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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사망에 나의 사망이 맞물린다>의 줄거리 :
'하나님 사망'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망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을 잊고 그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여 무시하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은 내 안에서 사망하십니다. 이렇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망이 일어나면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나의 사망을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안에서 제로가 되자마자 나의 존재감이 하나님 안에서 제로가 됩니다.
하나님 사망에 나의 사망이 맞물린다
(히브리서 9:11~28)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하나님 사망’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망’은 물귀신처럼 반드시 ‘나의 사망’을 물고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 사망’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변명을 하자면 객관적으로는 하나님 사망이라는 표현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나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망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재감이 제로인 상태가 바로 하나님 사망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내 앞에 유명한 배우가 나타나서 말을 건다면 그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감은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존재감이라는 관점에서 내 안에서 의식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나의 주관적인 영역 안에서는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는 하나님 사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사망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무시되고 멸시되고 잊힌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 사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내 의식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잊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망이 발생하게 되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사망입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제로가 될 때, 하나님 안에서 나의 존재감도 제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이야기하는 사망이고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큰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속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속에서는 존재감이 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이라는 영역에서 볼 때 부자는 죽은 사람이었으나 거지는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 안에 들어가 속죄 사역을 했습니다. 본문은 이점을 염두에 두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 동안 못 들어가던 지성소 휘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라 불렀습니다. 이는 법궤의 내용물과 죄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죄는 죄가 일어나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법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소와 관계해서 죄가 발생합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숫염소의 피를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에 뿌리고, 법궤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렸습니다. 다만 이러한 의식만으로는 실제로 백성들에게서 죄가 사라지는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과 상응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곳은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을 제사로 드리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막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지성소가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12절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앞선 11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천국을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이었으나 예수님이 들어가신 천국은 실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24절을 보면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승천과 보좌 우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강조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언급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은 독특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아버지! 나 다시 왔습니다! 나를 보십시오!’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의 있음을 아버지께 어필하신 것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했던 일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셔야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제사장의 임무는 예수님이 일으키실 속죄 사역에 대한 모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속죄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심이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간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십시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타나심은 바로 우리의 속죄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을 보시면서 동시에 나를 보시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 나의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과정이고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시는 상태가 구원이라면 사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란 곧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전혀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시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고도 몸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영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죽었다는 것일까요?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은 죄를 지음으로 인해 그 사람의 존재감이 하나님 안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노아 홍수 때의 인간의 상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존재감을 느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때처럼 망하게 하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더 이상 인간을 인격적인 상대자로서 바라보실 때 예수님 이외는 시선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들만의 존재감을 보시고 느끼시고 관계하시며 자녀로 삼으십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노아 홍수 때 쓸어버린 사람들과 같은 상태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쓰레기 상태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시지 않고 이러한 사람들을 보신다면 당장에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사람들을 인격적인 상대자로 보시지 않습니다. 단순히 피조물로만 보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인격적인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존재감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몸이 살아있고 영은 죽지 않았으나 하나님 마음에서 존재감이 없어서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마음속에서 존재감이 사라졌지만, 영이 있기에 영원히 살아갈 자들을 마지막에 모아두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나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삼 년을 사귄 애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애인의 마음속에서 이 사람의 존재감이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이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여전히 애인을 좋아하고 있다면 비참한 심정이 들 것입니다. 애인과의 관계에서 사망이 선고된 셈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회사의 부장이 상무 승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장과 관련된 사건이 터지면서 사장님 눈 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는 승진 0순위로 거론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언급도 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잘린 것은 아니지만 사장님의 마음에서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비참한 기분이 듭니다. 회사라는 영역에서 사망이 선고된 셈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사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하나님의 마음에서 존재감이 제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 전체가 모여서 영원히 살아갈 곳이 다름 아닌 지옥입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나의 존재감이 없으면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는 이유는 죄의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삽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멸시한 적은 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궤 안에 담겨있는 세 가지 물품과의 연관성에서 살펴보자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갖지 못함은 반드시 하나님 멸시로 이어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멸시했기에 하나님도 나를 멸시하게 됩니다.
만나 항아리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만나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회사원은 노동을 했기 때문에 월급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먹여 살리고 계심을 무시하는 것이고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하고 어떤 대가를 받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입니다. 내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나 이외의 모든 돈은 하나님이 다른 의도가 있어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먹고 사는 일 이외의 남은 것들을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면서 써 본 적이 없다면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써 하나님과 선민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이 선민들의 삶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길을 놓는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내 생애에 대해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계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무시하고 스스로 주권자가 되고자 합니다. 미래를 걱정합니다. 먹고살 것을 걱정합니다. 꿈과 비전을 갖고 목표를 세웁니다. 이러한 삶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것입니다.
십계명 돌판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다른 신은 하나님 이외에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을 소망하고 바람으로써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이렇게 나를 살게 하는 하나님의 만나를 무시하고, 스스로 주권자가 되어 내 인생을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바라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제로로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경멸하여 제로로 만드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나의 존재감도 제로가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죄란 하나님을 멸시함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의식 속에 전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라질 때 사망이 임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존재감이 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애인의 마음에서 내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장님의 마음에서 내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사망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마음에서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존재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기업 사장님 마음에 저의 존재감이 없다고 해서 무섭지 않습니다. 제 마음에도 그 사장님의 존재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의 직원들이라면 다릅니다.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존재감이 첫 번째이기 때문에 사장님 마음에서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애인의 마음속에서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을 무서워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좋고 최고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은 무서운 저주이고 죽음입니다.
다시 2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피가 필요했던 이유는 하나님 마음속에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 때와 같았던 사람들의 상태를 반드시 죽여야만 했기에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와 같은 상태라면 하나님 마음속에서 존재감이 없어진 상태이기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쓰레기가 된 상태를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면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게 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길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속한 무엇인가를 담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무엇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소를 받아들일 때만 인간은 하나님께 무게감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요소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서 마음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요소란 바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입니다. 만나 항아리가 뜻하는 대로 내 몸이 보존되고 유지되는 일은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있음을 무시하는 일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로서 스스로 있음이신 하나님의 요소를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나를 하나님께서는 가볍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속성이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만 세상에 대해 생각하시고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가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나의 존재감의 무게를 무시하실 수 없습니다.
십계명 돌판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좋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은 필연적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욕구하고 소망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내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존재감의 무게를 느끼실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사망과 반대되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요소를 받아들인 나의 무게감을 느끼시는 상태이며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한편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사역과는 다르게 효과가 있는 이유는 죽은 행실에서 양심을 살려내기 때문입니다. 죽은 행실이란 내 안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님도 나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시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노아 홍수 때 멸절당한 인간쓰레기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휴가철이 다가오기에 어떤 분들은 여행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먼저 하나님의 존재감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면 남들 다 가는 휴가가 죽은 행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심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휴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긴다면 죽은 행실일 뿐입니다. 노아 홍수 때와 같은 인간쓰레기의 상태에서 말과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인간쓰레기의 상태에서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를 지속한다면 죽은 행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없는 여행이라면 가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여행이라면 내가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감을 느끼시는 사람에 대해서 이 세상의 휴가까지도 주권적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사람들은 내 주머니의 돈은 내 맘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쇼핑하는 순간에 내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심이 멸시되고 있다면 죽은 행실입니다. 여행이나 쇼핑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모든 일은 죽은 행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노아 홍수 때 멸절시키신 것과 같은 인간쓰레기의 상태를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죽이시지 않는 이유는 상대할 수 있는 인격적 관계의 대상으로 우리가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하나님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태를 보시지 않고 예수님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하나님의 존재감이 제로인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뒤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서 몸이 살아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존재감 있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평강이고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의 몸은 휴가도 가고 쇼핑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가정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살게 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기업 사장님이 나의 존재감을 제로로 여기는 상태는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나도 사장님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상대방의 존재감을 인정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내 존재감이 없다는 사실은 무서워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보며 예수님의 몸을 입기를 반복한다면 나에게서 점점 더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집니다. 동시에 하나님 안에 내 존재감이 없는 상태가 무서워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을 통해 살아난 양심입니다.
양심이란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반복하는 생활을 통해서 내 마음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감은 커집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 존재감이 없는 것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이성 동료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내가 없는 상태가 싫고 무서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 아버지 속에 내 존재감이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습니다. 양심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수록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마음에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내 존재감이 없는 것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내 존재감이 커질 수 있는 길은 내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내 안에서 크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내 안에서 크게 느낍니다. 내게 하나님의 속성이 늘어날수록 하나님도 나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크게 느껴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만나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염려가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기를 반복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마음에서 나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이 땅에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 마음속에서 내 존재감이 없어진다면 그 이유는 내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으로써의 예수님의 사역은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쓰레기 상태의 나는 하나님 마음속에서 죽어버린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이러한 인간쓰레기 상태의 나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간 나의 존재감을 하나님께서 크게 느끼시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대제사장으로써의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 존재감을 더 크게 키워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질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 존재감도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복된 여정이 이어지도록 박차를 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사역 속에 담겨있는 의도를 우리의 생활 속에 충분히 받아들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