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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갈라디아서 3장 19-22절
범법으로 더해진 율법의 목적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친다고 말하면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신 약속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창세기에서 그 자손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으로, 에서가 아닌 야곱으로, 이후 열두 아들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으로 확장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궁극적 성취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울은 ‘그 자손’을 그리스도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훗날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으로 인해 폐기되거나 변경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언약이나 유언도 일단 확정되면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언약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약속이 이후에 주어진 율법으로 인해 수정되거나 무효화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변성을 스스로 부인하시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언약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불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이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만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을 훼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약속에 근거한 은혜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일관되게 논증하는 바와 같이, 의로움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때문에 믿음에 행위를 더하여야만 의롭다 함과 구원을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이제 바울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논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믿음과 함께 율법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할 때 율법으로 의를 이룰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가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이 17절에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고 할 때 저들은 언약을 주시고 난 뒤 율법을 주신 것은 약속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물을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약속은 율법의 도움 없이는 그 자체만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과 함께 율법을, 믿음과 함께 행위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오늘 본문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여기서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모세의 율법 안에 복음의 약속이 없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칼빈 주석에서 표현한 것을 가지고 오면, 모세의 고유한 직무는 생명의 법칙을 규정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지켜야 할 의식을 가르치며, 약속과 위협을 저들에게 첨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믿음에 속한 것, 즉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과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를 통해 논증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과 함께 율법의 행위를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율법 안에 의식법이 있고, 그런 의식법을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약속과 관련해서 비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약속이 먼저요 이후에 생긴 율법이 약속을 폐하거나 헛되게 할 수 없다고 할 때 저들이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합니다. 즉 아브라함과의 약속, 이삭과의 약속, 야곱과의 약속,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한마디로 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가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갈3:12), 이런 율법을 약속 이후에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은 범법으로 인해 더해진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범죄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범법으로 인해 더해진 율법이란 어떤 의미인가? 로마서 5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실제로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는 있었습니다. 일단 죄가 전혀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모든 것을 허락하시면서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2:17). 그러나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행위언약에 대한 불순종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숨기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낳은 가인과 아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도 모세의 율법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첫 범죄로 말미암아 죄는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 죄성이 어떻게 나타났느냐?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 일의 계기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서입니다. 단지 형이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죄가 있었고, 그 죄에 대하여 인식하게 하셨고, 심지어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벌을 내리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려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죄에 대해 핑계를 대기도 하고, 나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선악과 명령에 대하여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아담은 하와 탓을 했고, 하와는 뱀 탓을 했습니다. 특히 아담은 누구 탓까지 했느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문제는 이런 아담의 본성이 이후 모든 인류에게도 전가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사람 탓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떤 죄에 대하여 정직하게 죄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려고 할 뿐입니다. 사람을 탓할 수 없다면 환경을 탓하고, 그런 환경을 허락한 하나님 탓을 하기까지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원망 불평을 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는 것으로 원망 불평합니다. 그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십니다. 특히 만나를 주실 때 일용할 양식을 거두고, 안식일 전에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예비해 두도록 하시는 시험을 하십니다. 먹고 마실 것이 없어 원망 불평하는 저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면서 시험하신다는 것은 먹고 마실 것이 주어지면 과연 원망 불평하지 않는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나아가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으로 원망 불평합니다. 즉 환경을 탓해서 환경을 개선해 주면 또 다른 것으로 원망 불평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신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더하셔서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스스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죄를 죄로 여기게 만들고, 죄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하셔서 결국 자신이 죄인이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수 없음을,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서 3장에서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말씀하는 것이고, 로마서 5장에서는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5:20)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7:13) 율법으로 인해 범죄가 더 많아지거나 늘어난다, 혹은 죄로 더욱 죄 되게 한다는 게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본성적으로 죄에 대하여 핑계를 대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자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더욱 분명하게 밝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모든 기능을 소개하지는 않지만, 율법의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의 죄를 죄로 드러내어 결국 정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무엇이 살인인 줄 알게 하시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심으로 무엇인 간음인 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때 단순히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 다른 사람의 육체를 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도 죄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율법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거짓이 아닌 사실이지만,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말씀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를 얻고자 하는 자는 소망이 아니라 절망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본문에 대하여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율법은 범법한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요, 또 이렇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범죄를 시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을 변명하기 좋아한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일깨워주지 않으면 저들의 양심은 마비되어 깊이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적용하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누구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이 세상의 어떤 법보다도 최상의 법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고, 각 나라마다 법을 정합니다. 이러한 법들 가운데는 공통적인 요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법을 정한 것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에는 많은 법이 있고, 나라마다 그 법을 적용하는 것이 같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각 나라마다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죄가 아닌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법에는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세상 법이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마음으로 욕하고 나쁜 생각을 한다고 해서 벌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세상 어떤 법이 벌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은 생각하는 것, 마음으로 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죄라고 말씀하고 있고, 재판관 되시는 하나님은 그런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러하기에 율법은 세상의 어떤 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법이요, 그 법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판결에 있어 실수하거나 잘못 판단하시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율법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죄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유익함으로 있는데, 왜냐하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의와 구원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찾을 수밖에 없느냐?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0). 즉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저히 부정하고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원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찾고 더욱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율법과 관련하여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로마서 5장 20절 상반부를 언급했지만, 20절과 21절에 보면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이끄느냐 할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언약과 관련된 약속을 주신 후에 율법을 주신 것은 은혜언약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 부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완해 줄 어떤 행위를 추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그러한 이유 혹은 목적 때문이 아니라, 죄를 억제하거나 죄를 보여주고 드러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매튜 풀 주석 참고)임을 말하기 위해 19절 이하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즉 범범으로 더해진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로서는 의와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 대신하여 의와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그리고 다음 주까지 보게 될 핵심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을 다시 보시면 이런 율법을 누구를 통해 주셨는가 했을 때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단 천사들을 통하여 주셨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도 증거됩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입니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53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러나 정작 출애굽기 19장, 20장에서는 천사를 통해 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매튜 풀 주석은 신명기 33장 2절을 언급합니다.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여기서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다고 말하는데, 히브리어 원문은 ‘거룩한 자들의 수만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얼핏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도행전 7장 53절과 비교할 수 있는 구절로 신명기 33장 2절로 언급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거룩한 자들을 천사로 이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천사를 시켜서 수여하셨거나, 천사들을 대동하시고 수여하신 것’으로 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 어떤 이들은 모세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로 해석합니다. 모세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마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처럼 실제로 세워졌고, 또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5장 5절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특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비교하는 맥락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을 말함에 있어서 중보자를 모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그리스도로 보는데, 왜냐하면 20절 말씀 때문입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여기서 한 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라고 할 때 두 편을 위한 중보자라는 의미로서 말씀하는데, 모세로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갈라디아서의 맥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또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14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친다는 맥락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약속이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신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고 할 때 두 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이방인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에 보겠지만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라고 할 때 중보자는 모세보다는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까지를 하나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유사 이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즉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사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거룩한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했다(벧후1:21)고 하며, 그리고 바울도 역시 그리스도를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한 자라고 했다(고전10:4).”
정리하자면 출애굽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라고 할 때 그 자손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출애굽기에서 율법을 주실 때도 모세를 통해 주셨지만 모세는 모형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교하자면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이 그리스도이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에게 나아가십니다. 비록 실체로 오시지는 않았지만, 모세의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그렇고 모세의 율법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모세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율법조차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 다시 말해 범법으로 인해 더하여진 율법은 언제까지 효력을 발휘하는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입니다. 인간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이 있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시는가? 약속하신 자녀가 올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 즉 자신이 실체로 오시기까지 효력을 발휘하도록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라고 할 때 약속하신 자손이 온 이후에는 모든 율법이 더 이상 필요가 없는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폐해져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율법하면 영원한 도덕법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시적으로 주신 의식법, 재판법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 단순히 의식 자체뿐만이 아니라 모든 율법, 즉 거기에는 도덕법도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았다 할지라도 이 도덕법은 폐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신앙과 삶의 규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알려주기 때문에 꼭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게 율법, 즉 도덕법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율법을 말할 때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만 유효하다고 해서 모든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범법으로 인해 주신 율법,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그 일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어디에 구약 백성들을 맡겨 놓으셨는가 하면 율법에 맡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율법에 맡겨 놓으셨는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의와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율법 안에서는 의식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9장 3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의식법의 일부는 예배에 대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표하도록 하셨던 겁니다. 그들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신 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율법 안에서 예표와 모형으로 두신 것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를 더욱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율법을 허락하셨다고 할 때 율법은 결코 복음을 거스르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복음과 대조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복음의 보좌관 역할을 위해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본래부터 의롭게 되는 방법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로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을 주신 분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복음이나 율법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동일한 뜻을 전할 목적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복음의 다른 형식이며, 복음은 율법의 다른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율법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 목적은 참된 복음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역할로 있을 뿐입니다. 이를 위해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죄해야 우리 스스로는 의와 구원을 이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결국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율법은 복음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복음을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절에서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고 할 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까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할 때 그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또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다고 할 때 언약이나 율법이 상반되게 나타날 수 있는가? 한 분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은혜라고 말씀하셨다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행함 없이는 의를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 저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런 하나님이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십니다. 그 은혜를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잠시 맡겨 놓으신 것이고, 이방인에게까지 나타내실 때는 복음으로 드러내셨던 겁니다. 율법에 잠시 맡겨 놓으셨다는 것은 그 율법 안에도 복음의 내용이 들어 있게 하셨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쉽게 말해 율법은 약속,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과는 반대되고 대조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율법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생명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치 우리 스스로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말하는 복음과는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 스스로 생명을 취하라는 말씀과는 달리 목적하는 바가 죄를 죄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정죄하여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걸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제공하도록 할 목적으로 주셨다면 복음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주시되, 율법보다 먼저 복음의 약속을 주셨다는 것은 율법이 약속을 거스를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 깨달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은 우리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는 어떤 것도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남달리 착실하게 살고, 또 부지런히 살고, 남들보다 좀 더 깨끗하게 살고,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로 가둘 뿐입니다. 결코 잘했다, 귀하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특성상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 할 때 율법은 누구라도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율법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죄인으로 시작해 죄인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고자 하는 내용인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의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함께 율법의 행위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전적인 부패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적인 무능력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 의와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율법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할 때 신약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인 됨을 확인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라고 할 때 이 약속이 은혜의 약속이라면 우리는 믿음조차 우리의 실력과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을 인정한다면 믿음조차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것까지 인정하게 됩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다고 할 때 우리 스스로 믿은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러므로 우리의 의와 구원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가, 또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했다,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믿음 또한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다시 말해 그의 공로만을 나의 것으로 삼는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율법이 범법으로 더해진 것이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한다고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