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은 국가인권위 건너편 잔디밭에 상황실을 차렸다. 그마나 고공 농성자들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다. 최종원 상황실장(기아차 사내하청 화성분회 노안부장)은 “어제 국가인권위 조사관이 올라갔는데 무서워서 일어서지를 못했다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다시 한 번 까마득하게 솟은 광고탑을 바라보니, 두 명의 고공 농성자들이 위태위태하게 광고판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정규직 판결을 받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왜 또다시 극한의 농성을 하게 됐을까. 광고탑 앞에는 ‘기아차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몽구가 책임져라!’라는 요구가 적힌 대형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다.
|
새까매진 얼굴, 의지할 곳은 피뢰침 뿐...보름 맞은 고공농성
고공농성 보름 만에 이들의 얼굴은 새까맣게 타버렸다고 했다. 최정명 씨는 “거울이 없어서 얼굴을 못 봤는데,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니 치아밖에 보이지 않더라”고 말했다. 매일 30도를 웃도는 초여름 더위와 한낮의 직사광선을 고스란히 견뎌야하는 까닭이다. “천막 같은 것은 설치하지 못했어요. 바닥이 철판이어서 반사율이 꽤 심하네요” 한규협 씨가 말했다. 햇빛에 달아오른 광고탑 바닥에 발을 디디면 2초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매트를 깔아 놓았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번번이 날아가기 일쑤다. 한참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부산스런 소리가 들린다. 또 다시 매트가 날아갔다고 했다. 강한 바람소리가 소음처럼 이어졌다.
한 씨와 최 씨는 “아직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아침저녁으로 운동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기댈 곳 하나 없는 위험한 고공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등을 기댈 곳이라고는 날카롭게 솟은 피뢰침뿐이다. 천둥치고 비 오는 날은 특히 위험하다.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 씨는 “피뢰침에 안전바를 걸고 있다. 그런데 최근 비가 오고 천둥도 쳐서 위험하겠다 싶었다”고 전했다. 광고탑은 약간의 경사가 있어 조금만 중심을 잃으면 떨어질 위험도 있다. “경찰 측에서 장기적으로 시위를 할 수 있는 설치물을 일체 올려 보내지 않으니 안전 용품을 설치할 수가 없죠” 그래도 첫날 후들거리는 다리로 광고판 위에서 아슬아슬 버텼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많이 적응한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은 소송을 제기한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을 정규직으로 인정했다. 법원은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이용한 공정을 비롯해 사외 물류, KD, 출하 등의 공정도 연속적인 작업에 해당된다며 이들의 정규직 지위도 인정했다. 사실상 모든 자동차 생산공정업무가 도급의 형태로 위장된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주구장창 외쳐왔던 ‘법 위의 정몽구’라는 구호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법원 판결을 근거로 또 다시 정규직화 투쟁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회사는 교묘했다. 정규직 전환이 아닌 ‘특별채용’이라는 카드를 또다시 꺼내들었다. 고작 400여 명의 사내하청만을 신규로 특별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8월, 논란을 빚었던 현대차 8.18 특별채용 합의와 유사한 방식이었다.
한규협 씨는 “지난해 9월 법원 판결 이후 회사가 항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며 “현대차 8.18합의를 보고 기아차 역시 현대차의 벽을 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부적 정서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 씨의 말대로 기아차 노사는 지난 5월 12일 특별교섭에 합의했다. 전체 3,40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 중 465명만을 내년까지 정규직으로 신규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신규채용된 노동자는 모든 불법파견 소송을 취하하고 향후에도 소송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노조의 불법파견 투쟁을 와해시키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아차 소하공장 사내하청분회는 특별교섭 내용을 인정했고, 광주, 화성공장 사내하청분회는 즉각 반발했다. 현대차 특별교섭 합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사내하청 노조 간 갈등이 또 다시 재현된 셈이다. 결국 기아차지부는 특별교섭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분회는 합의안을 적용시키지 않기로 했다. 최정명 씨는 “신규채용 합의 이후 너무 분노했다. 지부에서 설명회를 하겠다고 화성공장에 왔는데, 반발이 너무 심하니 설명회도 제대로 못했다”며 “소하분회는 전체 사내하청 노동자의 20%밖에 안 된다. 결국 당사자들의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는 고공농성자 2명 징계해고 골몰
정규직 전환은 회피, 한전부지 매입 ‘통합사옥’ 건설로 돈 자랑
보름간의 고공농성에 회사 측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묻자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두 명의 고공농성자들의 징계 해고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종원 상황실장은 “사측 관리자를 통해 확인된 바에 따르면, 회사가 징계해고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최정명 대의원에 대해서는 (무단결근에 따른) 징계해고를 준비하고 있고, 한규협 정책부장은 상집 간부이기 때문에 타임오프법 위반으로 징계할 수 있는지 검토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
회사는 언제나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징계 해고라는 칼날을 들이대 왔다. 정규직 전환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기아차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약 1천억 원의 비용이 든다. 작년 기아차 당기순이익은 3조원에 달했다. 그리고 현대차그룹이 한전부지를 매입한 금액은 10조 5,500억 원이다. 기아차 사내하청 정규직 전환 비용은 한전부지 매입 대금에 0.8%에 불과하다. 심지어 현대차그룹은 한전부지 통합사옥으로 얻게 될 이익의 대가로 1조 7,030억 원의 공공기여금을 제시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의 통합사옥에는 115층, 62층짜리 빌딩 두 동이 들어설 예정이다. 제2롯데월드보다도 높고 거대한 건물이다.
현대기아차의 높은 벽을 실감하면서도 매번 투쟁에 나서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 벽도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한규협 씨는 “이제 전 사회에서 노동인구의 절반은 비정규직이지 않나. 언젠가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본다”며 “현대차 동지들을 비롯해 많은 비정규직 동지가 10년 넘게 열심히 싸워왔다. 이제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치열한 투쟁을 시작하고 싶다. 그러다보면 사회적 반향도 일어나지 않겠나”라고 했다. 각오를 하고 오른 고공농성 길인만큼, 쉽게 내려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한 씨는 ‘올 겨울 전에는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해탈한 듯한 웃음을 내뱉었다. 최정명 씨는 “임단투 하듯 단기간에 정리할 수 있는 투쟁이 아니지 않느냐. 어느 정도 사회적 여론이 만들어지고 숙성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걱정하는 동지들에게 한마디씩 해 달라고 요청하자, 두 명의 고공농성자들은 하나같이 밑에 있는 동료들의 걱정을 늘어놓는다. 최정명 씨는 “밑에서 바라지하는 동지들은 같이 비 맞고, 노숙하고, 선전전하고, 사람들까지 챙겨야 하는 이중, 삼중의 일을 도맡아하고 있다. 위에 있는 사람들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게 현장 잘 조직하는 투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규협 씨 역시 “우리가 고공농성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올라올 때만 해도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만하다”며 “오히려 밑에 있는 동지들이 고생이다. 마음이라도 혹시 상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우리는 얼추 익숙해져 있으니 우리 걱정은 말고 열심히 싸워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