던 베드로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전과 달리 베드로의 정신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었습니다. 이전의 베드로는 세상의 관점에서 제정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형선고가 이루어지는 재판정에서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꼈고, 그 결과 고작 여종의 추궁에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뒤로는 온 정신이 예수님께 팔리게 되자 더는 재판정에 쓸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제정신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시장에서도 제정신이 없고, 가정에서도 제정신이 없고, 직장에 나가서도 제정신이 없는 상태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모든 일은 제정신을 요구합니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으면 일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십자가 예수님께 정신을 판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삶의 현장을 떠맡으시게 됩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께 온 정신이 다 팔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보게 하셨고 또한 고치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일이 예수 이름 때문에 일어난 현상임을 증언합니다. 그 예수가 바로 너희가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고 승천시키셨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제목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없는 제정신을 성령이 대신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정신이면 산헤드린공회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정신이 예수님께 팔려있었던 베드로는 산헤드린공회를 더 이상 두려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고칠 때에도 제정신이 예수님께 팔려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1~12절을 보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란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세상을 탈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고 또한 예수님이 올라가신 길을 통해 성령께서 내려오시게 되었습니다.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삶의 기준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강문제, 자녀문제, 부부문제를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에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걷게 된 것도 구원으로 표현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12절에서 언급된 천하 사람이 받아야 될 구원은 기본적으로는 영생을 의미하지만 삶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구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죄의 체질에서 나오는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도 죄의 체질에서 나온 정신으로 살아가기에 삶은 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제정신이란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세상에서 좋음을 확신하며 세상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죄의 체질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삶 자체가 죄악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삶의 현장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제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서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예수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삶의 모든 문제는 예수 이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그 버려진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제정신이 팔려야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 정신이 남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보자면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온 여러분이 사도들보다도 낫습니다만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베드로와 요한에게 배울 것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정신이 팔렸다는 것입니다. 성전 미문 앞에서든 산헤드린공회에서든 예수님을 버려진 돌로 여기지 않고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 예수님께 정신이 팔려서 삶의 현장에 쏟을 정신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나의 정신을 대신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에서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리면 문제가 생기고 차질이 빚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정신이 팔린 상태에서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령께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움직여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정신작용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죄의 체질로 살아오면서 정신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떠올려봅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배우자의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것이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이 십자가 예수님께 팔리게 되자 배우자를 대할 때에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십니다. 배우자의 벌이가 더 안 좋아졌는데도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전에 제정신을 가지고 살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에게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때는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산헤드린공회에서 당당하게 예수를 전합니다. 제정신이었을 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움직여 나가시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내가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없는 제정신을 성령이 대신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유무상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부 제정신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팔려있었고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십자가에 정신이 팔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버려진 돌이신 예수님께서는 삶의 현장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 길을 따라 삶의 현장으로부터 정신을 예수님께로 보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지신 예수님의 유효성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만드신 길을 통해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정신을 대신하여 역사해나가실 것입니다.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그 문제와 상관없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정신을 파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배울 점은 바로 이 한 가지뿐입니다. 이들이 했던 일은 십자가 예수님께 정신을 팔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이들의 정신을 대신하시게 되었고, 제정신이었다면 나타나지 않을 일들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제정신이 아닌 소리입니다. 사람이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지실 십자가에 제정신을 팔 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입을 것도 염려하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염려는 되지만 막연히 하나님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께 정신을 다 쏟기 때문에 염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정신인 성령께서 역사해나가실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18~20절을 보면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실 때 여종의 추궁에 벌벌 떨며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입에서 어떻게 이토록 담대한 말이 나올 수 있는지 참 신기합니다.
20절의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증언이 담겨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외에는 아무것도 보고 들은 것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정신이 팔릴 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정신이 팔릴 때는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여러분이 평생 살면서 보고 들은 일들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기억이면 웃음이 나오고 나쁜 기억이면 침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며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에는 삶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에 의해 움직여가게 됩니다. 나의 삶에서 제2의 창조가 이루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강조는 결코 날마다 듣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어갈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제나 의식의 전면에 등장해야만 하는 사건입니다. 가만히 쉴 때도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십자가를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예수님께 제정신을 파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이 버린 돌인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는 일입니다. 그럴 때 성령이 나의 정신을 대신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베드로와 요한처럼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고치는 역사도 일어날 수 있고, 산헤드린공회의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고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예수님께 정신을 파는 것입니다.
삶에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는 것은 믿음의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돈 문제에도 십자가 예수님이 기초이고, 건강문제가 생겨도 십자가 예수님이 기초이며, 자녀문제가 생겨도 십자가 예수님이 기초입니다. 취직문제, 직장문제, 그 어떤 문제가 생겨도 십자가 예수님이 기초이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의 정신을 팔 때에 예수님은 나의 삶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주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정신인 성령께서 건축가로 오셔서 예수님이라는 머릿돌 위에 나의 삶을 지어가실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꼭 기적과 표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과 표적이 선택적인 성령의 역사라면, 정신을 대신하는 역사는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나의 정신 대신에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 말과 행동을 하게 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인이란 십자가에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어떤 삶의 현장에서든지 십자가에 정신 팔려서 “없는 제정신을 성령이 대신하는 사람”으로 사시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에서는 제정신이 없는 삶을 살 때 차질이 빚어집니다. 그러나 십자가 예수님께 제정신이 팔릴 때는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본래 계획하신 것을 보시기에 좋게 수행하시며 제2의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삶의 현장 어디든지 십자가 예수님께 제정신을 팔아 정신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건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아 집짓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