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 5시에 일어난다. 가볍게 세수만하고 핸드폰을 챙겨들고 호텔을 나선다. 그제 오후 훈자에 도착해 발팃 포트 쪽으로 가 봤으나 훈자 전통의 흙과 돌로 지은 집은 안 보이고 온통 시멘트로 지은 건물에 음식점과 숙소, 기념품 가게만 보여 오늘은 기어코 훈자 전통 집을 보고 싶어서 발팃포트 쪽 골목을 가 볼 생각이다. 이리저리 골목을 누비고 한 시간 반을 다녀 봐도 흙과 돌로 지은 가옥은 보이지 않아 실망스럽다. 이곳 어딘가에 일부러라도 훈자 전통가옥을 만들고 그들이 생활하던 모습을 갖춘 민속촌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호텔로 돌아온다.
호텔로 돌아와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젊은 아버지가 네 명의 어린 딸을 데리고 와 식사를 하는데 딸들의 식사 시중을 드는 모습이 정겨워 자꾸 그들에게 눈이 간다. 식사가 끝날 무렵 딸들의 엄마가 식당으로 들어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기에 다가가 가족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기에 내가 딸들의 아빠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Good daddy”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며 내개 한국인이냐고 묻고 자기 가족들은 카라치에서 왔다고 한다. 그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테라스로 나오길 기다려 딸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오늘은 오전에 알팃 포트와 발팃 포트를 일행들과 함께 돌아보고 오후에는 각자 훈자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오전 9시 소형버스에 나누어 탄 우리 일행들은 알팃 포트(Altit Fort)를 향해 출발한다. 호텔에서 알팃 포트로 가는 길은 급경사, 급회전 구간이 많고 비포장도로인데 건기인 요즘 비가 오지 않아 먼지가 많이 날린다. 도로 좌우엔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먼지들 때문에 어떻게 사나? 걱정된다. 약 20분 정도 올라 알팃 포트 입구 주차장에 도착해 길잡이를 따라 알팃 포트로 들어간다. 마을 입구에 있는 매표소의 건물은 900년 전 티베트양식이고, 요새는 1,100년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였다. 물이 없는 큰 연못은 옛날에는 수영장으로 쓰였고 지금은 물을 정수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나 물은 없고, 주위에 큰 버드나무만 있다. Altit Fort는 Baltit Fort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마을의 집들과 한데 어울려 독특한 아름다움과 정취를 자아낸다.
알팃 포트 출입문 옆에는 안내판이 있는데 그 내용을 구글로 번역해 보니 “900년 된 알팃 요새는 훈자 강을 향해 폭포처럼 떨어지는 200m 높이의 가파른 경사면이 있는 장관을 이루는 기념물이다. 2001년 훈자 왕의 둘째 아들인 아멘 칸 왕자가 AKDN에 선물한 아가칸 문화 서비스- 파키스탄은 역사적인 알티트쿤(강화된 정착지)을 처음 재건한 후 2006-2010년 동안 그것을 보존했다. 탄력적, 전통적 공학기술은 요새의 하이라이트이다. 대부분의 보존 작업은 구조적 결함을 수선하고, 기존 벽을 안정화 및 수리하고, 목재 부패를 처리하기 위해 일부 지붕을 교체하고 적절한 조명을 제공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문화를 위한 아가칸 신탁과 노르웨이 왕실대사관은 복원에 자금을 지원했다. 카바시, 화려한 자연 정원 – 동화 과수원 –은 평온의 환영하는 안식처이다. 미르의 식민지 시대의 겨울 거주지는 현지 요리를 제공하는 카페로 재사용되고 있다. 알팃 포트는 2011년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보존상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표 검사를 하는 성의 출입문을 지나면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넓은 정원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마지막 왕의 Royal Garden으로 훈자에 있는 40여종의 살구를 이 정원에서 다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인위적으로 꾸미지는 않았지만, 꽤 넓고 시원한 정원이다. 성은 비록 여기저기 훼손되고 무너져서 누추해졌지만, 늙은 나무들이 크고 푸른 그늘을 만들어 옛 영화를 전하고 있다. 정원 한 쪽은 전에는 궁전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현대식 커피숍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조금 더 오르면 성벽이 보인다. 커다란 암반 위에 돌과 나무로 지은 성이 우뚝 서있는데 성이라 하기엔 너무 작아 보인다. 약간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르면 성의 오른편으로 깊은 낭떠러지와 유유히 흐르는 훈자 강이 보인다. 낭떠러지 아래로는 훈자 강이 유유히 흐르고, 산과 성 사이로 마을이 보이는데 이 마을은 옛날에는 10m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물건을 팔기 전에 대상들에게 세금을 거두던 곳이라 한다.
이곳은 사방이 인도, 카자흐스탄, 위구르, 타지크, 티베트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언제라도 침략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곳이라 전략적으로 지어졌다. 성벽은 빙하에서 흘러나온 빙퇴석에 돌과 모래를 섞어 한 단을 쌓은 후에 나무 목재를 올리는 방식으로 켜켜이 쌓아 외벽을 만들고 안쪽에는 흙을 발랐다. 이런 건축양식은 빈번히 발생하는 카라코람 지진에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지혜로운 건축 방식으로 작고 두꺼운 창문, 평평한 지붕 같은 건축 양식은 티벳 건축 방식의 특징이다. 실제로 티벳에 있는 '포탈라 궁'과 알티트 궁이 비슷하다고 한다. 기둥이나 가구에 보이는 나무 조각 등에서 불교적인 문양이 발견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불교와 힌두의 영향을 모두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 탑인 시카리 탑은 약 1,100년 된 것으로, 길기트-발티스탄 주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이라고 한다.
계단을 올라 900년 전 커다란 암반 위에 지어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오래된 문짝은 파손되었지만 그 무늬만은 옛 영화를 살짝 엿보게 해준다. 성안의 각 방을 이동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문지방이 너무 낮아 자칫 머리를 부디칠 수 있다. 출입문이 작은 것은 고개를 숙이게 하여 왕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게 하려는 방식이라 한다.바닥에 있는 4각 웅덩이는 포도주를 보관하던 장소이며, 그 옆에 좁은 공간을 차지한 1,000년 전 만들어졌다는 티베트양식의 4각형 중앙기둥은 특별히 쓸모없어 보였으나 훈자왕국의 형과 동생이 전쟁을 벌여, 승리한 형이 동생을 기둥에 묶어놓은 채 흙과 흙벽돌로 발라버렸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는데, 얼마 전 알팃 포트를 보수하면서 기둥을 뜯어보니, 정말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살림도구가 전시된 방에는 우리 솥에 해당하는 큰 옹기그릇, 검은 상자위에 찌그러진 놋 주전자 하나, 나무바가지, 용도 불명의 구멍 뚫린 큰 돌 등이 놓여 있다. 검은 나무상자에는 연속된 卐 무늬가 있는데 연속된 卍 자 무늬는 '만나라(mandala)'인데, '불법의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경지'를 의미하며 티베트에서 왕을 상징한다고 한다.
천정에 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은 나무를 □+◇+□+◇ 겹쳐 쌓으면서 단계적으로 좁아지게 만든 다음 마지막에 유리창을 넣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이집트 피라미드가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곳에 온 것이라고 하는데 중앙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천장을 만드는 방법으로 자연 채광을 이용했다. 창문이 작은 것은 추위를 막기 위한 것으로 돌과 나무로 외벽을 쌓고, 실내는 이처럼 흙벽을 발랐다. 벽의 두께가 두껍고 창문이 작아서 실내는 어두컴컴하다.
계단이 있는 지하 방은 감옥이며, 그 위 방은 왕족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양탄자가 깔린 가장 높은 곳은 왕이 앉는 곳이라고 한다. 방 앞에 있는 불을 피우는 곳은 음식을 제공하는 곳이고, 방 옆에 있는 작은 구멍은 적들이 쳐들어오면 피하는 비상구라고 한다. 3개의 말뚝이 박힌 벽은 빛을 반사시켜서 그림자를 만들어 시각을 나타내는 해시계이며, 외부 아래로 뚫린 구멍은 변소 같았으나 쓰레기를 버렸던 구멍이고 4각형의 작은 구멍은 변소구멍이며, 그 아래가 바로 감옥이라 죄수들은 오줌으로 샤워를 했다고 한 것은 웃으려고 한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나무파이프로 밖으로 나아가게 했다고 한다.
죄수들을 던져버린 사형 장소였던 곳은 훈자 강 상류에 보이는 절벽과 나무가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절벽은 300m가 넘는다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으며, 강 건너 큰 건물은 모스크 같아 보이나 대단히 높은 미나렛에는 무아진의 장소가 보이지 않아 모스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진이 있는 방은 영국지배 때 영국 여인들을 위해 만든 방이라고 하며, 이 방에는 요새의 옛날사진과 지도 그리고 중요인사들의 방문사진이 있는데 아프간과 영국의 마지막 지배 때의 사진이라고 한다. 1935년에 촬영된 사진이라고 했는데 칼라로 된 것은 아마도 다시 복원한 것 같다.
내부계단을 따라 오르면 다시 성 밖(지붕 위 테라스)으로 나오게 되는데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은 아름답고 급경사의 강물은 제법 세차다. 아래로는 강이 흐르는 낭떠러지 절벽 앞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낭떠러지 끝에 서서 앞에 있는 바위로 건너뛰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만이 왕의 근위병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평지 같으면 어렵지 않게 건너뛸 수 있는 거리지만, 아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건너뛰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지형이다. 이곳에서 담력 시험을 받던 여러 명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근위병이 되기 위해서는 황천을 다녀와야 하는 것이다.
알팃 포트에서 나와 성 뒤편 마을로 가니 작은 광장이 보이고 그 광장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는데 이 마을이야말로 지붕은 평평하고 돌과 흙, 나무로 지은 훈자 전통가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무척 반갑다. 광장에는 아이들이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있고 마을 노인들은 햇볕을 쬐고 있다. 이 마을은 성을 지을 때 인부들이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마을 이름도 알팃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