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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직 매일 겪는 모기 재앙, 파리 재앙>의 줄거리 :
피 재앙과 개구리 재앙에 이어 이 재앙과 파리 재앙이 줄지어 일어납니다. 여기서 이 재앙은 '각다귀'라고 불리는 모기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완악함 때문에 치러야 할 열 가지 재앙은 사실 완악함으로 인해 자처하는 멸망의 독소들입니다. 지금도 완악함이 진행 중인 인격에서는 여전히 이런 영적인 독소 성분들이 활발히 작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모기 재앙과 파리 재앙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두 가지 재앙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 실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알고 십자가 생활화로 이 독소를 물리쳐 봅니다.
아직 매일 겪는 모기 재앙, 파리 재앙
(출애굽기 8:16~32)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17.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니
18.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19.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
오늘은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에 열 가지 재앙의 의미를 다루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 가지 재앙에 담긴 깊은 의미를 보면 성탄절에 정말 합당한 본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아직 매일 겪는 모기 재앙, 파리 재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에는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모기 재앙과 파리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재앙은 3,500년 전에 일어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완악함을 벗어버리지 못함으로 인해 날마다 모기 재앙과 파리 재앙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에게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십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자면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기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독일에 머물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면 11월 말부터 연말까지 시내 중심에 트리를 설치하고, 길거리 전체에 장식을 합니다. 그야말로 한 달 내내 크리스마스가 생활 현장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에서 비롯된 기쁨이 아닙니다. 문화로 정착된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우리에게 기쁨인 이유는 죄로부터의 구원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삶에서 죄가 어떻게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모릅니다. 죄에 대해 알아야 죄가 얼마나 강하며 내가 속수무책인지도 알 수 있으며, 죄가 날마다 효력을 발휘하는 상황을 지긋지긋해 하고 싫어하고 원망하고 한탄스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음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 속에 있고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죄에 대해 모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본문에서는 죄가 완악함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죄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빗나가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러한 완악함의 대표자이지 바로만 완악했던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조차도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완악함을 그치지 않음으로써 장정 육십만 명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전부 사막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완악함이 바로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닌 우리의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는 완악함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중에 완악함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로를 통해 선민이자 약속의 명단에 있는 교회에 속한 교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첫 번째 피 재앙과 두 번째 개구리 재앙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이 재앙과 파리 재앙을 살펴볼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으로 애굽에 이가 창궐합니다. 여기서 이로 번역된 생물은 히브리어 ‘킨님’으로써, 당시 애굽의 환경에 대한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모기나 각다귀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애굽의 모기는 침이 무척 길고 강해서 쏘는 힘이 강하다고 합니다. 몸집은 작은 데 어찌나 힘이 강한지 머리카락을 헤치고 들어가서 두피에 침을 꽂을 정도이고, 콧속이나 눈이나 귀를 쏘이면 자극이 얼마나 강한지 죽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르니”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먼지가 다 모기로 변해 쉴 새 없이 사람과 짐승을 쏘았다니 끔찍한 재앙입니다. 그렇다면 완악함에서 나타난 세 번째 모기 재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본 피 재앙과 개구리 재앙을 떠올려 봅니다. 완악함이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있게 된 자로 살지 않고 있게 하는 자로 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있게 하려 하고, 원치 않는 것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악함을 보일 때 나타나는 현상은 생명의 소멸입니다. 생명(生命)이란 생을 명 받았다는 뜻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서 움직여야 할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생을 명하는 내용이 생명입니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장소에서 내가 있어야 될 이유를 하나님께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완악함으로 인해 내가 있어야 할 이유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유들이 누출되는 완악함의 상황에서는 생명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완악함 속에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를 등지고 살면 내 삶은 피바다가 될 뿐입니다. 나는 본래 하나님이 계속 내려보내시는 것을 말해야 될 이유, 행동해야 될 이유, 살아야 될 이유를 따라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완악함으로 인해 그 이유들이 다 누출되어 피바다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재앙인 피 재앙입니다. 쉽게 말해 생명이 없게 된 상태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은 살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기에 살 이유를 거짓으로 만들어 내게 됩니다. 개구리 재앙은 그 내용을 비유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그 대표적인 거짓말이 ‘돈을 벌어서 부자가 돼야 한다. 내가 하는 일들은 결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유로 삼아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살아야 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가짜 생명을 가진 상태입니다. 이처럼 가짜 생명을 가지고 살 때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더러운 영인 개구리 같은 것이 되고, 개구리가 뒤덮인 토대 위에서 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세 번째 재앙인 모기 재앙이 이어집니다.
세 번째 모기 재앙은 마음이 쏘이는 상황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등진다면 이 세상에 머물면서 거짓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음을 쏘는 자극이 됩니다. 모기 재앙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삶에는 다양한 상황과 문제와 과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 것들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들어와서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완악한 마음을 자극합니다. 마치 모기가 사람의 몸을 쏘듯이 마음을 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은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에 대해 판단하고 생각하는 동안 걱정, 근심, 불안, 고민, 초조, 원망, 불평, 불만, 시기, 질투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세상 것들이 마음을 쏠 때 나타나는 반사적 반응입니다.
한편 모기 재앙에서 피해를 본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가축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당시 가축이란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대표적 소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축에게 모기 재앙이 내렸다는 것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마치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 것과 똑같이 반응합니다. 다시 말해 가축이 쏘임을 당했다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으로 인해 마음이 쏘이는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기 재앙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완악함이 제거된 상태와 비교해 봅니다. 우리의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십자가는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대상들에 대해 마음을 가로막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과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의 대상들 사이에 십자가가 끼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면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몸이 이 땅에 남아서 오감으로 세상의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든지 마음은 쏘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동안에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는 지정의 기능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입니다. 이것이 완악함이 제거된 상태의 모습입니다.
한편 완악함 속에 있는 동안에 마음은 이 땅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이 땅에 있기에 육체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자극에 의해서 쏘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생각하고 판단을 합니다. 완악한 상태에서는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이 마음을 쏘는 모기와 같은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세상을 본다면 마치 지구의 80억 인구가 모기떼에 덮인 것처럼 봅니다. 이런 저런 사람과 상황에 의해 마음이 쏘이고, 쏘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재앙은 파리 재앙입니다. 피 재앙으로부터 시작된 재앙들은 인과적 연결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피 재앙은 생명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개구리 재앙은 생명이 없어진 상태에서 가짜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기 재앙은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이 육체의 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자극 받고 쏘이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파리 재앙이 이어집니다.
21절을 보면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파리 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로브’는 혼합물이라는 뜻입니다. 왜 파리 떼를 혼합물이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이러한 표현 탓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히 파리 떼가 아닌 여러 종류의 곤충이 섞인 무리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곤충 떼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아로브’가 뜻하는 혼합물이란 파리의 몸 속에 구더기가 들어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곤충들을 봅니다. 그중에서 파리는 반드시 따라붙는 또 다른 형태가 있습니다. 바로 구더기입니다. 구더기가 유충의 단계를 거치면서 파리가 됩니다. 썩은 시체나 음식물에 구더기가 생깁니다. 성탄절에 구더기 이야기를 하자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도 구더기가 생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모르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완악함에 빠져있기에 내 속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파리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지독하게 혐오스러운 상황을 제거하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의미가 있고,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기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 속에 존재하는 구더기를 척결하신 사건입니다. 다만 이 사실을 모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고마움으로 느낄 수도 없고,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구더기가 생기고 파리가 생기는 완악함을 지긋지긋하고 혐오스럽게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위생을 강조하는 요새도 파리와 구더기를 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구더기를 매우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파리를 볼 때 언제나 구더기를 연상하며 그것을 혼합물이라는 뜻의 ‘아로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파리와 구더기는 썩은 유기물이 있어야 합니다. 시체가 썩든 음식물이 썩든 무엇인가가 썩을 때 구더기가 생깁니다. 무엇인가 생명이 없어져서 썩는 상황이란 영적으로 더 이상 하나님이 뜻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피 재앙은 하나님이 살아야 될 이유를 내려보내시는데 받아들이지 않음을 의미했습니다. 피가 누출되어서 주변이 피바다가 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어서 개구리 재앙은 살 이유를 거짓으로 만들어 내는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모기 재앙은 마음이 이 세상에 머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파리 재앙은 마음이 시체처럼 되어 아예 하나님의 뜻이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완악함으로 인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은 나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땅에 머무는 동안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 것들은 모기처럼 마음을 쏘아 자극합니다. 자극을 받은 마음은 반사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땅에 있는 상태에서 떠올리는 일이나 상황의 답은 하나님의 뜻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떠올린 것이 아니라 육체의 오감으로 세상 것들을 접하면서 받은 자극에 반사적으로 떠올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시체이고, 이때 임하는 것이 파리 재앙입니다.
시체의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은 구더기입니다.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을 마음에서 정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시체가 썩으면서 구더기가 들끓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구더기 같은 생각이 입에서 나오는 파리가 됩니다. 구더기와 파리는 이러한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파리를 혼합물이라는 뜻의 ‘아로브’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여러 곤충들을 볼 수 있지만 파리만큼 유충 단계를 떠올리게 하는 곤충은 달리 없습니다. 구더기와 파리의 관계는 생각과 말의 관계와 닮았습니다. 내가 마음속에서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을 생각합니다. 세상 것을 보고 듣는 동안 마음은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반응하며 생각합니다. 이것은 시체에서 구더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면 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우주적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이 우주적 방향성을 등진 채 살아갑니다.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있게 하고, 싫어하는 것은 없게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완악함 속에 머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떠올리는 모든 생각은 세상의 자극을 받은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3억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자극을 받아 ‘나도 3억을 벌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이제 3억을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 할 때 구더기가 창궐합니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 파리가 쏟아져 나옵니다. 내 삶이 구더기와 파리 떼로 덮이는 재앙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하나님 뜻이 없는 시체 같은 일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말과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러한 모습을 영적인 천사들이 본다면 마치 파리 재앙이 내린 애굽 같다고 여길 것입니다.
지구의 80억 인구가 우주적 방향성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있게 하고,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은 없게 하려는 완악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있게 하신 이유를 내려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뜻을 누출하며 피바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시각각으로 정해 주시는 살아야 될 이유를 뿌리친 채 자기가 살아야 될 이유를 만듦으로써 삶 전체를 거짓말의 바탕 위에 놓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삶의 이유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너 왜 거짓말을 하느냐? 내가 지금 너를 살려두는 것은 돈을 많이 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언제 승진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말했느냐? 누가 너에게 일을 잘해서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살 이유라고 말했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거짓말의 바탕 위에서 삶을 시작했기에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 것들이 마음을 자극하는 대로 반응합니다. 보는 대로 자극 받고, 듣는 대로 자극 받습니다. 하다못해 TV에서 누가 짜장면을 먹는 모습만 봐도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것도 자극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마음은 자극을 받습니다. 마음이 항상 자극을 받아서 쉴 새 없는 상황이 됩니다.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서,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면 거기에는 안식이 있고 쉼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육체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자극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 자극은 단순한 자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극은 분명히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을 만듭니다.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은 시체입니다. 그런데 그 시체와 같은 일을 계속 생각하는 동안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완악하다면 오늘도 머릿속에 구더기를 담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심장 옆에 꽂아두듯이 의식 속에서 기억하며 살지 않는다면 완악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완악함을 벗어날 수 없다면 예외 없이 구더기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구더기 같은 생각을 따라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파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뜻이 누출된 피 재앙의 현장이고, 거짓 영이 덮은 개구리 재앙의 현장이며, 마음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모기 재앙의 현장이고, 자극을 따라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을 구더기처럼 만들어 내는 파리 재앙의 현장입니다.
한편 본문 22~23절을 보면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완악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자들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백성은 완악함에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센 땅은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라는 영역으로 들어온 자와 바깥에 있는 자는 지금 의식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가를 통해서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의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한다면 고센 땅이자 교회에 들어온 자이며, 의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고센 땅이자 교회 바깥에 있는 자입니다. 십자가는 경계선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다면 완악함입니다. 피 재앙, 개구리 재앙, 모기 재앙, 파리 재앙을 포함하여 열 가지 재앙이 덮어버리게 됩니다. 십자가 안쪽에 들어왔다면 부활 승천을 따라 천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십자가 안에 들어옴으로써만 피 재앙, 개구리 재앙, 모기 재앙, 파리 재앙을 포함한 열 가지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살 이유가 내려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서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 되어 계신 천국을 의식 속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의식을 켜놓을 때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생명이 이 땅으로 내려오면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섯 가지 재앙이 더 있습니다만 우리가 살펴본 네 가지 재앙만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완악함으로 자처하고 자초하는 멸망의 독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독해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 마음에 천국이 환히 켜질 수 있는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사건은 내 일생일대 최고의 기쁨이자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왜 최고의 선물이고 최고의 기쁨인지를 알 수 있을 만큼 우리 완악함의 실제 성분을 모르며 살았던 시간이 너무나 후회되고 안타깝습니다. 혐오스럽고 지긋지긋하고 끔찍하고 잔혹한 완악함의 성분들이 오늘도 심장 옆에 십자가를 꽂아둠으로써 온전히 제거되게 하시고, 광명한 천국의 빛 아래에서 사는 하나님의 권속들이 되고 진정한 성탄절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