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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것을 목말라함에 대한 죄의식>의 줄거리:
죄의식은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면서 그 죄를 싫어하는 의식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죄를 싫어하면 할수록 구원 얻을 가능성과 또한 구원을 얻은 감격과 기쁨이 커집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으면 나타나는 증상은 그 구원을 전하는 것입니다. 죄의식이 없어 구원을 못 받고 그래서 감격과 기쁨이 없고 그래서 전도도 없는 겁니다.
세상 것을 목말라함에 대한 죄의식
(요한복음 4:25~30)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것을 목말라함에 대한 죄의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것을 목말라함에 대한 죄의식”
본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수가성 여인의 기쁨과 감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기쁨과 감격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이 여인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영인 마음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목마름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점과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마음의 목마름을 염두에 두자면 구원이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받은 상태는 자기 자신을 삼키고 잊게 할 정도의 기쁨과 감격으로 표현됩니다. 마음의 목마름 즉 채워지고자 하는 바람과 소원이 없어지게 된다면 기쁨과 감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감격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강력합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햇볕이 가장 따갑고 더운 정오에 1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자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로 들어갑니다.
여인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뒤에 생겨난 기쁨과 감격이 육체의 모든 필요성이 망각 상태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된 자의 감격과 기쁨의 특징은 몸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에 필요한 것은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조달하시고 공급하시는 상황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구원을 받으셨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삶을 살고 계신다면 몸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수가성 여인처럼 잊어버리게 됩니다.
또한 구원으로 인한 변화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사회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성의 핵심은 인간관계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사회성에도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 여인은 수가성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사는 부정한 여인이라 여겨져서 누구도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도 자신을 따돌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수가성이라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또한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부정하고 박복한 여자임을 자인하면서 인간사회로부터 버려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서 마음속 목마름을 해결받자마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예수님을 전도하게 됩니다. 수가성 여인은 마을로 들어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부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나를 기피하였고 소외시켰습니다. 그런데 내가 우물가에서 처음 만난 분은 나의 치부를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여러분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이고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치부를 드러내며 예수님을 전하는 모습 속에서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인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얘기를 합니다. 이게 구원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되면 이전의 내가 남처럼 느껴지게 될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됩니다. 이전의 내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면 구원받은 후의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특징은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 밖의 인격체였던 나를 완전히 남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에 수가성 여인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지금 현재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이전의 나는 완전히 남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죄인으로 살고 있던 나를 완전히 남처럼 느끼는 것이 바로 죄 사함의 정수입니다. 그리고 더는 나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이전의 나와의 결별이 구원이 주는 감격이고 구원의 속성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몸에 필요한 것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쁨과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이전의 나를 완전히 남처럼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내가 생겨나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만남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날 때는 죄의식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 하신 예수님께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대답에는 당시 사회상과 연관된 여인의 죄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2000년 전 중동 땅에서는 여성의 인권은 남성 의존적이었습니다. 여성의 마음속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남편이라는 존재였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기대하는 것이 여인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면서도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인은 마음의 근원적 목마름을 남편으로 해결하려는 자신을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라는 존재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존재를 통하여 여섯 번이나 좌절하게 된 목마름 해결에 대한 기대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를 갖는 자신이 너무나 싫었기에 남편을 데려오라 하신 예수님께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 속에 발생하고 있는 내적인 목마름을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내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구원이란 내적인 목마름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의해서 해결된 상태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몸과 연관된 필요성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옛날에 나를 보겠지만 나 자신은 옛날의 나가 남처럼 보일 정도로 새로운 나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 여인과 같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여인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인에게 남편은 세상 것을 대표하는 존재였습니다. 여인은 세상 것을 통해서 마음속 목마름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싫어하는 상태였습니다. 우리 또한 세상 것을 바라는 나, 세상 것을 소원하는 나, 세상 것을 갈망하는 나를 싫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싫어함은 죄의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죄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가 나타나는 나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죄를 알고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식이란 내가 알고 있는 죄가 나타나는 나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는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을 기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은 옹달샘과 같습니다. 지하에서 흐르던 물이 약한 지반을 뚫고나오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옹달샘이 됩니다. 이처럼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건강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면 건강에 대한 바람과 욕구가 계속 생겨서 흐름을 이루게 됩니다.
헬라어로 죄를 뜻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로서의 목마름은 과녁에서 빗나간 흐름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목마름이 생기는 근본적 이유는 마음의 구조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준비된 공백이기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지 않을 때는 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목마름이 생기는 근본적 이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생기는 목마름의 해결은 하나님에 대한 바람과 소원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으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과녁에서 빗나감으로써의 죄입니다.
이러한 죄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죄의식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의식은 마음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목마름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목마름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 생기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향할 수 있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목마름은 오히려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된 목마름의 방향이 하나님 외의 대상을 향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돈이나 건강 혹은 삶의 문제 해결을 통해서 마음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본래 목마름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기에 죄입니다. 죄의식은 이렇게 잘못된 방향의 대상으로 목말라하는 나를 싫어하는 상태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따라 남편을 통해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여섯 번이나 실패하였고 결국 여인은 그러한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남편을 데려오라 하신 예수님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목마름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자신을 너무나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죄의식이 있을 때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가져오신 구원을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죄의식이 없으면 아무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수가성 여인과 같은 기쁨과 감격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수와 영희는 애인사이입니다. 그러던 중 철수가 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영희가 철수를 그리워하는 중에 연말이 되었고 그리움은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영희는 길을 가다 우연히 고등학교 남자 동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반갑다며 차 한 잔을 마시게 되었는데 어느덧 철수에 대한 그리움이 이 남자 동창에게 향하게 되었고 결국 데이트 약속까지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데이트를 하려고 나가다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게 됩니다. 연말 분위기에 들떠서 철수에 대한 목마름을 다른 남자에게 적용하려는 자신이 너무나 싫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 것을 목말라함에 대한 죄의식이 이와 같습니다. 마음속 목마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생겨난 것인데 이 목마름을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돈을 더 벌었으면 좋겠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승진했으면 좋겠다. 자녀들이 형통하면 좋겠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명품을 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크든 작든 인간에게서 나오는 바람이나 소원은 전부 하나님이 안 계셔서 생기는 목마름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것들을 향해 마음을 쏘아 보낸다면 과녁으로부터 빗나간 것입니다. 이 목마름의 흐름이 잘못되었음을 느끼면서 그러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바로 죄의식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수가성 여인으로부터 즉각적인 기쁨과 감격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목마름에 대해서 하나님 외의 세상 것을 겨냥하고 마음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를 싫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옹달샘이 되는 것입니다. 목마름은 계속해서 흐름을 이루며 줄기를 만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마음속 목마름이 하나님을 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서 하늘 보좌까지 닿는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흘러갈 파이프라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목마름 자체는 계속 발생하는 것이기에 문제는 목마름의 흐름이 계속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 것들은 목마름의 방향을 틀어버립니다. 마음의 목마름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에 대해 흘러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가려고 하다가 어느새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이란 목마름의 흐름이 하늘까지 유지되는 것입니다. 한강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마음속 목마름의 흐름은 하늘에 닿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목마름의 흐름을 타고 하나님의 좋으심이 내려오면서 기쁨과 감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은 우리의 마음속 목마름이 지속하여 흐를 수 있는 길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의 좋으심이 내려올 수 있는 길이 되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좋으심이 솟아나는 옹달샘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세상 것들을 느낄 때마다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의 흐름은 방향을 꺾고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그렇기에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바라보지 않으면 하늘을 향하는 마음속 목마름의 흐름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마음속 목마름의 흐름이 하늘까지 가서 닿고 유지되어야 한강에 배가 왕래하듯이 하나님의 좋으심이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기쁨과 감격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이 이 세상 것들을 향한 소원이나 바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목마름의 방향이 꺾여서 세상으로 흘러가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좋으심이 내려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목마름의 흐름은 하늘에 닿아야만 합니다. 죄의식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든지, 장사하는 분이라면 손님이 좀 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바람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러한 바람을 갖는 나를 싫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수가성 여인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면서 남편을 통해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했던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장사를 하는 분이라면 마음의 목마름을 손님으로 채우려는 내가 싫어서 “나는 장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이라면 자녀에게서 마음의 목마름을 채우려는 내가 싫어서 “나는 자식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회사원이라면 승진으로 마음의 목마름을 채우려는 내가 싫어서 “나는 이 회사에서 죽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했듯이 우리는 매사에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는 죄적 체질이 나타나고 있는 내가 너무 싫어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마음속 목마름의 흐름이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벗어나서 세상 것을 향하고 있는 나를 싫어하는 것이 죄의식입니다. 이러한 죄의식을 가지고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다면 수가성 여인에게서 나타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은 남의 이야기입니다. 세상 것을 목말라하며 살던 나의 모습은 옛날 모습이 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목마름이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향해 꺾여 흘러가고 있는 빗나감을 싫어해야만 합니다. 돈을 원하는 나, 건강해서 오래 살기를 원하는 나,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나, 물건들을 갖고 싶어 하는 나를 싫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나를 싫어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확인하려는 죄의식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세상 것을 목말라함에 대한 죄의식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붙잡게 합니다. 이 죄의식을 통하여 수가성 여인이 느꼈던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감격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속 목마름과 연관된 갈증과 소원과 욕구에 대해 죄의식을 가짐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가 계속 유지되게 해주심으로써 수가성 여인이 느꼈던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감격이 나의 것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