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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바다교회 두번째 메시지>
2025년 6월 1일 주일
사도 바울의 '몰론 라베'
The Molon-Labe of the Apostle Paul
1. 설교를 위한 묵상
성지순례에서 깨달은 점을 정리하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다가온 것은 ‘몰론 라베’였다. 그것은 스파르타의 장수가 페르시아의 제2차 침공을 막기 위해서 전장에서 외친 결기다. 몰론 라베는 헬라어로서 ‘와서 가져가 봐!’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페르시아의 왕 앞에 나가기 전에 다짐한 것과 유사하다. 튀르키예의 ‘몰론 라베’는 차나칼레1915다리에 새겨진 오스만 투르크의 젊은이들의 희생이다. 그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바쳤다.
‘몰론 라베’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킬 것을 결단한 사람의 고백이다.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간 모든 사람에게는 다 비슷한 고백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당연히 사도 바울에게도 ‘몰론 라베’의 고백이 있을 것이다. 나는 묵상 중에 사도 바울의 ‘몰론 라베’가 아래의 세 가지라고 생각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 고린도후서 5장
*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로마서 8장
*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고린도전서 15장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위험과 위협 속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게 하는 원동력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었고 확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망에게도 ‘몰론 라베!’를 외친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사도 바울의 몰론 라베에 담긴 감격과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왜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목회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몰론 라베’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성지순례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에 인공지능(ChatGPT)의 도움을 받았다. 글을 요약하고 다듬는 것, 그리고 글의 가치와 장점을 파악하는 것을 맡겼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몰론 라베’에 대하여 이런 설명을 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명확할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너머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가능한 선택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결국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열망에서 비롯된다.”
2. 두려움 너머의 가치를 발견했는가?
사도 바울은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길을 기독교인들이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문제를 삼은 사람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뀌었다.
우리가 바울의 회심이라고 부르는 이 체험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길을 가기로 결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회심 이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한 후로 그의 인생관 또는 인생목적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런 경험은 사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여정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인생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가 발견한 인생의 목적은 사실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The Mysterious Economy of God 또는 The Masterplan of God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경륜은 유대인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발견이 그 계기였다. 자신이 나사렛 이단이라고 생각했던 그이가 진정한 메시아이시라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메시아관 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그의 기대에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메시아에 대한 언약들, 그리고 어려서부터 암송한 모세의 율법과 시편의 글 그리고 예언자들의 글을 다시 음미하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당시의 거의 모든 유대인들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하셨고 완성하실 것이라는 깨우침이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가족으로 만드시고 그들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셨다고 확신했다. 그 이전에는 오로지 유대인들, 즉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경륜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동족에게 박해를 받았다.
‘몰론 라베!’는 대적이나 반대파를 만났을 때 하는 말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그 가치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사람의 외침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에게는 누가 반대파였을까? 그에게는 동족이 위협이었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를 위험한 인물로 규정하고 제거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법정에 세워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메시아를 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전했으므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결코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으로 모든 이야기를 대신할 경우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죽음 너머의 가치를 발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았기에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을까?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을 영접하고 그 둘이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로 구체화되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예루살렘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쉬지 않고 동족을 설득하려고 회당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호의와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그 모든 박해와 위협을 뛰어넘을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이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하며 그 하나님이 주신 예언과 언약들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위의 신뢰와 바탕에서 실제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드러난 주장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주장의 이면에 담긴 의미와 사상적 체계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시대적 과제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리나 원칙, 또는 비밀의 경륜을 먼저 잘 이해하고 그 후에 우리 시대의 과제나 질문을 확정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바르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적정한 과제를 선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고 자신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삶의 목적에 대한 이런 고찰과 고민을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없어져도 좋을 그 비밀을 발견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밭에 감추어둔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는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사실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었으므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귀한 직분을 맡기셨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명과 소임을 바로 그 경륜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에베소서 3장에는 이런 내용이 잘 드러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3:8~9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맡은 소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이해하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를 더욱 깊이 이해했다. 그의 소임은 이전에 살았던 예언자들과 왕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 하나님 안에 있던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거룩하게 구별하셨다고 에베소서 1장에서 선포한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며 영광스러운 비전이었다.
그 비전의 내용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할 때 그 메시지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아서 비밀이 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온 세상에 태양처럼 드러나고 비치게 되었다.
바로 앞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비밀의 경륜을 소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밝히 드러낸다. 계시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에베소서 3:6
사도 바울이 감격하고 또 놀라면서 전한 소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소식이었다! 왜 그런가? 사실 유대인들에게 거룩이란 이방인들과 섞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삼갔고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사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겉모습에 매인 일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말씀과 다르지 않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복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의 소생이 아닌가? 예언자들도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고 말했다. 그런 메시지가 있음에도 이스라엘의 후예인 유대인들은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위험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이 깨어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수고와 헌신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도 사도 바울이 경험한 감격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사도 바울의 복음은 이방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들의 삶을 거룩한 부르심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파되어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게 했으며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하게 된 유대 형제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밀의 경륜을 깨달은 사람들은 죽음너머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몰론 라베!’를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과 사랑을 신뢰하였다. 그들의 신뢰는 죽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적신이나 천사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이런 비밀의 경륜을 이해하게 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하는 안타까움과 후회가 밀려온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사람들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작은 집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옹졸하게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부르심과 경륜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개미집을 짓겠다고 아우성을 외치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것 아닐까? 나는 이 사실이 부끄럽다.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과연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나는 복음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작은 교회를 사임한 후에 내가 그렇게 의기소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16~19
하나님을 아는 것,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성도들이 물려받을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며, 우리를 위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는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이며 신앙의 핵심이었다.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과 성도의 기업,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륜의 내용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명과 성도의 기업,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며, 그 내용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요약하고 풀어주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종합되고 완성되었는지를 그는 확신과 열정으로 전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이것은 잠든 영혼을 일깨웠고 보이는 것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었고 진리를 사모하며 영원한 가치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닻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 고귀한 가치를 깨달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사도들을 섬기고 후원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그 기업의 일부가 되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도들은 세례를 베풀어 그들이 하나님의 권속이며 기업의 상속자임을 공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4. 우리의 몰론 라베!
이제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의 ‘몰론 라베’를 생각해 보자. 이 구호를 외칠 때는 대적과 생사를 건 대결을 해야 할 경우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몰론 라베는 언제나 지켜야 할 가치와 그것을 빼앗아가려는 세력을 인식하고 그에 대하여 자신의 삶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이다. 레오니다스에게 그것은 조국을 짓밟으려고 달려오는 페르시아의 군대이며, 사도 바울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펼치려는 길을 가로막아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동족의 박해와 위협이었다. 그리고 레오니다스와 사도 바울은 ‘몰론 라베’를 외치면서 그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다.
오늘 나에게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이고 누가 그것을 짓밟으려는가? 우선 나는 사도 바울을 따라 나 자신도 때로는 내가 전한 복음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가 있음을 앞에서 밝혔다. 그러므로 나의 싸움은 평생에 걸쳐서 이어질 것이며 그 싸움의 대적은 안팎에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나는 사도 바울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다시 기억하고 확신한다. 이는 내가 처음으로 출판한 책 ‘하나님의 경륜’의 소개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그 경륜에 동참하며 그것을 소망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삶, 그것이 나의 소임이다.
하나님의 경륜인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슬리는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만인이 한 가족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여러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었고,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물려주실 세상이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며, 하나님의 경륜은 이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의미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김병욱 박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삶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서 옳고 좋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그에 비추어 현재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좋은 주제적 상태 즉, 이상적인 상태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공동체가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질문하고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을 자기정화장치와 자기조절체계라고 한다. 그것은 삶의 철학이며 자기 안의 혁명이라고 한다. 이것이 김병욱 박사의 고유한 표현이다.
나는 최근에 경험한 담임목사의 사임을 통해서 몇 가지 문제를 깨달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교회들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 교회는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인식하는가? 우리는 과연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교회도 결국 세상의 친목단체처럼 서로의 인간적인 관계를 진리보다 우선하는 것 아닌가? 이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대리인 공동체라기보다는 친목단체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교회의 최우선 과제나 기업의 최우선 과제가 동일한 것 아닌가? 그것은 생존과 번영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아닌가?
이런 고민과 질문을 통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교회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대답을 명확하게 찾지 못할 때 그것은 친목단체로 전락하거나 영리를 추구하는 유사사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 문제는 각 교회나 신자가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점을 성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스스로 확신하는 바로 그 명제 때문에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왜곡되게 평가하고, 자신이 해야 할 과업을 그릇되게 선정하게 된다. 그런 평가와 행동이 교회의 본질에서 심하게 멀어질 때마다 교회는 길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다. 요새 교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것은 바로 이곳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제자라 부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회의 자기 인식 또는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때 하나님이 왜 우리들을 불러 자기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부르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 모든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을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르셨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말씀을 맡은 존재이며, 진리를 배우고 익히며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을 바르게 나타내는 사명을 맡았다. 그것은 기울어진 거울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과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다. 그것을 톰 라이트는 제사장과 왕으로서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우리 인간의 목적이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늘 세상을 비추는 등불로서 하나님 앞에 있는 제사장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교회가 과연 진리를 사랑하고 그 빛을 이방에 비추는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교회가 그런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왜 그런가? 어쩌면 교회는 스스로의 소임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하여 오해하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는 교리를 진리라고 여기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것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사명을 다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안주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라는 존재적 소임을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도 세상에 어떻게 빛이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고백은 헛된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그것을 세상 앞에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는 말은 세상을 복되게 하라는 아브라함의 소명과 같은 말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번성충만의 복을 명하신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세상이 곧 하나님의 피조세계요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고 세상을 복되게 하며 선을 행함으로 그들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을 등대의 빛이라고 할 때 주변에 거울을 두어서 그 빛이 자신에게로만 향하게 한다면 그 등대는 무용지물이 되고 그 자체로 파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톰 라이트가 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어느 정도 그런 측면이 있다. 친목단체로 전락하는 교회는 바로 이런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세상을 복되게 하고 세상에게 선을 행하는 공동체라면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상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먼저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세상을 그저 이방인으로 대하거나 전도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교회의 본질적인 소명은 언제나 겉돌게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국가 공동체와 지역 공동체에서 그 구성원으로서 교회가 자신이 빛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구하지 않음으로 발생하는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교리를 잣대로 하여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하라는 말은 아니다.
요새 차별금지법에 대한 개신교회의 극렬한 반발은 교회가 진리 대신에 교리를 붙들고 있음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런 일은 지난 2024년 10월 27일에 광화문 광장에서 개신교회들이 모여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집회를 열어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울신학대학교에서는 교수의 학문적 자유를 억압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 대학의 박영식 교수는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며 가르쳤는데 이것을 교단의 교리를 잣대로 하여 정죄하고 징계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위의 광화문 집회와 같이 교리로 진리를 가로막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리는 어느 시대에 자기 시대에게 빛을 비추기 위하여 찾은 일종의 대답모음과 같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의 대답은 더 다듬어지고 세련되게 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시대의 문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마주한 문제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의 가족과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고 그 나라에 동참할 수 있는가였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더 이상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마제국 자체가 다민족국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리나 본질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기보다 환경의 변화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 것뿐이다. 그 이후에 기독교회가 타종교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여왔는지를 보면 문제의 해결이 없이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지금 박영식 교수에 대한 징계는 계속되고 있으며 그 교수는 자신의 소신을 수정해 가면서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 지금 ‘몰론 라베!’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몰론 라베’는 언제나 처절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용사가 그랬고, 갈리폴리 반도에서 죽은 병사들은 양쪽을 합쳐 50만명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이란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이 받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다.
우리는 인간을 가리켜 죄의 종살이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의미는 사실 진리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진리가 아닌 것을 붙들고 그것에 매여 살아가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종살이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를 따르라고 권면한다. 그 십자가의 도가 바로 진리의 길이다. 그렇게 볼 때 집단에 속하여 교리를 방패로 삼고 진리를 가로막는 자들은 이미 스스로 종살이를 하는 존재임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이 모인 예루살렘 공의회를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들의 성은 한 세대가 못 되어 심판을 받아 박살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의 소임은 어서 빨리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번듯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군중들에게 설교하셨지만 결국 자신이 진리를 따라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온 세상에 빛이 되셨고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의 민낯을 드러내셨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고 정리했다. 이것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교회의 본분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세상은 밝아지고 새롭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목사와 구도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성경을 연구함으로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며 이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 뜻이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매 순간이 ‘몰론 라베’가 될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나의 전 생애를 걸고 그 구호를 외쳐야 할 것이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을 한다. 아마 그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 박해를 경험하고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교회들이 겪는 어려움은 유대인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다. 그곳에서 결정되는 것이 사방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인정되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와 유사한 이유로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나는 생각한다. 악한 자들이 있는 근거지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 결단을 한 후에 사도 바울은 그의 가장 유명한 ‘몰론 라베’인 사도행전 20장 24절의 고백을 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나이 목숨조차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게 해서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전하고자 올라갔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너머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가이사에게 상소하노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몰론 라베 덕분에 지금 온 세상에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속하고 그 나라에 동참할 수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