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건대 나의 외조부이며 이조 판서 행 형조 정랑에 증직된 이공(李公)은 실로 관찰사 이우당(二憂堂)의 셋째 아우이다. 이우당공은 숙종조(肅宗朝)에 높은 덕과 넓은 도량으로 온 세상의 표준이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중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사우(士友)의 논의는 공이 이우당공의 자취를 이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몹시 은근히 기대했는데 공도 재능은 컸으나 운명이 기구해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고, 명성이 퍼져 세상에 드러난 것이 낭서(郞署)와 현치(縣治)를 지내는 데 불과하였다. 벼슬의 직위는 진실로 시대에 구애를 받았다지만 사명(司命)이 공에게 수명을 많이 주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당(唐)나라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의 후예로서, 이름난 석학이 대대로 이어져 실로 우리나라에서 명망이 있는 집안이다. 휘 광정(光庭)은 이조 판서를 지냈고 공훈으로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청백리에 뽑혔는데, 공에게 고조부가 된다. 증조 휘 현(袨)은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 병자년(1636, 인조14)에 관향사(管餉使)로서 세운 공로로 세상을 떠난 뒤에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조부 휘 성징(星徵)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부친 휘 형(泂)은 생원시에 장원하여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나 장수하지 못하고 효릉 참봉(孝陵參奉)에 그쳤으며, 나중에 이조 참판 연창군(延昌君)에 증직되었다. 모친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의 후손으로 참군(參軍)을 지낸 최대년(崔大年)의 따님이다. 5남을 두었는데, 장남 휘 만원(萬元)이 바로 이우당이다.
공의 휘는 만성(萬成)이고, 자는 정보(貞甫)이며, 기개가 크고 시원스러워 무릇 여울물을 터놓은 듯한 용기를 지녀서 공과 용기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우당공이 누차 이조 판서를 맡아서 가문이 번성하였으나, 공은 밤낮으로 학업을 익히며 망녕되이 손님을 한 사람도 부르지 않았다. 필법(筆法)은 더욱 굳세어 저 멀리 진왕(晉王)을 본받고 가까이로는 충정공(忠定公 증조 이현(李袨))의 심화(心畫)를 추구하여, 세상에서 병풍과 묘갈을 구하는 자들 중에 공의 손을 빌리려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공은 이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스스로 기약한 것이 처음부터 훗날 조정에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살피는 사업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오년(1690, 숙종16)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 서전(西銓 병조)을 관장하는 자가 계방(桂坊)의 세마(洗馬)를 엄선했는데, 마음이 공에게로 쏠려서 사람을 시켜 슬쩍 공의 뜻을 떠보게 했으나, 공이 달가워하지 않자 전부(銓部 전조(銓曹))가 감히 억지로 하지 못하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세상의 운수가 뒤집히고, 이우당공 역시 하세(下世)하였다. 공은 시사(時事)가 어쩔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지기(志氣) 역시 권태로워져서, 정해년(1707)에 억지로 능서랑(陵署郞 능참봉)에 나아갔고, 4, 5년 사이에 다섯 번 옮겨 형조 좌랑이 되었으며, 이어서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 해에 다시 형조에 들어가 정랑에 올랐다. 공이 송사를 자세히 듣고 심리하는 것이 명민하고 환히 통하여 형조에서 송사를 지체하는 일이 없었다. 판당(判堂)이 공을 몹시 그릇으로 여겨서, 어느 날 관아에 출근했을 적에 공에게 이르기를 “모일(某日)에 그대 집에 찾아가 보려 한다.” 하였는데, 판당은 당시 권병(權柄)을 주관하는 자였다. 공이 허락을 달가워하지 않고, 곧 아뢰기를 “그날 마침 일이 있어서 제가 집에 있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판당이 공의 뜻을 알고 그만두었다.
을미년(1715)에 임실 현감(任實縣監)에 제수되었다. 마치 형조에 있을 때처럼 정사를 보자 강명(剛明)함이 온 도에 높이 드러나서, 도내에서 억울함을 풀지 못한 묵은 송사가 저자같이 모여들었으며, 가폐(嘉肺)에서 관례대로 거둔 것이 관청에 쌓이자 그것으로 선산에 비석을 세우는 일에 썼다. 두서너 해 근무하다가 어떤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숙종 무술년(1718) 5월 3일에 세상을 떠나니, 공이 태어난 신축년(1661, 현종2)과의 거리는 58년이다.
이보다 먼저 공은 부모님의 장지가 길지가 아닌 것을 애통해하여 파산(坡山 파주(坡州))의 선영에 이장하려고 도모했으나 종중이 막았다. 공은 몇 년 동안 침식을 거르며 말이 이에 미치면 눈물을 샘처럼 쏟았다. 끝내는 조정에 호소하여 안장할 수 있었으나 수염과 머리카락이 다 세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공을 아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공의 수명이 파산에 이장하는 일 때문에 줄어들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효성스럽도다.” 하였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원배(原配)는 정부인에 증직된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이조 판서를 지낸 심액(沈詻)의 증손녀이자, 정언을 지낸 심상(沈相)의 따님이다. 후배(後配)는 사과(司果)를 지낸 윤형미(尹亨美)의 따님인 증 정부인 해남 윤씨(海南尹氏)와 학생 채제윤(蔡悌胤)의 따님인 정부인 평강 채씨(平康蔡氏)이다.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여 넷째 아우인 성균관 진사 만선(萬善)의 아들 지억(之億)을 아들로 삼았는데, 지억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다.
심씨 부인은 2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진사 한종욱(韓宗煜)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에게 시집갔다. 판서는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보연(普延)은 이른 나이에 죽었고, 사위는 윤항진(尹恒鎭)ㆍ정장간(鄭章簡)ㆍ유사춘(柳師春)이다.
한종욱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의현(韓義顯)ㆍ한의준(韓義俊)이고, 사위 이수일(李秀逸)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채응일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인 나 채제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이며, 사위는 심지연(沈祉衍)ㆍ이태운(李台運)이다.
외증손 중에 현달한 자로는, 이수일의 아들 이경명(李景溟)이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고, 이태운의 아들 이유경(李儒慶)이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윤항진의 아들 윤영희(尹永僖)가 문과에 급제하여 별검을 지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묘는 파주의 치소 남쪽 노곡(弩谷)에 있는 연원공(延原公)의 묘소에서 서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등언리(騰彦里) 오향(午向)의 언덕에 있는데, 심씨ㆍ윤씨 두 부인과 같은 봉분이다. 채씨 부인의 묘는 7대조 삼척공(三陟公)의 묘 서쪽 언덕에 있다. 공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보연의 계자(繼子) 영덕(永德)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지기가 성대하여 / 志氣之盛
암랑에 들길 기대하였네 / 指日巖廊
우리 유학의 도가 곤궁하여 / 吾道之窮
노년에도 금당에 있었네 / 老年琴堂
그 뜻이 크고 기개 있음은 / 惟其倜儻
세가의 풍도 때문이었네 / 以世家風
그 아들에 그 손자 있어 / 伊子伊孫
팔좌에 높이 앉았네 / 八座崇崇
이것이 보답을 받은 것이니 / 是維食報
하늘은 흐리멍덩하지 않네 / 天不夢夢
[주-D001] 이우당(二憂堂) : 이만원(李萬元, 1651~?)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이다.[주-D002] 현치(縣治) : 현청이 있는 마을로, 여기서는 작은 고을을 다스렸다는 뜻으로 쓰였다.[주-D003] 사명(司命) : 사람의 운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神)이다.[주-D004] 이무(李茂) : 연안 이씨의 시조이다. 당나라 고종 때 중랑장을 지내다가 나당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식읍 1000호를 받아 살게 되었다고 한다.[주-D005] 광정(光庭) : 이광정(李光庭, 1552~1627)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이다. 1601년(선조34) 청백리에 뽑혔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1604년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연원군(延原君)으로 봉해졌으며, 이어 부원군에 진봉되었다.[주-D006] 관향사(管餉使) : 비상시에 군량으로 쓰기 위하여 특별히 관리하던 양곡을 관향미(管餉米)라고 하는데, 이를 관리하던 관직이다. 1623년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각 지방에 군량을 비축하고 관향사를 파견하여 이를 관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 치중하게 되었고, 1636년에 이르러서는 평안도 감사가 관향사를 겸임하게 되었다.[주-D007] 형(泂) : 이형(李泂, 1628~?)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공윤(公潤)이다.[주-D008] 최항(崔恒) : 1409~1474. 본관은 삭녕, 자는 정보(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 시호는 문정(文靖)이다.[주-D009] 진왕(晉王) : 동진(東晉)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주-D010] 심화(心畫) : 마음의 그림이란 뜻으로 글씨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은 《법언(法言)》 권5 〈문신(問神)〉에서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와 그림이 드러남에 따라, 군자와 소인이 보인다.[言心聲也, 書心畫也. 聲畫形, 君子小人見矣.]”라고 하였다.[주-D011] 판당(判堂) : 판서의 별칭이다. 여기서는 형조 판서를 말한다.[주-D012] 가폐(嘉肺)에서 …… 것 : 재판에 관련된 양쪽의 당사자들이 관청에 내는 일종의 공탁금이다. 가폐는 가석(嘉石)과 폐석(肺石)의 준말로 재판을 뜻한다. 가석은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앉혀 부끄러움을 주어 회개시키는, 무늬가 있는 돌을 말한다. 폐석은 붉은 돌인데, 억울한 백성들이 위에 아뢰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 장리(長吏)가 전달해 주지 않을 경우 3일 동안 이 폐석에 서 있으면 사사(士師)가 그 사정을 올려서 위에 아뢰고 그 장리를 죄주었다 한다. 《周禮 秋官司寇 大司寇》 관례대로 거둔 것은 균금속시(鈞金束矢)를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공탁금이다. 《주례》 〈추관사구(秋官司寇)〉에 “백성이 소송을 제기할 때는 반드시 양쪽에서 다 속시(束矢)를 조정에 바친 후에 판결을 내리고, 백성이 옥사(獄事)를 일으킬 때도 양쪽 문권(文券)과 균금(鈞金)이 다 조정으로 들어온 후 3일 만에 판결을 내린다.”라고 하였다.[주-D013] 심액(沈詻) : 1571~1654. 본관은 청송, 자는 중경(重卿), 호는 학계(鶴溪), 시호는 의헌(懿憲)이다.[주-D014] 지억(之億) : 이지억(李之億, 1699~1770)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덕유(德庾), 호는 성헌(醒軒)이다.[주-D015] 삼척공(三陟公) : 이말(李𡊉, 1466~?)로, 본관은 연안, 자는 말지(𡊉之)이다.[주-D016] 암랑(巖廊) : 높고 큰 낭무(廊廡)로, 정승들이 모여 있는 의정부를 가리킨다.[주-D017] 금당(琴堂) : 수령이 정사하는 곳을 말한다. 옛날 복자천(宓子賤)이라는 어진 수령이 선보(單父)라는 고을을 다스릴 때 거문고를 타면서 마루 아래에 내려온 일이 없었으나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呂氏春秋 察賢》[주-D018] 팔좌(八座) : 팔좌상서(八座尙書)의 준말로, 육조 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그리고 한성부 판윤의 통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