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 남치리 선생 묘지명墓誌銘 -김도화金道和
명나라 만력萬曆 8년 경진庚辰(1580)에 비지賁趾 남 선생南先生이 세상을 떠났다. 문충 공文忠公 서애西厓 류 선생柳先生이 묘표墓表를 지어 서술하기를 군은 태어난 지 8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능히 뜻을 갖추고 학업에 힘써 다른 사람 이 굳이 가르치고 독려할 필요가 없었다. 퇴계 선생이 도의道義로써 후진을 가르치고 있 었는데, 군은 겨우 약관이 넘은 나이(21세)로 개연慨然히 문하에 올라 선생으로부터 칭찬 을 받았다. 라고 하였고, 또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군은 여전히 감격하고 분발하여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위 기지학爲己之學에 더욱 전심하여 용모를 바르게 하고 삼가고 절제하며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를 날마다 일삼아 나아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니, 동류들이 모두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라고 하였으며, 또 정축년(1577)에 어머니 변씨卞氏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인정과 예법을 모두 갖추었고, 비 록 몸이 매우 수척하였으나 변함없이 상례를 행하였으며, 3년 가까이 산문山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라고 하였으며, 또
104 그대가……흘렸으리: 남치리가 공자 시대에 살았다면 공자가 남치리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통하 게 여겼을 것이라는 뜻이다. ‘선생’은 공자를 가리킨다. ‘상여(喪余)’는 나를 망하게 하였다는 뜻으 로, 공자가 안회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 [噫 天喪予 天喪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論語 「先進」)
군의 재능과 식견은 세상에 스스로 드러내기에 충분하였지만 진취에 급급하지 않았다. 도리어 의리를 맛있는 음식처럼 좋아하여 여러 사람이 맛보지 못한 바를 맛보았고, 헛됨 과 거짓을 배척하여 버리고 각고면려하여 나날이 밝아지는 실상에 도달함을 추구하였다. 라고 하였으며, 또 평생토록 처한 가난과 근심은 모두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군은 뜻을 편안히 가지고 순순히 받아들여 바야흐로 장차 학문을 진전시키고 행실을 힘쓸 것으로 여겨 스 스로 면려하였다. 곤궁하여 죽음에 이르러도 원망하거나 뉘우치는 낯빛이 없었다. 내면 이 중후한 사람은 외면의 것을 가볍게 여길 수밖에 없는데, 군은 여기에서 이미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도다. 라고 하였으며, 또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군의 서찰을 받아 보니, 그가 논한 바가 명백하고 시원하여 예전의 견해와 같지 않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 군의 학문이 또 나날이 진전되어 훗날의 성취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라고 하였다. 아! 문충공 류 선생의 한마디 칭찬은 화곤華袞과 같은데105 비문碑文에서 논술한 것이 이와 같아 증자曾子가 ‘내 친구[吾友]’라고 칭송한 것106과 다르지 않으니, 한때의 여론이 그에게 쏠려 ‘퇴계 문하의 안자[溪門顔子]’라고 추앙한 것이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아! 지극하도다.
105 칭찬은 화곤(華袞)과 같은데: 지극히 영광스러운 칭찬이라는 말이다. 앞의 각주64) 참조. 106 증자(曾子)가……것: 증자가 죽은 안회(顔回)를 회상하면서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물 으며, 학식이 많으면서도 적은 사람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듯이 하며, 가득 차도 빈 듯이 하 며,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는 이가 있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예전에 내 친구(안회)가 그렇게 했 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 吾友嘗從事於斯矣]”라고 한 것 을 가리킨다.(論語 「泰伯」)
선생의 이름은 치리致利, 자는 의중義仲이고, 그 선조는 영양英陽 사람이다. 고조부 정귀貞貴는 창덕궁 녹사昌德宮錄事이고, 증조부 경이敬彛는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이고, 조부 식軾은 영천 훈도榮川訓導이고, 아버지는 신신藎臣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 卞氏로 진사 변백원卞百源의 따님이다. 배위는 의령 남씨宜寜南氏로 참봉 남순성南順成의 따님이다. 아들 둘은 기경驥慶‧호경虎慶이고, 딸 넷은 모모에게 시집갔다. 호경의 아들 은 지호之岵‧지민之岷이다. 지호의 아들은 두찬斗燦이고, 지민의 아들은 두욱斗煜‧두온斗 熅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계묘년(1543)에 태어나서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대현 大峴(한티재)의 청곡廳谷에 장사 지냈다가 300여 년 뒤 고종 경자년(1900)에 지역의 선비 들이 묏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노림魯林107 앞산의 묘좌卯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는데, 예전부터 묘소의 지석誌石이 없는 것이 참으로 한스러웠다. 삼가 묘표墓表에 기록된 줄 거리를 모으고 감히 한마디를 덧보태어 돌에 써서 광壙의 남쪽108에 넣는다. 이어서 명銘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도산을 열어 天啓陶山 유가의 도를 크게 떨치고 大振儒鐸 선생이 문하에 들어가니 先生是趨 약관의 나이 때였네 粤自冠弱
107 노림(魯林) : 지금의 안동시 남선면 원림리에 속한 마을이다. 108 광(壙)의 남쪽: 지석(誌石)을 묻는 곳이다. 주자가례 「상례(喪禮)‧하지석(下誌石)」에 따르면, “묘소가 평지에 있으면 광(壙) 안의 남쪽 가까운 곳에 먼저 벽돌 한 겹을 깔고, 지석을 그 위에 놓고, 또 벽돌로 사방을 둘러싸고 그 위를 덮는다. 만약 묘소가 산기슭 험준한 곳에 있으면, 광에 서 남쪽으로 몇 자 사이에 4~5자 깊이로 땅을 파서 이 방법에 의거하여 묻는다.[墓在平地 則於 壙內近南 先布磚一重 置石其上 又以磚四圍之 而覆其上 若墓在山側峻處 則於壙南數尺間 掘地深四 五尺 依此法埋之]”라고 하였다.
영리하고 슬기로운 바탕에 穎悟之姿 각고면려하며 배웠으니 刻勵之學 행단의 삼천 제자 중에 杏壇三千 안씨가 가장 뛰어났네109 顔氏其卓 스승의 도를 이어 밝혀 道紹先師 공이 백세토록 드리웠네 功及百世 서애 어른이 명을 지었으니 厓老有銘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天壤俱弊
후학 통사랑 행 의금부 도사通仕郎行義禁府都事 문소聞韶 김도화金道和110가 삼가 짓다.
지난 건릉健陵(정조) 정미년(1787)에 선생의 문집을 속간續刊할 때 힘이 부족해 널리 배포하지 못하여 원근의 학사學士 대부大夫가 선생의 글을 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을해년(1935) 봄에 사림에서 다시 인쇄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공산사公山社111에 갈무리했던 판본이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서문판序文板 4판, 2권 몇째 판, 부록 하附錄下 몇째 판이 없어졌다. 없어진 것을 보충하여 간행하려 고 하는데, 위의 겸암謙菴 류 선생柳先生이 지은 만시輓詩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21년 되는 경자년(1900)에 묘소를 이장할 때 곽槨 안에서 발견되었고, 둔와遯窩
109 행단(杏壇)의……뛰어났네: 공자의 제자 3,000명 중에 안회(顔回)가 가장 뛰어났다는 말이다. ‘행단’은 공자가 강학하던 곳이다. 여기서는 이황의 제자 중에서 남치리가 공자 문하의 안회에 비길 만큼 뛰어났다는 의미이다. 110 문소(聞韶) 김도화(金道和, 1825~1912) : 문소는 의성(義城)의 옛 이름이다. 김도화의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菴), 본관은 의성이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한말 안동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저서로는 척암집이 있다. 111 공산사(公山社) : 공산정사(公山精舍)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정사는 안동시 일직면 망 호리에 있는 건물로, 영양 남씨 노애(魯厓) 남태백(南太白, 1559~1601)‧운간(雲澗) 남태화(南 太華, 1565~1591)‧청천(晴川) 남태별(南太別, 1568~1635) 3형제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남공南公(남국신南鞠臣)이 지은 만시가 근래에 또 본가의 상자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묘지墓誌는 또한 이장할 때 척암拓菴 김공金公이 찬술하여 광壙에 묻은 것이다. 이것들을 지금 원집原集 속에 넣을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책 끝에 부록하고서 ‘부록 보附錄補’라 하고 함께 간행한다. 그리하여 그 사유를 아래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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