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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s://cafe.daum.net/Wellspring/WLSX/15
서론: 서른한 살의 젊은 철학자가 하룻밤 만에 써 내려간 실존의 고백록
목회자로서,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세속 철학의 접점을 고민하는 순례자로서 버트런드 러셀의 1903년 작 에세이 《자유인의 예배》를 읽는 것은 거대한 영적 모험이었다.
특히 이 글이 차가운 논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러셀의 불과 31세(1903년) 청년 시절, 인생의 깊은 시련과 우주의 무관심 앞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하룻밤 만에 써 내려간 글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문장들의 진가가 온전히 다가왔다. 이 글은 단순한 철학적 논증이 아니다. 그것은 젊은 철학자가 제 안의 차가운 유령들과 싸워 이겨내며 글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영적 해방에 이른, 눈물겨운 '글쓰기를 통한 득도의 과정'이었다.
초반부의 다소 거칠고 비관적인 혼란에서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관조와 성숙, 그리고 인류를 향한 뜨거운 긍휼로 나아가는 이 원숙한 여정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심장부와 깊게 맞닿아 있었다.
1. ‘어둠의 동굴’과 자아의 죽음: 러셀 버전의 《고백록》
러셀은 인간이 참된 지혜와 자유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어둠의 동굴’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절망의 문을 통과하고, 자아와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이 도살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순례자의 마음은 새로운 통찰의 대낮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장한 묘사는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증언한 ‘자아의 파산과 회심의 정원’을 고스란히 연상시킨다. 러셀은 비록 제도적 신앙의 언어를 거부했으나, 인간 영혼이 진정한 가치와 천국의 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부정과 포기’라는 십자가와 같은 영적 통과 제의를 거쳐야 함을 진솔하게 증언하고 있다.
2. 적의 영토 한가운데 세워진 성채: 비극의 카타르시스와 십자가 신학
러셀은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빌려, 죽음과 고통이라는 적의 영토 한가운데 세워진 ‘함락되지 않는 성채(자유의 망루)’를 찬미한다. 맹렬한 운명의 폭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정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이 비극적 승리의 형상은, 기독교가 고난과 죽음의 현장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승리를 이뤄낸 ‘십자가의 신학’과 깊이 상통한다.
나아가 이는 상처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마음이 온전히 깨어짐으로써 오히려 더 넓은 영적 진실에 도달한다는 파커 파머의 ‘깨어진 마음(Broken Open Heart)’ 영성과도 맞닿아 있다. 고통의 현장을 회피하지 않고 그 정면을 관통할 때 영혼의 참된 정화(카타르시스)가 일어난다는 진리는 비극 작가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 공유하는 공통분모다.
3. 고통 속의 각성: 카렌 암스트롱의 종교사와 ‘영과 진리의 예배’
러셀은 일상의 사소한 집착이라는 ‘좁은 뗏목’을 둘러싼 거친 대양과 차가운 돌풍(죽음과 고통)을 마주할 때 비로소 영혼이 진정한 각정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는 거대한 재난과 비극의 한계 상황 속에서 인류가 깊은 영적·윤리적 도약을 이루어냈음을 밝히는 카렌 암스트롱의 종교사적 통찰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주의 맹목적 질주와 죽음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한계를 거부나 분노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성소로 깊이 받아들이고 관조할 때 인간은 비로소 운명을 정복하는 자가 된다. 이 경지는 장소와 형식의 맹목적 예속을 뛰어넘어 인간 영혼이 도달해야 할 요한복음 4장의 ‘영과 진리의 예배’,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4. 공통의 운명과 지구신학의 지평: 인류를 향한 긍휼의 도덕률
에세이의 종착점에서 러셀은 인류가 ‘공통의 운명(고통과 유한성)’이라는 가장 강력한 유대로 결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서로를 정죄하는 인색한 저울을 내려놓고, 고통의 밤을 함께 걷는 ‘어둠 속의 동반자’로서 서로의 길에 햇살을 비추어 주는 것—이것이야말로 지구의 미래를 위한 가장 숭고한 보편적 도덕률이자 윤리이다.
결론: 아틀라스의 성소에서 찾은 평화와 지구신학의 지평
차가운 비관론자로 오해했던 31세 청년 러셀의 《자유인의 예배》는, 갈등과 불안으로 신음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가장 고결한 평화의 지침이었다.
무의식적인 힘의 짓밟는 행군 속에서도 자신의 이상이 빚어낸 세계를 지탱하며 아틀라스처럼 홀로 버텨내는 이 비장한 영혼의 자화상 속에서, 나는 기독교 신앙과 모든 인류의 선한 양심이 마침내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지구신학(Global Theology)’의 가능성을 보았다.
차가운 이성의 철학자 산비탈에서 마주한 이 따뜻하고 눈부신 영적 해방의 묵상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목회 현장에도 꺼지지 않는 ‘신성한 불꽃’으로 영원히 타오르기를 소망한다.
에필로그: 40년 만에 만난, 가장 진실한 ‘무신론적 기독교인’
40년 만에 다시 펼쳐 들고 읽어 내려간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인의 예배》는 내게 전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칭했던 철학자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글은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진실한 의미의 기독교인이었음을 보여주는 눈부신 증거였다.
화려한 종교적 수사나 교리에 갇히지 않고, 삶의 부조리와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으며, 이기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이웃의 아픔과 필요를 향해 두 팔을 벌렸던 그 비장하고도 따뜻한 영혼.
40년의 세월을 돌아 비로소 마주한 그 철학자의 성소에서, 나는 배타적 도그마를 넘어 고통받는 인류를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눈빛을 보았다. 차가운 이성의 산비탈에서 피어난 그 ‘신성한 불꽃’은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목회와 신앙의 여정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눈부신 별빛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