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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청정고을 진안으로의 여행>
◆영모정--전북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산 676번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네티즌선정`상을 받은 그림 같은 영모정은 고종6년에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앞면 4칸·옆면 4칸 규모로,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나무를 기와 모양으로 만든 너와로 지붕을 이은 것이 특이하다. 정자 아랫부분 네 기둥에는 거북머리 모양의 둥근 받침돌을 사용하고 있다. 누정 남쪽 내부의 중앙에는 영모정이 아니라 <영벽루>라고 쓰인 현판과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이 지은 상량문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병든 부친을 모시고 있던 효자가 부친을 죽이려는 왜군 앞을 몸으로 막아 대신 죽기를 빌었다. 이에 감동한 왜장이 동구 밖에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방을 붙였고, 왜적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와 살아남은 이가 5만 명이나 됐다고 전해 온다. 영모정은 이 일을 알게 된 조정이 정려를 내려서 지어진 것인데, 주변 자연과 어울리면서도 숨어있어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듯 오직 물가에 들어선 그 정자 하나 보고자 찾아들어도 좋을 만큼 정취가 빼어난 곳이다.
▶ 영모정 계곡 따라 흐르는 하천 숲길
마을의 모양이 마치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가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원노촌(元蘆村) 마을은 숲이 계곡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다. 이 숲은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식생이 어우러져 있고 계곡의 제방림 혹은 풍치림 역할을 하며 여름날이면 마을 주민들과 지역민들이 자주 찾는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 왜장을 감동케한 효자 신의련(愼義連)의 효자각
신의련의 호는 미계(美溪), 본관이 거창(居昌)인 공은 1581년(선조 14년) 백운 노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한 겨울에 꿩과 잉어를 구하여 간호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난중에도 부친의 간호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인근 주민들은 물론 머릴 경향각지에서 난을 피하여 공이 살고 있는 동편 깊숙한 산골로 모여들었으니 오늘의 비사동 골짜기였다. 노략질에 혈안이 된 왜군은 이곳까지 침입해 와서 마침내 공의 집에 몰려들었다.
이 때 공은 방문 앞을 가로 막으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병석에 누워계신 우리 부친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공의 효도에 감동한 왜장은 해를 끼치지 않고 다만 공의효성을 실제로 보기위하여 손가락을 깨물어「효자신의련」다섯 자를 써 보라고 했다. 공이 다섯자의 혈서를 써서 왜장에게 주니 뜰에 불을 피워 살랐으나「효자신의련」다섯 자는 불타지 않고 종이만 타버리고 글자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지 않는가? 이를 본 왜장은 하늘이 내신 효자라고 감탄하면서 귀중품을 주고 표방을 써 붙였다 한다.<이 곳은 하늘이 아는 효자가 살고 있으니 침범하지 말라>동구 밖에다 이렇게 써 붙이고 왜군이 물러가니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1만여 명이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 하여 그 후부터 이 골짜기를「만인동」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에도 왜적이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공의 덕이라 했으며 미계촌 앞에 높이 솟아있는 산을 덕태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계촌은 지금의 백운면 노촌이라고 한다. 나라가 평온해지고 공이 죽은 후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고을 원님이 임금님께 고하니 선조임금은 종팔품에 해당하는 수의부위(修義副尉)란 벼슬을 증직으로 내리셨으며 효자각을 세우게 하였다.
1869년(고종6년)에 효자각 바로 밑에 정자를 건립하고 영모정이라 이름 지어 공의 후손 신씨 문중에서 보호하고 있다. 영모정에는 참새가 많은데 참새도 효심을 아는지 영모정에는 똥을 싸는 일이 있지만 효자각에는 똥을 싸지 않은 것을 보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더욱 경탄하고 있다
▶ 만육 최양선생 유허비
이 비는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부상서 대제학에 이른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과 인근의 주민들에 의해서 고종 8년(1871) 에 건립되었다.
최양(1351~1424)은 두문동 72현(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에 나가길 거부하고 평생을 두문동에 은거하며 학문을 했던 72명의 고려 충신)중 한명으로, 외삼촌인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우왕 2년(1376)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음.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진안 팔공산에 들어가 3년을 은거 하였으며, 태조가 그를 친구로 대우하여 재상자리에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74세의 나이로 죽자 세종은 ‘학문과 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와 청직은 엄광과 같다’라고 하였다.
노사 기정진(盧沙奇正鎭)이 글을 지었으며 구남각(龜南閣) 내에 세워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5m 폭 60m이며, 비의 전면에는 "晩六崔瀁先生遯跡遺墟碑" 라 새겨져있다
◆ 죽도---전북 진안군 진안읍 동향면 성산리 장전마을
누구나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를 원하고 그 휴식이 아름다운 기억이 되고 추억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럴 때마다 후젓이 떠났다 돌아오기 좋은 곳이 진안의 죽도이다.
죽도는 진안에서 무주를 향해 약 8km를 달리면 상전면 수동리 내송 마을의 죽도에 이른다. 깎아 세운 듯한 바위산 절벽을 맑디맑은 물이 한 바퀴 휘돌아 흐르고 있기에 마치 섬과 같은 곳이다. 남쪽의 장수에서 흘러오는 연평 천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되는 구량천이 파자 형으로 굽이굽이 굽이쳐 합류하면서 이룬 경관이다. 산죽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 죽도라 한다. 하지만 죽도를 빼어난 경관의 장소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이름처럼 섬이 되는 또 하나의 전설이 현실로 맞춰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쉽게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죽도, 금강의 물굽이와 병풍 같은 바위산이 비경을 빚어내는 진안의 죽도는 천반산과 그 산자락 아래 구량 천과 연평천이 합수해 오메가(Ω)형 물굽이로 흘러가는 내륙의 섬이다.
죽도는 ‘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다’는 왕권체제하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던 언사를 서슴지 않았던 반체제 인물. 금시 폭발할 폭약처럼 위험한 사상으로 장전돼 ‘대동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정여립을 단순히 역적으로 치부하기에 앞서 학계와 일부 향토 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점차 그 진실을 위한 재조명이 진행되고 있다. `동서만록`의 기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했던 것이 아니었다. 평소 죽도를 자주 찾아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렸던 그가 왜 피신처로 죽도를 택했을까 하는 것이 의문점이다. 정여립은 도망칠 이유도 없었으며 평소처럼 죽도에 놀러 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역모를 인정했던 것처럼 꾸며 결국은 자살을 한 것으로 위장되었던 조작극이었다는 `동서만록`의 기록`에 남아있다. 죽도와 정여립에 관한 또 하나의 전설은 천반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돌솥 이야기이다. 정여립이 많은 부하들과 이용했으며 그 크기가 어찌나 크던지 솥전 난간으로 젊은 장정들이 뛰어다녔다는 전설이다. 하지만 전설로만 치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언제고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천반산의 정여립 성터를 찾아야 한다. 우리들의 무관심으로 행여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를 돌솥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곳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나 그것을 가지고 이 천혜의 피서지를 숙연하게만 지나칠 수는 없다. 하늘과 물과 모래와 바위산과 나무가 조화의 극치를 이루는 절경이 보는 이 마다 넋을 잃게 만드는 천혜의 관광지에 정여립이 칩거했다는 찬바람 나오는 송판서굴, 전설의 형제바위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연기념물이었던 쏘가리가 넉넉히 잡힌 곳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섬이 된 죽도를 찾으며 예전 섬이 아닌 죽도를 더 그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섬이 아니었던 죽도에서 정치적 타살을 맞이하는 비운의 주인공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주며 우리가 처한 걱정과 슬픔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가막유원지
진안 가막리 유원지에서 진안 죽도까지 강 길을 따라 걷는 3킬로 정도 구간이 바로 가막 유원지이다. 산과 물과 하늘이 어우러진 고요한 울림과 거친 재미가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봐도 흐뭇하고 마음이 따스해지는 곳이다.
** 가막은 우리 고유의 '감'에서 온 말로 '감'이란 말은 크다, 넓다, 높다의 뜻을 가지니 앞 높은 암벽산 아래로 강물이 이리저리 휘돌아 나가는 모습에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죽도는 산죽나무가 곳곳에 널려 있어 죽도라 불렸으며 '도'자에 섬도(島)자를 쓰는 것은 구량 천과 장수천이 합류하면서 강물에 떠 있는 섬 아닌 섬이 돼 버려서 그렇다.
◆ 이산묘...주소: 마령면 동촌리 78 외2필지
태조의 꿈에 한 신인에게 장차 삼한 강토를 재라는 금척을 받은 후,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들은 이산의 경치가 꿈에 금척을 받았던 자리와 흡사해 신기하게 여겨 속금산(束金山)이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 연재송병선이 고을의 선비들과 용암에 이름을 새겼고, 면암최익현이 쌍계수석이라는 표제를 남겼었다. 또 호남지방의 최초 '의병창의동맹지'로 성화를 치켜드는 진원이 된다. 연재와 면암선생을 흠앙하는 선비들은 1924년 이곳을 경건히 모시고 존현의 의의를 살린다는 뜻으로 석벽에 주피대라는 글자를 새겼고, 동년12월18일 경향의 유림회의 때 오채열의 발의로 마이산에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자는 유림의 뜻이 있었고, 모성공회에서 전국의 향교, 서원에 통고하여 1925년 주필대의 서쪽에 회덕전을 지어 이산정사와 이태조의 제향을 지내게 되었다. 1946년 9월 이산묘의 완공 된 회덕전에는 단군성조와 세종대왕을 추가로 모시고, 그 아래 동서의 두 사우를 지어 동쪽은 영모사라하여 조선개국 이래의 명유40위를 모시고 서쪽은 영광사라하여 고종 을사년 이후 연재, 면암과 순국선열34위를 모셔 제사를 올리는 처소로 삼고, 일제의 훼철로 전주 건지산에 임시 봉안되어있던 고종의 위판을 1948년에 옮겨 모두 4위가 되었다. 이산묘에는 1949년 이시영부통령의 친필현판이 외삼문에 걸려있고 독립기념비각에는 이승만대통령의 휘호로 된 '대한광복기념비'가 새겨있고 백범김구의 '청구일월대한건곤(靑丘日月大韓乾坤)'이라는 글귀가 은선동 바위에 새겨져 있다. 현재 이산묘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2일 향사를 지낸다.
◆ 여류문장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
조선조 영조때 뛰어난 시풍과 탁월한 문장으로 근세 한국 여류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삼의당 김씨는 1776년 (영조 44년) 남원의 서봉방에서 태어났다. 1786년(정조 10년) 같은 나이에 생일까지 똑같은 한동네 사람 하립과 결혼하여 그들의 나이 서른 세살되던 1801년 (순조 1년) 마령 방화리로 이사와 여생을 마쳤다. 삼의당은 나이 일곱살이 되면서부터 글방을 기웃거리며 귀동냥으로 글을 익혔으며 철이 들면서 명심보감을 비롯하여 소학을 통달했고 그것을 응용하여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한다. 남녀 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적 유교인습에 얽매어 있어 감히 글공부를 할 수 없었던 여자의 몸으로 이처럼 어려서부터 글과 더불어 자라난 삼의당은 용모 또한 빼어나서 그를 사모하는 총각들의 애를 태우게하기도 했다. 삼의당의 남편 하 립 또한 김부인에 못지않은 문장가이자 사내 대장부였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정이 들고 문장을 잘 하는 점이 이심전심으로 그들을 결합하게 햇따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로 만나다 보니 달나라의 선녀이구려
전생의 인연으로 분명 이 밤 가져온 걸
속세의 중매란 분분할 뿐 우린 천정의 배필이여 >
--결혼 첫날밤에 남편 립이 이러한 시를 아내에게 주었고 삼의당은 다음과 같이 화답시를 지었다.
< 신랑과 선녀한날 한시 한마을에 나서
다시 화촉의 인연을 맞았거늘 어찌 다
이 밤의 기쁨이 한낱 우연이리오 >
--삼의당은 시와 문장에 뛰어난 여류이면서도 한 아내로서도 손색이 없는 후덕한 아내의 도리를 다한 여인이었다.
가난한 남편의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과 또 남편으로 하여금 보다 훌륭히 부모네들을 봉양케 하기 위해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도록 돕는 피나는 노력은 가녀린 한 여심의 비상한 정성과 효심이 스민 것이었다. 그러나 비범한 문재를 지닌 립은 어쩐 일인지 향시에는 자주 뽑히면서도 회시에는 번번이 실패하기가 일수였고 그럴 때마다 아내인 삼의당은 남편을 위로하며 마이산에 들어가 과거 공부하기를 권하였고 노자를 마련하여 서울의 풍물을 관광케 하여 견문을 넓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립은 관운이 없었던 탓인지 아내의 애절한 기대에의 보람도 없이 끝내 과거에 급제할 수 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의당내외가 진안 마령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은 그들의 중년 이후로 모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삼의당 김부인 유고에 의하면 「그들 내외는 선영을 수호하기 위해 중년에 이르러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들은 선영을 위할 줄 아는 가도에 따름도 있겠지만 산수 좋고 인심 좋은 진안땅을 밟는데 대한 묘미와 풍류가 있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이야기다. 더욱 마령에서 진안을 꿰뚫는 도상에 하늘을 뚫듯 쭝긋 선 말의 귀를 연상하는 마이산의 위용과 칼날을 세워놓은 듯한 숫산, 그리고 거기에 비해 어딘지 단아한 교태를 먹음은 듯한 암산의 영봉은 이들 부부시객들의 더없는 시류를 자아내게 하였을 것도 물론이다. 이렇듯 삼의 부부는 시를 읊고 시와 더불어 일생을 해로한 부부였다. 그들에게 시와 글이 있음으로써 모든 인생의 열락을 거기에서 찾았으며 어떠한 고난과 난관이 앞을 가렸다해도 그것은 또 그들의 숭고한 예술로 해서 항상 깊은 이해와 아름다운 사랑으로 충만 되곤 했던 것이다. 마령면 방화 마을에는 삼의당 부부가 글을 벗 삼아 기거하던 초옥이 기울어진 서까래에 겨우 의지하고 쓸쓸히 서 있으며 그들의 후손인 하씨 일가가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의 문집으로는 삼의당고가 전하여 오며 이 유고는 1930년 「오상철 교열(校閱) 정희택 편집 정일섭 발행」의 석판 본으로 출간되었다. 1747년(영조 23년)안서(岸曙) 발행의「이조규수한시선집(李朝閨秀漢詩選集) 금잔디」에 삼의당의 시가 32편 수록되어 있다.
「내 또한 호남의 한 우부(愚婦)라 깊은 안방에서만 자라나 비록 경사를 널리 궁구(窮究)하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언문으로 소학을 해독하고 미루어 문자를 통하여 제가(諸家)의 시서를 대략 보았는데 그렇다고 하여 어찌 짧은 글과 무딘 솜씨를 들어 세상 사람들의 나무람을 받으리오. 다만 호정 (戶庭) 안에서 본대로 들은 대로 또 지내는 대로를 혹은 말로 혹은 시로 남겨 느낀 정대로 맡겨 써 놓는 것은 내 스스로 뒷날에 좋은 거울과 법도를 삼고 져 함에 있다 할지라」
--삼의당김씨가 남긴 유고150여편중 첫머리에 나오는 자서(自序)의 글이 다음 몇 편의 시문을 소개한다.
높은 뜻 / 아니시면 / 어이타 / 남기시리
오늘의 / 이별 잔은 / 물에 잠긴 / 저 달이나
오실 땐 / 낙양구름을 / 부디 몰고 / 오소서
천릿길 / 달리시고 / 구만리를 / 나시려든
하물며 / 하찮은 몸 / 임 가슴에 / 두시오리
낭군님 / 그 크신 뜻을 / 한사코 / 이루소서
하찮은 / 이 몸 두고 / 못 잊어 / 하시릿가
입은 옷 / 던진 일은 / 나라위한 / 큰일이나
책지고 / 떠나신 뜻은 / 더욱 크신 / 일이라오
삼춘의 / 따스한 날 / 즐거이 / 떠나시니
늙으신 / 어버이도 / 장히 여겨 / 기쁘시다
기필코 / 금의환향을 / 두 손 모아 / 비 옵니다
--사실 세속적인 안일을 포기하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려운 살림을 혼자 꾸려가면서도 항상 낭군의 입신양명만을 손꼽아 비는 생활로 좋은 청춘을 다 보낸 삼의당 김씨이기에 자연 그의 문학적 주제는「은근한 기다림이나 설움」이 아닐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추규사(秋閨詞)>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올로 / 사창(紗窓)가를 / 함없이 / 거니노니
어느듯 / 밤도 이제 / 깊을 대로 / 깊구나
헝클진 / 머리만지며 / 등신(燈心)만 / 적셔보오
저 멀리 / 떠나신 채 / 기별 없는 / 무정한 님
그리운 / 심사(心思)만은 / 어이할 수 / 없구나
열두 줄 / 골라잡고서 / 그리운 정 / 띄어보오
수탄(獸炭)을 / 피워보니 / 저다지 / 잘 타오
한줄기 / 저 연기가 / 차거움을 / 더하노나
내 홀로 / 지새는 이 밤 / 한해처럼 / 길고녀
오동잎에 / 떨어지는 / 처량한 / 저 빗소리
시름 젖은 / 이 내 맘을 / 더욱더 / 섧게 하오
살며시 / 병풍 두르고 / 잠을 청해 / 본다오
가을밤 / 깊고 깊어 / 오경에 / 가까운데
잠 잃은 / 이내몸이 / 창밖을 / 보옵나니
빈 뜰악 / 온 가지마다 / 밝은 달만 / 가득하오
빈 이불 / 부여안고 / 님 찾아 / 헤매노니
님께서 / 바란 대로 / 웃고 들어 / 오시이다
좋아라 / 깜짝 반기니 / 허망코나 / 내의 꿈
깊은 밤 / 밝은 달만 / 저녁 재에 / 가득하고
님 그리는 / 이맘을 / 하소할 길 / 없는데
그 뉘 / 옥피리 불며 / 성을 너머 / 가는가?
가엾다 / 외로이 / 홀로 새는 / 이 한밤
그리움이 / 사모쳐 / 이리 뒤척 / 저리 뒤척
님 뵈올 / 단꿈마져도 / 이룰 수 없고녀
공작그린 / 병풍도 / 비취 놓은 / 이불도
님 없는 / 빈방엔 / 하릴없는 / 물건이라
차가운 / 가을달빛에 / 마음 더욱 / 섧으오
덩그러이 / 솟아 밝은 / 청천의 / 저달보고
님 그리는 / 내 정대로 / 님도 날 / 기리시니
두어라 / 우리 두 맘을 / 모두 비쳐 / 주옵소서
◆ 마이산
아주 옛날 하늘에서 죄를 짓고 이 땅에 내려와 사람으로 살아가는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쫓겨날 때 천신이 이른 “너희가 지은 죄를 다 치루면 하늘로 올라오라”는 말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동안 두 아들까지 얻어 더욱 열심히 일을 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 죄 값이 끝나는 밤, 남편은 당장 하늘로 올라가자고 아내를 서두르고 아내는 밤은 무서우니 내일 새벽 일찍이 올라가자고 했다. 남편은 좀 못 마땅했지만 아내 말을 듣기로 하고 어둑한 새벽녘 하늘로 올라가는데 저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마, 어마, 저게 뭐당가요?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거 맹이요” 우물가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 정화수를 길러 나온 아낙인 것 같았다. “아이쿠!” 꿈은 깨진 유리조각, 조각난 항아리가 되었다. 남편은 두 아들을 양손에 안고 아내에게 발길질을 하며 소리를 쳤다. “당신 때문에 다 글렀소. 천신이 뭐라 했소? 하늘로 오를 땐 아무도 안 보는 때에 오라고 하지 않았소?” 그리도 착하기만 하던 남편이 발길질을 하다니, 아내는 그게 속상하고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렇게 1억년을 내려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바위의 생긴 모습에 이름을 붙였다. 삐죽하게 뻗은 봉우리를 아빠봉. 둥그스름하면서 고개를 약간 돌린 듯한 봉우리를 엄마봉. 아빠봉 앞에 붙은 작은 두 봉우리를 아기봉이라 부르는데 인간세상과 같이 바위로 된 봉우리들 세상에도 시샘은 있는지 그들 두 봉우리 앞에 조금 작은 봉우리가 정말 시샘을 하듯 샐쭉한 모습으로 서서 “당신들만 봉우리요? 나도 엄연히 마이산의 한 봉우리요.” 그래서 나도봉 이라한다.
◆ 마이산 능소화
탑들이 줄줄이 서있는 탑사에서 바라보면 명예, 영예라는 꽃말을 지닌 능소화가 커다란 바위를 타고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님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여인같은 능소화를 ‘구중궁궐의 꽃’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설화 때문이다.
옛날 옛날에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능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다. 그 궁녀는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에 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궁궐의 한쪽에 처소를 마련해준 임금은 어찌된 일인지 한번도 그 여인의 처소에 찾아오지를 않았다. 그녀가 교활한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다시 오도록 만들었겠지만 그 여인은 그러지를 못했던 것이다.
많은 후궁들과 궁녀들의 시샘과 음모에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기거하게 된 그 여인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다가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늘 담장 밑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 너머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여인은 상사병 내지는 영양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권세를 누렸던 여인의 죽음이었다면 장례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여인의 죽음은 ‘담장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라고 한 유언대로 초상조차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담장 밑에 묻혔다.
그 뒤로 혼이라도 오는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멀리 보려는 듯,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는 듯 그 여인의 묻힌 담장 밑에서 싹이 돋아나서 담장을 휘어 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피운 꽃잎의 모습이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 주홍빛 나팔모양의 꽃이 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이산(馬耳山)의 탑사(塔寺)에 있는 돌탑무리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 되어 있다. 1885년(고종 25)경에 임실에 살았던 처사 이갑룡(李甲龍)이 수행을 위하여 마이산 밑으로 이주한 뒤 108기의 돌탑을 30여년에 걸쳐서 혼자 축조하였는데 지금은 약 80여기가 남아 있다. 이갑룡은 25세에 마이산에 입산하였는데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고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 탑을 쌓기 시작했다. 솔잎을 생식하며 수도하던 중에 마이산신의 계시를 받아 만불탑을 쌓았다고 한다. 탑을 쌓기 위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탑을 쌓았다고 하는데 남서쪽으로 유난이 타포나 형상으로 돌들어 떨어져 있는 곳이 현재의 탑사의 자리는 타포니로 떨어진 돌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1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 상단부분에 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 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 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을 이용하여 쌓았다고 한다.
석재를 다듬어 만든 일반탑이 아니라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탑들의 높이는 1m에서 13.5m에 이른다. 이 탑들은 천지탑, 오방탑, 월광탑, 일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으로 이름이 붙어있으며, 탑마다 각각 나름대로의 의미와 역할을 지닌다고 한다.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과 기도로 시종일관하였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1927년까지 이갑룡 처사는 유교, 불교, 도교를 중심으로 선인인 신선도를 내포하고 있었으나 불교를 표방하지 않았다. 허나 후기에 와서 마이산을 찾아 치성 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삼신상과 불상이 안치되어 사찰화 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법당에 부처를 모시고 생활관을 겸하는 인법당의 처지를 면하지 못하다가 1979년 태고종단으로 등록하고 1986년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인 대웅전을 완공하고 산신각을 완공하였고, 뒤이어 영신각과 동양최대의 법고라는 북을 소장한 종각과 관리사(요사채)를 건립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 운일암(雲日岩), 반일암(反日岩)
기암절벽에 옥수청산(玉水靑山) 천지산수사 신묘한 어우러짐으로 절경을 빚어낸 곳이 바로 운일암·반일암이다. 진안읍에서 북쪽으로 정천을 거쳐 24km를 달리면 주천면에 이르고 운장산쪽 주자천 상류를 2km쯤 더 올라가면 운일암.반일암의 장관이 시작된다. 70여년 전만해도 깎아지른 절벽에 길이 없어 오로지 하늘과 돌과 나무와 오가는 구름뿐이었다 한다. 그래서 운일암이라 했고, 또한 깊은 계곡이라 햇빛을 하루에 반나절 밖에 볼 수 없어 반일암이라 불리워졌다 한다. 또는 사람의 손길이 자연에 닿지 않던 옛날 시집가는 새색시가 수십 길 아래 새파란 물이 흐르는 깎아지른 절벽 위를 지나가자니 너무 겁이나 울며 기어갔다하여 운일암이라 전하기도 하고, 전라감영인 전주와 용담현과의 사이에 가장 가까운 통로는 이 길 뿐 이었던지라 항시 이 길을 통과해 가야 했는데 길이 어찌나 험하던지 공물을 지고 가다보면 불과 얼마 가지 못하고 해가 떨어진다하여 떨어질 운(隕)자를 서 운일암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 섬바위
지장산 계곡에 있는 이곳은 백사장이 만여평이나 펼쳐져있고, 강 한가운데 떠있는 섬바위가 한층 절경을 더해줘 그저 감추어 두기엔 아까운 곳이다. 용담댐의 물이 진안군을 벗어나 무주로 들어가는 어귀 못 미쳐 강 가운데 섬처럼 솟아있는 섬바위가 절경을 이루고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여름철 행락에 제격이다. 섬바위는 물위로 10m정도 솟아있는데 물살에 기울어져 있다. 전해오기를 이곳에는 영험한 기운이 어려 영재와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이 섬바위를 지주석이라고도 하는데 지주는 황하 가운데 있는 산을 가리키는 말로 격류 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