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초한지(楚漢志) -제16화, 자초의 아들 정, 소양왕에게 뜻을 이를 것을 다짐하다. 소양왕은 어린 손자 정의 얼굴을 뚫어 바라보다가 가슴에 맺힌 한을 토해내듯 말한다. “정(政)아, 이 할애비는 천하 통일의 큰 뜻을 품고 50여 년간을 동분서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렇게 병이 들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구나. 네가 이 할애비의 뜻을 꼭 이어받아서 반드시 통일 천하를 이루도록 하여라. 그게 죽을 날을 앞둔 내가 너에게 남기는 유언이니라.” “할바마마의 말씀을 꼭 명심하겠나이다.” 소양왕의 말을 듣고 있던 정은 고심도 하지 않은 채 서섬없이 말한다. 소양왕은 어린 손자의 대담한 말을 듣고 혼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이제 내가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구나.” 소양왕은 이번에는 여불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귀공의 덕택으로 자초가 무사히 탈출해 왔으니 귀공의 은혜는 말로 펴현할 수 없구려. 귀공은 우리 진나라에 길이 머물면서 동국국승(東國國乘)의 자리를 맏아 주시오.” 동국국승의 벼슬자리는 왕자 자초의 교육을 맡아 가르치는 중요한 직책이다. 조나라에 있을 깨부터 자초 부자는 여불위의 지도를 받아왔다. 여불위는 소양왕의 부탁을 듣고 아뢰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귀공에게는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귀공은 관상을 보아하니 범상한 인물은 아니오. 귀공에게 동국국승을 제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니, 귀공은 나의 손자 정을 특별히 위대한 인물로 키워 주기 바라오. 이 아이는 후일에 천하를 통일할 귀중한 인물이단 말이오.” “네 알겠습니다. 지엄하신 분부 받들어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말씀을 거듭 거듭 명심하겠습니다.” 여불위는 머리 숙여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또 한 번 웃으며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이 영감아, 정은 영감의 손자가 아니고, 바로 내 아들이란 말이오. 그 애가 장차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그 나라는 진나라가 아니고, 나의 아들의 나라가 될 것이란 말이오.’ 여불위는 그날부터 세자궁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왕손비인 주희와도 맘대로 밀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불위는 주희와의 밀회를 피하려고 애를 섰다. 만약에 불륜의 관계가 탄로 나면 엄청난 파국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여불위 자신만 아니라 주희와 함께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주희는 워낙 음욕이 강한 여자인데다가 잠자리에 충실하지 못한 남편인 자초에 대하여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여 주희는 여불위와 단둘이 만나기만 하면 체면불구하고 동침을 요구했다. 여불위는 어느날 마지 못해 주희와 합궁을 즐기다가 주희에게 말했다. “이것아! 우리가 이렇게 밤낮으로 만나다가 비밀이 탄로 나면 목이 날아갈 판인데, 너는 어찌 그것도 모르고 아무 때나 덤벼드느냐.” 여불위가 그렇게 겁을 주면 주희가 겁을 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주희는 한술 더 떴다. “죽는 일이 있더라도 당장 못 견디겠는걸 어떡해요.” “이것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이제부터는 자주 만나 주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라!” “그건 안 돼요! 세자비의 명령을 동국국승이 거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뭐래도 그것만은 안 돼요! 약속이 다르잖아요.” 여불위는 한편으로 두려웠지만, 주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불위는 주변을 둘러보면 긴숨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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