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연경동 구간 동화천 변에 솟은 화암. 그 바로 북편에 이숙량이 학문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고,
그 서당은 얼마 후 대구 최초의 서원이 됐다고 했다. 화암 북동편에는 '서원연경' 마을이 펼쳐져 있다.
퇴계의 문하생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은 아예 팔공산 자락으로 옮겨 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었다. 농암 이현보의 다섯째 아들로 안동 예안 출신. 대구 무태동 들연경 마을에서 지묘동 서원연경 마을 가는 길목 동화천변에 우뚝 솟아 있는 '화암'(畵巖) 근처가 서당 터라고 했다. 서당은 1563년 대구 최초의 서원으로 승격됐다. 국내 최초의 서원보다 불과 20여년 뒤지는 시기. 대구 권역에 있던 5개 사액서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구부사가 후원해 건물을 새로 지어 퇴계 이황을 주향, 한강 정구 및 우복 정경세를 배향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서원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이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4살의 나이로 몸소 창의해 임진년 10월 진주대첩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고 '임진왜란기 영남의병 연구'(최효식)는 적어두고 있다. 그리고 연경서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길 때 함께 철폐됐다. '화암'(畵巖)만이 남아 세월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
하지만 그 화암도 이미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본래는 지금보다 훨씬 컸으나 동화천변에 길을 낼 때 폭파로 잘라 내 작아졌다는 것. 주변 모습도 변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옛날엔 동화천 제방이 없어서 주위가 모두 하얀 모래로 뒤덮인 '갱빈'(강변)이었고 그래서 경관이 더 좋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런 풍경은 불과 몇십년 전까지도 지속돼, 서변동의 성북초등학교로 통학하던 서원연경 아동들은 개울 바닥을 길 삼다가 비로 물이 불면 화암 뒤의 산을 넘어 다녔었다고 했다. 학교 사정이 좋잖던 시절, 서원연경 마을이 속한 지묘동 아동들이 백안동 공산초교, 서변동 성북초교, 파계사 밑 서촌초교 등 3개 학교로 나뉘어 취학하느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글 박종봉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