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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오소운
글 : 우소운 목사
전 세계 언어학자치고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한글은 과연 다른 문자와 비교하여 얼마나 우수한 문자이며, 위대한 문자일까?
1.1. 만든 이와 만든 때, 그리고 만든 원리가 분명하다.
세계 모든 문자는 만든 이는 물론 그 때도 알 수 없고, 더군다나 글자 제조원리 같은 것은 없다. 누가 어떤 원리로 쓴지도 모르는 채, 수천 년에 걸쳐 계속 발전하거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 만들어진 글자다. 그러나 한글은 1443년에 세종대왕이 만들어 1446년에 반포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제조원리도 기록으로 전래되는 유일한 글자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문자는 로마자와 한자다. 이것들은 모두 3천년 이상에 걸쳐서 만들어졌으며, 우리 옛조상 창힐(倉頡) 할아버지가 창제한 한자는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한자는 이후에도, 쓰이는 동안에는, 계속 새로 추가될 것이다. 이것은 불완전한 문자라는 증거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쓰이는 로마자가 불완전한 것도 두말할 필요 없다. 로마자가 지닌 결정적인 약점은 모음이다. A, E, I, O, U 다섯 글자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게 반자음인 W, Y이다.
한글의 [ㅓ, ㅕ, ㅡ, ㅢ] 등은 표기 불가능하다. [ㅐ, ㅒ, ㅚ] 등도 불가능하다. 반면에 한글에는 모음이 무려 10개나 되는데다가 이를 응용하면 얼마든지 이중 모음을 더 만들어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모음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3천년이 걸렸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이를 불과 3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창제하셨다.
로마자의 기원은 멀리 이집트로 올라간다. 아직도 이집트 글자를 상형문자(象形文字)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아니다. 그것은 표음문자이다. 이를 밝혀낸 사람이 바로「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을 해독한 프랑스의 저 유명한 언어천재로서 16살에 대학 교수가 된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 ~183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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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폴리옹
샹폴리옹(Jean-Francois Champollion, 1790~1832)은 16세 때 이미 라틴어와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6개의 고대 동양 언어에 통달했다. 또한 프랑스 그르노블 아카데미에 제출한 논문에서 그는 콥트어가 이집트 고대 언어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타당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공부한 뒤, 19세 때 그르노블 고등학교의 역사 교사가 되었다(1809~16). 한편 상형문자 해독은 그의 끊임없는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스어 문헌을 상형문자 및 민중문자로 옮긴 글이 새겨진 '로제타 스톤' 이 발견되어,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이 이 비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을 거둔 뒤에야 샹폴리옹은 마침내 이 상형문자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했다. 1821~22년에 그는 로제타 스톤에 씌어진 상형문자와 신관문자(神官文字)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상형문자 기호와 거기에 대응하는 그리스 문자에 대한 완전한 목록을 작성했다. 그는 상형문자 기호 가운데 일부는 자모이고 일부는 음절이며 일부는 앞에 나온 개념이나 사물 전체를 나타내는 지시대명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열리기를 기다리는 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고대 이집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가 마침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발견은 다른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일부 학자들은 그에게 비난을 퍼붓거나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관 관장이 되었으며(1826), 고고학 탐사를 위한 이집트 탐험대를 지휘했으며(1828), 콜레주 드 프랑스에 그를 위해 특별히 신설된 이집트 고대 문화 강좌를 맡기도 했다(1831). 이집트어 문법책(1836~41)과 이집트어 사전(1841~ 43) 외에도 많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가져온 로제타 지역의 괴상한 돌을 그 이전 사람은 모두 그림을 보고 추호도 의심 없이 상형문자로 알고 그 뜻을 읽어내려고 머리가 빠지고 벗겨지고 희어지도록 아둥바둥 애만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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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이집트 문자가 너무 복잡했다는 데 있었다. 그 그림을 일일이 외워서 그린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를 아주 간단히 바꾼 인종이 나왔다. 그가 바로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나와 지중해를 휘어잡아 곳곳에 식민 도시를 건설한 페니키아(Phoenicia) 사람이다. 그들이 건설한 도시로 제일 유명한 게 바로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이다.
이들 페니키아인들은 상업과 군사 중심의 인종이라서 복잡한 문자는 영 생리에 안 맞았다. 그래서 이를 대폭 간소화한 것이다. 거의 그림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추상화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구약 성경을 기록한 셈족의 히브리(Hebrew) 문자이다. 이것도 이집트 문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음이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여호와」라는 이름은 호렙산 떨기나무 곁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그 뜻은【스스로 있는자】이다.
성경에「여호와」혹은「야훼」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본디 발음은 아니다. 히브리어 자음 4개로 기록되어 있고,「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히 일컫지 말라」하신 계명을 따라 히브리인들은 이「거룩한 네 글자」가 나오면「주님」이란 뜻인「아도나이」'Adonai' 라고 읽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자음만 가지고 읽기가 어려워 후대를 위하여 모음기호를 만들어 붙였는데,「거룩한 네 글자」에는 「아도나이」라고 읽으라고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였고, 본디자음과 아도나이의 모음을 합쳐 읽은 발음을 처음에는「여호와」읽었으나, 구약성경의 인명들을 살펴본 결과「메시야(야훼의 기름 부름 받은 자), 엘리야(야훼는 하나님이시다), 예레미야(야훼는 떨어뜨리신다), 히스기야(야훼가 힘을 주셨다), 요시야(야훼가 지지해주신다)」등의 이름이「여호와는 ~ 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고「야훼」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정확한 발음은 아무도 모른다.
고대 글자에서 모음을 발명하고 또 글자 모양도 더욱 간단하고 아름답게 만든 인종이 바로 저 유명한 그리스(헬라)인이다. 알파(A) 베타(B) 감마(Γ) 델타(Δ)로 이어지는 그리스 문자는, 소리 나는 대로 기록할 수 있어, 보통 사람도 누구나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자음에 이은 모음의 발명이었다.
그리스인은 이 모음을 발명한 게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알파벳의 제일 첫 자와 끝 자를 모음으로 장식했다. 그게 바로 알파(A)와 오메가(Ω)이다. 각각 [ㅏ], [ㅗ] 발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오늘날 영어의 알파벳(Alphabet)이란 말도 그리스어의 첫 두 글자, 곧 모음 하나와 자음 하나로 만든 낱말이다.
1. 페니키아나 히브리 문자 같은 자음만으로 된 것,
2. 일본의 가나와 같은 자음과 모음을 함께 발음하는 음절문자(音節文字),
3. 로마자나 한글 같이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어 있는 알파벳문자, 곧 음소문자(音素文字)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음소문자가 가장 발달한 것임을 두말할 필요 없다. 만약 일본 가나 같은 음절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우리나라 같이 음이 다양한 말은 최소한 3천 자가 필요하다. 이렇게 사람의 소리를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하여 적는 데, 인류는 무려 3천년이 걸렸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창제의 엄청난 사업을 즉위 후 바로 시작했다고 해도, 불과 25년 만에, 그리스 문자를 압도하는 완벽한 문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대로 세종대왕 혼자만든 것이 아니라 집현전 학사 모두가 오로지 이 일에만 매달렸다고 하더라도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 최고의 지혜를 받으신 세종대왕은 이를 단독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가 있다. 아래서 보는 대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이런 글귀가 있다.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臣)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없는 바이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세종실록>
1940년 안동의 희방사(喜方寺)에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은 발음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다. 이것은 세계 언어학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서양에서 음성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겨우 [d, t], [b, p], [s, z], [v, f], [g, k] 등을 짝지어 유성음 무성음을 구별해 놓고 득의만면하고 있었는데, 15세기 초에 벌써 이런 것을 완벽하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g, k]를 혀가 입천장에 닿는 모양을 본떠서 아예 글자 모양과 비슷하게 [ㄱ, ㅋ] 더 나아가 된소리까지 표현하여 [ㄱ, ㅋ, ㄲ]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ㅋ, ㅌ, ㅍ, ㅎ]에서 보듯이 기본자 [ㄱ, ㄷ, ㅁ, ㅇ]에서 격음일 경우에 힘이 더 드는 걸 감안하여 줄을 한 두 개 더 그었던 것이다.
이 원리를 응용하여 한글을 가르치면, 정인지가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글은 정말 배우기 쉽다. 그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한글 반절표(反切表) 이 사실은 외국인에게서도 증명이 되었다. 외국인에게 원리를 가르쳐주었더니 50분만에 한글을 읽더라는 것이다. 필자도 1945년 해방 직후, 한글을 모르는 우리 선생님들에게 그림과 같은의 반절표1)를 칠판에 그려 놓고 가르친 결과 하루 한 시간씩 사흘만에 우리 선생님들이 한글을 깨우쳤던 것이다.
1) 반절(半切)이란 말은 훈민정음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우리 모음은 더욱 경이롭다. 천(天=[•])-지(地=[ㅡ])-인(人=[ㅣ])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다.
하늘은 둥그니까 간단히 [•], 땅은 평평하니까 [ㅡ], 사람은 서 있으니까, [ㅣ].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할 수가 없다. 실지로 발음을 해 보면 전 세계의 모든 발음이 아[•]할 때는 입이 둥글게 크게 벌어진다. 으[ㅡ]는 입이 옆으로 벌어지면서 혀가 평평해진다. 이[ㅣ]는 혀가 앞으로 내밀어지면서 세워진다.
여기서 각각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등이 나오는데, 물론 처음에는 [ㅣ, ㅡ]에 앞 뒤 또는 위 아래에 아래 아(•)자를 덧보탠 것이었다. 이것도 경이로운 것이, 세계 모든 발음이 [ㅏ] 발음을 할 때는 반드시 숨을 내쉬게 되어 있고, [ㅓ]할 때는 숨을 들이쉬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 밖과 안에 점을 찍은 것이다. [ㅗ, 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ㅗ]는 반드시 아래로 내리쉬고, [ㅜ]는 아래에서 위로 치받치게 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한글은 누가 보아도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 있다. 모음은 반드시 가운데, 또는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자는 풀어쓰기 때문에 척 보고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가 없다. 한글은 소리 나는 단위가 음절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대로 활용하여 매 글자에 자모를 붙여 놓아 소리 단위를 금방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로마자는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음절 구분을 못한다. 한글은 바보라도 할 수 있다. 음소 문자이면서 음절 문자의 장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서울 연동교회의 창설자 게일 목사는 한글사랑이 남달랐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은 세종대왕이며, 그가 남긴 업적 중 최고는 한글 창제라고 이런 글을 남겼다.
“(세종대왕은) 내가 아는 한, 전 세계 왕들 중 최고의 왕이다. 그가 한 일 중 가장 큰 업적은 한글을 만든 일이다.”2)
2) "One of the best kings of the world has ever seen. Among his many achievements, none is greater than his invention of the Korean alphabet." from Harry A. Rhodes, A.M.,D.D. History of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ume I, 1884-1914, p. 91.
한글은 컴퓨터가 나오면서 더욱 위력을 떨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직 [한글]에서 뒤지는 이유는 바로 한글의 24자가 하나의 디지털로서 무한한 조합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완성형을 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찬진의 한글은 조합형을 택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가 완성형을 표준으로 삼은 일은 정말 바보짓이다. 디지털이란 것도 기껏해야 [0]과 [1]이라는 두 문자를 이용한 이진법을 무한히 연결하는 것이요, 한글 또한 그 자체가 무한히 응용할 수 있는 24개의 디지털 기호 아닌가.
지금 휴대폰에 있는 몇 개의 음소만으로 젊은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를 않는가. 한글이 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확실히 구별하면서도 음절 단위로 쓰게 됨으로써 정보화 시대에 또 하나의 경이적인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공병우식 자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바로 과학적인 한글의 장점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공병우 자판은, 현재 널리 보급된 자판과는 달리 왼손은 초성을 치고 오른손은 중성과 종성을 동시에 치는 원리이다. 한 글자를 한 번에 치는 방식이다. 그러면 아무리 손가락이 굳은 사람도 1분에 쉽게 3백 타 이상을 친다. 무려 1분에 1300타, 1400타까지 가능하다.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쓸 수 있다.
속기사는 대개가 공병우식을 쓰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정보화 시대에 이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은 위정자 때문에 공병우 박사가 그렇게 평생을 애썼는데도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세종대왕은 치세 중에 한 일이 너무나도 많지만, 두 가지만 스스로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훈민정음 창제」와 「작곡」이다. 나머지는 누가 했는지, 그 본인의 이름이 거의 다 밝혀져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왕의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공으로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것도 대부분「어제(御製)」란 말을 썼다. 당시 세종 실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ㄱ은 아음(牙音)이니 군(君)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규(?)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고, ㅌ은 설음(舌音)이니 탄(呑)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ㄴ은 설음(舌音)이니 나(那)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ㅋ은 아음(牙音)이니 쾌(快)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ㆁ은 아음(牙音)이니 업(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ㄷ은 설음(舌音)이니 두(斗)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담(覃)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ㅂ은 순음(脣音)이니 별(?)자의 첫 발성과 같는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보(步)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ㅍ은 순음(脣音)이니 표(漂)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ㅁ은 순음(脣音)이니 미(彌)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ㅈ은 치음(齒音)이니 즉(卽)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자(慈)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ㅊ은 치음(齒音)이니 침(侵)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ㅅ은 치음(齒音)이니 술(戌)자의 첫 발성과 같는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사(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ㆆ은 후음(喉音)이니 읍(?)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ㅎ은 후음(喉音)이니 허(虛)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홍(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ㅇ은 후음(喉音)이니 욕(欲)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ㄹ은 반설음(半舌音)이니 려(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ㅿ는 반치음(半齒音)이니 양(穰)자의 첫 발성과 같고, •은 탄(呑)자의 중성(中聲)과 같고, ㅡ는 즉(卽)자의 중성과 같고, ㅣ는 침(侵)자의 중성과 같고, ㅗ는 홍(洪)자의 중성과 같고, ㅏ는 담(覃)자의 중성과 같고, ㅜ는 군(君)자의 중성과 같고, ㅓ는 업(業)자의 중성과 같고, ㅛ는 욕(欲)자의 중성과 같고, ㅑ는 양(穰)자의 중성과 같고, ㅠ는 술(戌)자의 중성과 같고, ㅕ는 별(?)자의 중성과 같으며, 종성(終聲)은 다시 초성(初聲)으로 사용하며, ㅇ을 순음(脣音) 밑에 연달아 쓰면 순경음(脣輕音)이 되고, 초성(初聲)을 함해 사용하려면 가로 나란히 붙여 쓰고, 종성(終聲)도 같다. ㅡ·ㅗ·ㅜ·ㅛ·ㅠ는 초성의 밑에 붙여 쓰고, ㅣ·ㅓ·ㅏ·ㅑ·ㅕ는 오른쪽에 붙여 쓴다.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하여 음을 이루게 되니, 왼쪽에 1점을 가하면 거성(去聲)이 되고, 2점을 가하면 상성(上聲)이 되고, 점이 없으면 평성(平聲)이 되고, 입성(入聲)은 점을 가하는 것은 같은데 촉급(促急)하게 된다.” [세종실록 113권 28년 9월 29 일자].
당시 학자들은 오로지 유학이었다. 집현전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이런 따위의 음성학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연구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설령 연구에 일부 참여했다고 해도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문 숭배가 종교의 수준까지 이르렀던 때이다.
한글 반포문과 함께 정인지의 다음 서문이 뒤따른다.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臣)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없는 바이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세종실록 113권 28년 9월 29 일자].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실 때, 요동(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신숙주(당시 25세), 성삼문(당시 26세)을 13번이나 보내어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하여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는데, 그 말은 잘못된 것이다.
이 일은 한글 창제 이후의 일로서, 한자발음사전인《동국정운(東國正韻)》3)을 정확히 만들기 위해 중국 음운에 대해 물어봤던 것이다.
3) 동국정운(東國正韻) : 조선 세종 때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 〈홍무정운 洪武正韻〉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 9명이 편찬에 참여했다. 당시 세종의 언어정책의 하나로 간행되었으며, 혼란상태에 있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중국 명(明)의 운서 〈광운 廣韻〉,〈집운 集韻〉,〈홍무정운 洪武正韻〉 등을 참고했다.
따라서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작으로서, 정인지의 서문에 나오는 대로 자형(字型)을 만들 때 정인지의 서문대로 옛문헌(古篆)을 참고하였을 뿐이다.
한자음을 통일한 것은 한석봉의 천자문(千字文)4)이 나온 이후이다.
4) 한석봉서천자문(韓石峯書千字文) : 조선시대의 명필가인 석봉 한호(韓濩 : 1543~1605)가 쓴 천자문. 1책. 목판본. 1578년(선조 11)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1601년에 간행되었다. 원명은 〈석봉천자문〉이며, 서문은 오시복(吳始復)이 썼다. 초간본은 없고 현존본은 인조대에 간행한 중간본이 최고본으로, 개인소장본과 일본 나이가꾸문고[內閣文庫] 소장본이 있다. 천자문 중 가장 널리 보급된 것으로 각 지역에서 여러 차례 중간되었고 일본에도 전래되었다. 천자문을 해서로 쓰고 한글로 훈과 음을 단 것이다. 16세기본의 한글 음훈은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 국어학 연구의 자료가 되며, 이후의 중간본들은 음훈의 시대적·지역적 변천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이외에도 1597년에 초서로 쓰고 상단에 전서(篆書)를 첨부한 초서천자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