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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寓 言 (잡편 05, 전체 27)
寓言이 十九오 重言이 十七이오 巵言은 日出하야 和以天倪니라 寓言十九는 藉外論之니 親父 不爲其子하야 媒하나니 親父 譽之 不若非其父者也일새니라 非吾罪也라 人之罪也니라 與己로 同則應하고 不與己로 同則反하야 同於己커든 爲是之코 異於己를 爲非之하나다 重言十七은 所以已言也라 是爲耆艾니 年先矣오대 而无經緯本末의 以期年耆者는 是非先也니 人而오 无以先人이면 无人道也라 人而오 无人道면 是之謂陳人이니라 巵言日出하야 和以天倪하야 因以曼衍은 所以窮年이니 不言則齊요 齊는 與言으로 不齊며 言은 與齊로 不齊也니 故로 曰无言이라하니 言이 无言하면 終身言이라도 未嘗言이며 終身不言이라도 未嘗不言이니라 有自也而可하며 有自也而不可하며 有自也而然하며 有自也而不然하나니 惡乎然고 然於然이니라 惡乎不然고 不然於不然이니라 惡乎可오 可於可니라 惡乎不可오 不可於不可니라 物固有所然하며 物固有所可라 无物이 不然하며 无物이 不可하니 非巵言日出하야 和以天倪인댄 孰得其久리오 萬物皆種也니 以不同形으로 相禪하나니 始卒이 若環하야 莫得其倫이라 是謂天均이니 天均者는 天倪也니라
우언이 열에 아홉 가지이고 중언이 열에 일곱 가지이고 치언은 날마다 입에서 나오지만 天倪로 조화시킨다. 열에 아홉이 되는 우언은 밖에서 일어난 일을 빌려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니, 친아버지는 자기 자식을 위하여 중매를 하지 않으니, 친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그 아버지가 아닌 사람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의 결과에 따른 잘못에 있어서도) 나의 허물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허물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와 더불어 (생각이) 같으면 호응하고 자기와 더불어 같지 아니하면 반대한다. 자기와 (의견이) 같으면 옳다 여기고 자기와 다른 것은 비난하다. 重言이 열에 일곱인 것은 (여러 사람의) 말을 그치게 하는 까닭이다. 이는 연로한 사람의 말이 되니 그 말의 줄거리(經緯)와 순서(本末)도 없으면서도 다만 연로한 것만 기약하는(믿고 뻗대는) 것은 이것은 참다운 先人(연장자)이 아니다.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남보다 앞서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人道)가 없는 것이다.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가 없으면 이를 일러 묵은 사람(늙어빠진 사람)이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엉터리 같은) 치언이 매일 입에서 나오는데 (구별을 없애주는 자연의 작용인) 天倪로 조화시켜 자유자재로 모든 사리를 따르게 하는 것은 (하늘이 준) 나이를 마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세상의 이론을) 말하지 않으면 곧 가지런하게 되는 것이요 가지런함은 말하는 것으로써 곧 가지런하지 않게 되고,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가지런하게 하려면 도리어 가지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고로‘(나는) 말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을 하면서 말이 없으면 종신토록 말하더라도 일찍이 말을 하지 않았으며, 종신토록 말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일찍부터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말미암은 것이 있어 옳고 말미암은 것이 있어 옳지 않으며, 말미암은 것이 있어 그렇고 말미암은 것이 있어 그렇지 않다. 그러니 어째서 그런가? 그러므로 그렇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음으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어째서 옳은가? 옳으므로 옳고, 어째서 옳지 않는가? 옳지 않으므로 옳지 않다고 한다. 사물에는 본디 그러한 바가 있고 사물에는 본디 옳은 바가 있다. (그래서 그런 바와 옳은 바로써 보면) 세상의 어떤 사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떤 사물도 옳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앞뒤가 맞지 않는 엉터리 같지만 구속됨이 없는 자유자재의) 巵言이 날마다 입에서 나와 (자연의 작용인) 天倪로 조화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누가 오래갈 수 있으리오? 만물은 모두 갖가지 종류가 있어서 형태를 같이 하지 않는 것으로서 서로 바뀌어서 태어나니 만물의 生死(始終)가 둥근 고리와 같아서 그 순환의 차례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을 일러 天均(자연스럽게 균등함)이라 하니 天均이라는 것은 天倪(자연의 道)이다.
莊子謂惠子하야 曰 孔子 行年이 六十而六十化하야(호되) 始時所是를 卒而非之하니 未知今之 所謂是之非五十九非也호되 惠子曰 孔子는 勤志服知也니라 莊子曰 孔子는 謝之矣니 而其未之嘗言하니 孔子云 夫受才乎大本이라 復靈以生이라하나니 鳴而當律하며 言而當法하야 利義陳乎前오대 而好惡是非直服人之口而已矣어니와 使人으로 乃以心服하야 而不敢蘁에 立定天下之定하리니 已乎已乎라 吾 且不得及彼乎인저
장자가 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공자가 살아온 나이가 60살이 되도록 60번을 바꾸어서 처음 때에는 옳다고 한 것을 끝에는 그르다고 했으니 지금 옳다는 것이 59번이나 그르다고 핸 그 그름은 아니라고 알 수가 없다(확신할 수가 없다).”라고 하니까 혜자가 말하기를“공자는 자기의 心志를 부지런히 닦고 지식을 추구하는 데 힘썼습니다.”라고 했다. 장자가 말하기를“공자는 (志와 知에 대해서는) 사양했으니, 그기에 대해서 일찍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공자가 이르기를‘무릇 <인간은> 재능을 큰 근본에서 받는다. 그러기에 신령함을 회복하여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대들은) 떠들어대면 律法에 맞고, 말만 하면 법칙에 합당하여 이익과 의리를 (사람들) 앞에 늘어놓되, 좋아하고 싫어함과 옳고 그름을 단지 사람들의 입을 (막아 억지로) 복종시킬 뿐이다. (그러나 공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에 마음으로 감복시켜 감히 거스러지 못하게 하여 천하의 안정을 확립하여 결정지었으니 그만둘 지어다 그만둘 지어다 나는 또한 저 사람에게 미칠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曾子ㅣ再仕而心이 再化하야 曰 吾 及親仕하야 三釜而心樂하고 後仕에는 三千鍾이로되 不洎이라 吾心에 悲하노라 弟子ㅣ問於仲尼하야 曰 若參者는 可謂无所縣其罪乎아 曰 旣已縣矣니라 夫无所縣者는(라면) 可以有哀乎아 彼는 視三釜三千鍾호되 如觀鳥雀蚊虻相過乎前也하나니라
증자가 두 번 벼슬을 하였는데 마음이 두 번 다 달라서 말하기를“내가 어버이가 살아계심에 미쳐서 벼슬하여 겨우 三釜의 녹봉으로써도 (어버이를 봉양하니까) 마음이 즐거웠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 벼슬했을 때에는 녹봉이 三千鍾이로되 어버이가 살아계시지 않는지라 내 마음이 슬펐노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가 공자에게 물어 말하기를“참(증자)과 같은 사람은 그 죄(녹봉의 많고 적음)에 매달릴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아니다) 이미 얽매여 있다. 무릇 얽매인 바가 없다면 슬픔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완전한 자유인인) 저 사람은 三釜니 三千鍾이니 하는 (녹봉의 多少를) 보기를 새나 모기 등에 따위가 서로 눈앞을 지나가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하였다.
顔成子游ㅣ 謂東郭子綦하야 曰 自吾 聞子之言하나로 一年而野하고 二年而從하고 三年而通하고 四年而物하고 五年而來하고 六年而鬼入하고 七年而天成코 八年而不知死不知生하고 九年而大妙호이다 生有爲면 死也라 勸公以其私니 其死也 有自也요 而生陽也 无自也일새니라 而果然乎인댄 惡乎其所適이며 惡乎其所不適고 天有曆數하며 地有人據하니 吾惡乎求之오 莫知其所終이로소니 若之何其无命也리오 莫知其所始로소니 若之何其有命也리오 有以相應也로소니 若之何其无鬼邪리오 无以相應也로소니 若之何其有鬼邪리오
안성자유가 동곽자기에게 일러 말하기를“나는 그대의 말은 들은 뒤로부터 1년이 지나서는 소박하게 되었고, 2년이 지나서는 (세속의 풍습을) 따르게 되었고, 3년이 지나서는 (나와 남이 하나임을) 통달하게 되었고, 4년이 지나서는 사물처럼 지각이 없게 되었고, 5년이 지나서는 뭇 사람들이 모여왔고, 6년이 지나서는 귀신이 들어와서 깃들고, 7년이 지나서는 자연의 天이 이루어졌고, 8년이 지나서는 죽음도 알지 못하고 삶도 알지 못하게 되었고, 9년이 지나서는 크게 신묘해졌습니다. 살아서 (억지로) 작위하게 되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로운 것으로써 공평한 것를 도와야 할 것이니 그 죽음에는 말미암은 것이 있고 살아서 陽氣가 펄펄한 것을 말미암은 원인이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진데 어째서 적합한 것이 되며 어째서 부적합 것이 되는가? 하늘에는 역법의 원리가 있고 땅에는 사람의 거주지가 있으니 내가 어디에서 (그 이치를) 추구해야 하나? 그 마치는(죽는) 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하면 운명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시작하는(태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하면 운명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가 반응하는 경우도 있으니 어찌하면 어떻게 귀신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서로가 반응함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 어찌하면 귀신이 있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衆罔兩이 問於影하야 曰 若이 向也에 俯코 而今也에 仰하며 向也에 括<撮>코 而今也에 被髮하며 向也에는 坐코 而今也에는 起하며 向也에는 行코 而今也에는 止는 何也오 影이 曰 叟叟也로다 奚稍問也오 予는 有而不知其所以하노니 予는 蜩甲也며 蛇蛻也니 似之而非也니라 火與日은 吾屯也오 陰與夜는 吾代也니 彼는 吾所以有待邪아 而況乎以<无>有待者乎따녀 彼ㅣ來則我與之來하고 彼ㅣ往則我與之往하야 彼ㅣ强陽則我與之强陽하노니 强陽者를 又何以有問乎리오
여러 곁 그림자들이 그림자에게 물어 말하기를“너는 아까 전에는 꾸부리고 있더니 지금은 치켜들었고, 아까 전에는 머리를 묶고 있더니 지금은 머리를 풀어 헤쳤으며, 아까 전에는 앉아 있더니 지금은 일어섰고, 아까 전에는 걸어 다니더니 지금은 멈추었는데 무엇 때문이요?”라고 하니, 그림자가 말하기를“나는 그저 흔들흔들 움직일 뿐이다. 어찌 일일이 묻는가? 나는 (그런 점이) 있지만 그 까닭은 알지 못하니, 나는 매미 껍질이나 뱀껍질이냐? (그것들은 껍질이 있고 나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아니다. 불빛과 햇빛은 내가 모이는 곳이고, 그늘과 밤은 내가 교대한다(사라진다). 그러니 저것들(불빛과 햇빛)은 내가 기대하는(의지하는) 것들인가. (아니다) 하물며 의지함이 없는 자일까 보냐. 저것들(불빛과 햇빛)이 오면 곧 나도 더불어 오고 저것들이 가면 나도 더불어 간다. 그러니 저것들(불빛과 햇빛)이 강하게 밝으면 나도 더불어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강하게 활동하는 것을 또 어떻게 질문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陽子居ㅣ南之沛할새 老聃이 西遊於秦이어늘 邀於郊하더니 至於梁而遇老子한대 老子ㅣ中道에 仰天而歎하야 曰 始以汝로 爲可敎라하니 今不可也로다하야늘 陽子居不答하고 至舍하야 進盥漱巾櫛하며 脫屨戶外하고 膝行而前하야 曰 向者에 弟子ㅣ 欲請夫子하다가 夫子ㅣ行不閒할새 是以로 不敢이리니 今에 閒矣란대 請問其故하노이다 老子曰 而睢睢盱盱하니 而誰與居오 大白은 若辱하고 盛德은 若不足하니라 陽子居ㅣ蹴然變容하야 曰 敬聞命矣로리이다하니 其往也에는 舍者 迎將하며 其家公이 執席하며 妻ㅣ執巾櫛하며 舍者ㅣ避席하며 煬者ㅣ避竈하더니 其反也에는 舍者ㅣ與之爭席矣리라
양자거가 남쪽으로 沛땅으로 갈 때 노담이 서쪽으로 진나라에 가거늘 교외에서 맞이하려고 기다려서 梁땅에 이르러 노자를 만났다. 노자는 길가는 도중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말하기를“처음에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불가능하구나.”라고 하시거늘 양자거가 대꾸하지 않고 여관에 이르러 (양자거가 노자에게) 세숫대야와 양치물, 수건, 빗을 올리고, 신발을 문밖에 벗어놓고 무릎으로 기어가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아까는 제자가 선생님께 물어보고자 하다가 선생님께서 걸어가시느라 겨를이 없어 이 때문에 감히 여쭙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가하시니 (아까 꾸중하신) 그 까닭을 감히 여쭙겠습니다.”라고 하니, 노자가 말하기를“너는 눈을 부릅뜨고 치켜뜨고 하면서 뻐겨대니 너는 누구와 더불어 살 수 있겠는가. 크게 흰 것은 때 묻은 것처럼 보이고 성대한 덕은 부족한 것처럼 보이느니라.”라고 하였다. 양자거가 깜짝 놀라면서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경건히 명령하심을 잘 듣겠습니다.”라고 하니, (처음에 양자거가 沛로) 그가 갈 때에는 여관에 같이 묵었던 사람까지도 (그를) 맞이하고 보내며, 그 여관집 주인은 자리를 집어 들어 바치고, 아내는 수건과 빗을 들어 바치며, 불을 쬐던 자들은 (따뜻한) 부엌자리를 피했었다. 그랬는데 (노자에게 꾸지람과 가르침을 받고 沛로) 돌아옴에는 (인격 형성이 잘 되어서) 여관에 같이 묵었던 사람들도 그와 자리다툼을 벌릴 만큼 매우 친해졌다.
[본 편의 뜻을 총체적으로 해설해보면]
1)전통문화연구회에서는
【해설】
이 편의 제목 역시 맨 앞의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제1장에서는 장자가 새롭게 창안한 세 가지 이야기 전달 방식인 寓言, 重言, 巵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寓言은 다른 사물에 기탁해서 하고 싶은 말을 서술하는 방식이고, 重言은 세상 사람들이 중시하는 인물의 말을 빌려 무게를 더한 말이고, 巵言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같은 말이다.
제2장에 나오는‘孔子 行年 六十而六十化’이하의 문장은〈則陽〉편에 이미 나왔다. 다만〈則陽〉편에는 주어가 蘧伯玉이었는데 여기서는 공자로 바꾸어 놓았다. 복영광사에 따르면 이 같은 주어의 불안정성이야말로 바로 이 문장이 중언 또는 우언임을 나타내는 징표라고 했는데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제3장에도 공자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공자가 장자의 代辯者라는 점에서 내편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과 가깝다.
제5장에는 罔兩과 그림자의 문답을 통해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逍遙遊〉편에 이미 드러난 것처럼 장자의 절대 자유는 어떤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인데, 여기서는 장자적 해탈자, 곧 至人의 자유로운 인생태도를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제6장의 경우는 陽子居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같은 이야기가 《列子》〈黃帝〉편에도 나온다. 그런데 《列子》에는 陽子居가 楊朱로 되어 있기 때문에 陽子居가 곧 楊朱라고 추정하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陽과 楊은 서로 통용하는 글자이고 子居는 바로 楊朱의 字라고 하는데(張湛, 成玄英) 근거가 분명하지는 않다.
2)고려원에서는
生時的的不隨生 날 때에는 生을 따라 나지 않았고
死去堂堂不隨死 죽을 때도 죽음 따라 죽지 않았네.
生死去來無干涉 나고 죽고, 가고 옴이 간섭 없거니
正體堂堂在目前 正體는 당당하게 눈앞에 있네.
■ 寓言에 대하여
――이 편은 장자 저서의 自序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전체의 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 편은 寓言·重言·巵言을 논하고 巵言으로써 강령을 삼았다. 즉 삼십 삼 편의 立言의 요지를 말한 것이다.
도는 하늘에 근본하는 것으로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말을 세우는 것은 도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만물은 각각 종류가 다르지마는 모두 造物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그 형상이 다른 것만을 보고, 다같이 元氣에서 나오는 줄을 모른다. 만물은 천지에 있어서 가고 오며 마치고 시작하여, 다 스스로 돌고 돈다. 이미 묘한 이치를 사람들은 다 궁극할 수가 없으니, 이것을 天均이라 한다. 均이란 균등을 뜻하는 것으로서 천리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天倪라 한다.
그런데 사람에 있어서 생사보다 큰 것은 없다. 하늘에 관해서는 曆書가 있고 땅에 관해서는 人據의 書가 있다. 이 두 책만 있으면 천지의 이치를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생사의 이치는 이것을 어디서 구해야 할까? 천명에 있다고 할까? 그러나 천하는 망망하여 끝도 모르고 그 처음도 모른다. 또 귀신이 시키는 것이라 할까? 귀신은 善에 대해서는 福으로 갚고 善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禍로써 갚기 때문에, 귀신의 짓이라 생각되지마는, 선이 반드시 복되고 선 아닌 것이 반드시 화되지 않는 것을 볼 때에는, 그것을 또한 귀신에게서 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조화의 幻으로서 또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사람에 있어서 罔兩이 그림자에 대해서와 같이, 각각 기다리는 바가 있어 스스로 主將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로써 나타내려 하여도 말로써는 밝힐 수가 없는 것이다.
造物이 사람에게 갚는 것은 그 사람의 하늘에 갚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편안할 곳에 편안해 하는 것은 다만 도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또 말이 없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쉬워 고요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하늘을 따르고 사람을 따르지 않으려 하여도 그것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와 같은 이는 窮達과 生死가 그 意中에 없기 때문에 그는 하늘을 따르는 사람이요, 사람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도를 밝히려 한다고 하지마는 그 實은 도를 쌓는 것이요, 설명을 한다고 하지마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