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은 휘는 태화(泰和)이고 자는 내중(來仲)이고 성은 이씨(李氏)이며 계파는 한산(韓山)이니,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증조는 회인 현감(懷仁縣監) 이홍조(李弘祚)이고, 조는 이효제(李孝濟)이며, 고는 이석관(李碩觀)이다. 대대로 벼슬이 현달하지 않았으나 문한으로 그 집안을 이어 나갔다. 비는 공인(恭人) 신씨(申氏)이니 예조 좌랑 신규(申圭)의 따님이요, 홍문관 수찬 증 도승지 신달도(申達道)의 손녀이다. 숙종 병진년(1676, 숙종2) 1월 6일에 선군을 낳았다.
선군은 어려서부터 점잖고 말이 없어서 말이나 안색을 급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무릇 일은 대체만 지키기를 힘쓰고 까다롭고 잗달게 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의연하여 남들이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평생 집안의 생업을 일삼지 않아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선군은 14세에 부친을 잃고 할머니를 매우 정성스럽게 섬겼으며, 함께 교우하는 상대는 모두 한때의 어질고 덕망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사귀는 벗들이 한결같이 선군을 성실하고 지조가 있다고 일컬었다.
무진년(1748, 영조24) 3월 16일에 병으로 침소에서 마치니 향년 73세였다. 그해 5월 19일에 고을 관아 남쪽 외야현(外野峴)의 신향(辛向) 언덕에 장사하였다.
선비 이씨는 장악원 주부 이재(李栽)의 따님으로 갈암(葛庵) 선생 이현일(李玄逸)의 손녀이다. 부덕(婦德)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으나 선군보다 32년 먼저 돌아갔다. 고을 남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대곡(大谷)에 장사하였으며, 별도로 지문이 있다.
아들은 넷인데, 후정(後靖)과 헌정(憲靖)은 먼저 죽었고, 상정(象靖)은 문과에 급제해 병조 정랑이 되었으며, 광정(光靖)은 종조숙부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두 딸은 권정중(權正中), 조학경(趙學經)에게 시집갔다. 또 요절한 아들 하나가 더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서자는 둘이니, 달정(達靖)ㆍ식정(式靖)이다. 서녀는 신처인(申處仁), 김종옥(金宗玉)에게 시집갔다.
후정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어리고 딸 셋은 시집갔고 딸 하나는 아직 어리다. 헌정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윤(
)이다. 상정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완(埦)이다. 광정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는 우(㙖)이고 하나는 어리며, 딸 하나는 시집갔다. 사위 권정중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권사구(權思九)이고 딸 넷은 역시 시집갔다. 식정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선군은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한가로이 거하며 어버이를 봉양하였는데 욕심이 없어 남에게 구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당세를 잊은 적이 없었으니 당시 정사의 득실을 들을 적마다 근심하고 기뻐하였다. 평소에 글 읽기를 좋아하여 더러 한밤중에까지 이르렀으며,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 노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어서 차근차근 올바른 방도로 가르치고 진취에 급급하지 않았다.
장사 때 미처 지문을 두지 못하였기에 14년 후에 삼가 그 세계와 자손, 행적의 대강을 엮어서 광에 바칠 기문으로 삼는다. 아아, 망극한 하늘이시여. 아아, 슬프구나.
신사년(1761, 영조37) 5월 하순에 아들 통훈대부 전 행 병조 좌랑 상정이 눈물을 흘리며 삼가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