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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위급함과 초조함이 없는 삶?>의 줄거리 :
왕이 된 지 불과 이년째,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자로 확인되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위급함과 초조함에 쫓겼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정황을 살펴보면 얼마든지 사울의 처지가 이해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지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사울을 향한 기대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우리 같은 사람에게 위급함과 초조함이 전혀 없는 삶이 가능할까요?
위급함과 초조함이 없는 삶?
(사무엘상 13:1~23)
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4절의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라는 말씀을 보면 이미 완료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다윗을 가리킵니다. 사울은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사울을 대체할 사람으로 다윗을 정하셨다는 내용입니다. 본문 중심으로 <위급함과 초조함이 없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위급함과 초조함이 없으면 좋지만 정말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요?
본문에는 다윗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로써 암시되고 있습니다. 한편, 사울은 하나님 마음에 맞지 않아 버림을 받는 자로서 결정됩니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의 대비가 시작됩니다. 사울과 다윗의 대비는 사무엘서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위한 징조 중의 하나는 새사람이 되는 경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시기는 사울이 이러한 경험을 한지 만으로 1년이 채 되지 못한 때입니다. 왕으로 즉위한 때로부터 따져도 햇수로 2년째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은 너무 빠르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일이 벌어진 앞뒤 정황을 생각해 보면 사울은 좀 억울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삼천 명으로 이루어진 근위대를 조직합니다. 그중에서 천 명을 아들 요나단이 거느리게 했고, 나머지 이천 명을 자기가 거느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 군대가 아닌 사울의 근위대였습니다. 요나단은 거느리던 천 명을 이끌고 블레셋의 전초기지를 공격합니다. 이에 블레셋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려 했고 사울 왕도 이스라엘 백성을 소집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위기를 맞이하여 사울은 사무엘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립니다. 이에 사무엘은 7일을 기다리면 길갈로 가겠다는 답장을 보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길갈로 오기를 기다리는 7일 동안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7일 동안 일어난 일로 말미암아 사울은 새사람 경험을 한 지 1년이 채 못된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왕의 즉위식을 한 햇수로는 2년이 채 못된 때였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이 7~8월 즈음에 즉위식을 했다고 한다면, 다음 해 1월만 되어도 햇수로는 2년 차가 됩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마음에 맞지 않는 자로 여기시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어쩌다가 하나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이란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7일을 기다리라고 전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건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의적으로 드린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행동이 맞습니다. 다만 그 잘못은 사울이 버림받은 직접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는 사울이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7일 동안 기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물론, 사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7일 이후에 도착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사무엘이 도착한 것은 사울이 7일 째 번제를 드린 직후였습니다. 사울은 7일이 됐는데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위급함과 초조함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7일이라는 시간을 정해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7일 동안 상황이 위급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이 마음으로 위급함과 초조함을 이기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여리고성 때를 떠올려 봅니다. 이스라엘은 7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여리고성의 존재감보다 더 클 수 있는 기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성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원하셨던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몸으로 싸우는 실전(實戰)에 앞서, 마음으로 싸우는 심전(心戰)에서 위급함과 초조함에 대해 이기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사울이 위급함과 초조함에 쫓기게 된 직접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블레셋 군대의 위용에 압도당하면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꼈습니다. 5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라고 했습니다. 한편 22절을 보면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블레셋의 군사들은 모두 철제 무기를 갖고 있었으나, 이스라엘 중에서 철제 무기를 가진 자는 사울과 요나단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쓰던 구리나 청동 무기들은 철제 무기와 부딪히면 잘리거나 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모습을 보며 위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번제를 드림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두려워 떨며 탈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이 위급함을 느끼고 초조함에 쫓길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을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인 기준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울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왕이 된 지 햇수로 2년째이자 만으로는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전쟁 경험이란 기껏해야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암몬 족속을 이긴 것뿐이었습니다. 왕이 초년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삼만의 병거와 마병 육천 명과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습니다. 무기 하나 제대로 없는 오합지졸 이스라엘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보면 분명히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도 흔들릴 것이 뻔하기에 진영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는 사울의 마음도 크게 괴로웠을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의 위용이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왕인 내가 버티고 있는데 이렇게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이 맞느냐? 나를 봐서라도 조금 용기를 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은 자기의 왕 됨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도 되지 않고, 의지도 되지 않고, 권위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왕의 권위가 산화되어 버리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왕이 건재함에도 이스라엘은 블레셋 군대의 위용을 보고 위급함을 느껴 탈영하기 바쁩니다. 사울은 이러한 모습을 보며 자기의 왕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블레셋 군대 앞에서 이스라엘은 사울이 왕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보기에도 자기가 왕이라는 사실이 전혀 의미 부여가 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은 왜 삶에서 위급함이나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마음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잃으면 도저히 마음이 견딜 수 없기에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내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다면 위급함을 느끼지 않고 초조함에 쫓기지 않습니다. 마음에 위급함과 초조함이 생긴다면 이유는 분명합니다. 내 마음에서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것을 강하게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위급함과 초조함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한 마디로 왕위 때문입니다. 사울은 왕위가 산화되어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꼈습니다. 백성은 블레셋 군대를 보면서 전쟁이 시작되면 분명히 목숨을 잃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위급함과 초조함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블레셋 군대의 위용을 보니 질 것이 뻔한 전쟁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 여겨졌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잘만 하면 블레셋을 무찌르고 살아남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보니 모든 군사가 철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데, 나는 곡괭이를 들고 왔습니다. 블레셋 군사의 무기로 한 번 치기만 하면 내 무기는 두 동강이 날 것이 뻔합니다. 심지어 아군이 숫자라도 많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군대는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기도 전에 위급함에 쫓겨서 도망갔고, 사울은 탈영하는 백성을 보며 자신의 왕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는 것에 대해 위급함을 느껴서 초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위급함과 초조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사울을 버리시는 원인이 된 것일까요? 위급함과 초조함 자체는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네 마음에서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네가 무엇을 잃을까 위급해하고 초조해하고 있느냐?’라는 것을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사울이 가진 왕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울은 왕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을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약한 베냐민 지파이고,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집안이라 고백합니다. 또한 자신의 고향인 기브아에 블레셋의 군사기지가 있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한다는 것을 전해 들었고 징조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하게 하시고 왕의 즉위식까지 이끌어가셨습니다. 이러한 사울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왕위를 마음에 담게 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는 자로서의 새사람 됨을 망각하고 마음에서 왕위를 붙잡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왕위가 너무 소중하게 여겨졌기에, 자신의 왕 됨이 무시당하는 상황이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자기가 왕이라는 것이 백성에게는 조금도 버틸 만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울은 백성이 자기에게서 흩어지고, 백성의 마음에서 왕위가 아무 권세가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기에 백성의 마음을 수습하기 위하여 초조함에 쫓기면서 급하게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7일 동안 사울에게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이면 누구나 초조할 수 있고, 위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에서 7일 동안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울은 위급함과 초조함이 생긴 상황에서 왕위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백성이 도망갑니다. 왕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왕위가 백성들에게 위로도 안 되고 의지처가 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은 애초에 자기가 가진 것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내가 본래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제비뽑기로 왕이 됐는데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내가 가진 것은 왕위가 아니다. 지금 내 옆에 와 계시고 나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가졌을 뿐이다. 내가 무슨 왕위를 가지겠는가? 백성이 도망가는 것은 내게서 왕위를 뺏어갈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뺏어갈 수는 없다. 블레셋 군대는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고, 삼만의 병거와 육천의 마병이 지금 우리를 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들이 나를 죽이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뺏어갈 수는 없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기를 바라시며 7일 동안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블레셋을 보며 탈영하는 상황에서 사울은 7일 동안 기도하면서 위급함과 초조함을 이겨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이 모든 상황은 내게서 하나님을 뺏어갈 수는 없다. 내 목숨을 뺏어갈 수도 있고, 나의 왕위를 뺏어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뺏어갈 수는 없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뺏길 수 없고 하나님을 뺏어갈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기 전까지는 내게서 하나님을 뺏어갈 자가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위급함과 초조함을 넘어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위급함과 초조함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와 관련하여 풍랑 속에서 주무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교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풍랑도 당신의 마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뺏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를 크게 소유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풍랑을 비교해 보면 풍랑은 소주잔 속의 술이 흔들리는 것보다 더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은 자기들의 목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위급함을 느끼고 초조함에 쫓겼던 이유는 마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극도의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신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신 것은 십자가에서 몸이 죽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끊어지는 저주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끊어져서 부활하실 때까지 3일 동안 하나님을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고작 3일 동안 하나님을 잃어버림에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강렬하게 하나님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강렬하게 하나님을 가졌다는 소유 의식으로 충만하셨기에 빌라도 앞에서도,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모함에도, 풍랑 속에서도, 그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마음에 위급함과 초조함이 없으셨습니다. ‘풍랑이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뺏어갈 수 있을까? 내 마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느끼며 소유한 것은 하나님이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을 뺏어갈 수 없는 풍랑이 내게 위급함과 초조함을 가져다줄 수 없다.’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뺏기지 않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육체의 목숨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에 비하면 육체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는 바로 이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는 상황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을 보고 인자를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마음에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로 치기에 육체는 죽습니다. 그런데 육체가 죽는다는 것이 위급함과 초조함을 만들어낼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가지고 있고, 천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위급함과 초조함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안 벌립니다. 그러나 돈이 안 벌리는 상황이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을 뺏어갈 수는 없습니다. 돈이 안 벌린다고 해서 여러분에게서 천국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예수님이 없어지지 않고, 성령님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돈이 아무리 없어도 여전히 마음으로 천국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마음에서 천국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본문의 7일 동안이 의미하는 대로 날마다 하나님을 조금씩 더 많이 갖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위급함과 초조함이 없었습니다. 목숨은 중요하지만 마음에 가지고 있는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돌로 쳐 죽이는 것이 하나님과 천국을 뺏어가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 예수님을 뺏어가는 것도 아니기에 위급할 일도 아니고 조급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으나 암에 걸려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암의 증세가 나타나면 마음에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서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목숨과 천지를 지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크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내 육체의 목숨과 하나님의 크기를 비교한다면 육체의 목숨 따위는 티끌에 티끌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숨을 마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중에 암의 증세가 나타나면 위급함과 초조함이 엄습합니다.
위급함과 초조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7일간의 유예 기간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을 가지는 기도로 극복해야 합니다. 암에 걸려 죽게 되는 상황이 위급함과 초조함을 초래하는 이유가 아닐 정도로 하나님을 많이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반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가져서 내 몸에서 암이 발생해도 위급함도 아니고 초조함을 초래할 이유도 아닌 상태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울처럼 위급함과 초조함에 쫓기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가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음이란 하나님이 마음에 들여놓으시고 끌어안고 기뻐하시며 영원히 함께 사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을 가졌을 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것들에 다 가서 있다면 어떨까요? 지금 하나님은 당신을 주시겠다고 내 옆에 와 계시는데 그 하나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대신 세상 것들을 마음으로 붙잡아서 그 작은 것들을 잃어버릴까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낍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의 것을 마음에 담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조금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떨어지는 겨우 3일을 땀에서 피가 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살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짧은 기간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에 대해 너무나 진지한 위급함과 절박함과 초조함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업이 안 돼서 초조해하고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무엇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나를 가져라!’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을 가지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기도하면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 많이 가지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됐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이 됐으면 계속해서 하나님 많이 가지기를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새사람이 된 지 1년 만에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사울은 단순히 하나님을 많이 가지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지는 쪽에서 방향을 틀어 왕위를 갖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십니다.
몸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아프다고 마음에서 하나님을 뺏기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을 뺏기는 것도 아닙니다. 몸이 아픈 것 때문에 위급하고 초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위급하고 초조하다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이 아픈 것 때문에 위급함과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는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사업이 안 되고, 돈이 없고, 노후가 걱정돼서 초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업이 안 되고, 돈이 없고, 노후가 불안해도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을 뺏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연금이 없어진다고 천국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 예수님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내게 와서 머물기를 원하시는 성령님께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無)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잃지 않는다면 이 세상 상황은 필요하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다 주어질 수도 있고, 다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이 있다면 이 세상 상황이 주어지든 없어지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잃을까 위급해 하고, 무엇을 잃을까 초조해하는지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에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그것이 하나님을 뺏어갈 수는 없습니다. 설령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이 벌어져도 그 상황은 내게서 하나님을 뺏어가지 않고 하나님도 나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버릴 뿐입니다.
캘빈의 5대 강령의 하나로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버립니다. 하나님 가지기를 중단한다면 아무리 새사람 된 경험을 했더라도 본문의 사울과 같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의 사상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분명히 새사람이 되었으나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가지지 않고 왕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왕위를 뺏긴다고 하나님을 뺏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뺏기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셨으니까 설령 왕위를 뺏기더라도 필요하다면 회복하실 것이고, 또 필요하다면 왕위를 버리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울은 ‘그까짓 왕위가 뭐라고!’라고 여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매달려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이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그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가 바로 나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위급함과 초조함이 찾아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싸움에서 위급함과 초조함에 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고 이겨야 합니다. 이기는 방법은 주의 기도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많이 가지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을 뺏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뺏어갈 상황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도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 가지는 일을 지속함으로써, 위급함과 초조함이 전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조그마한 돌발 상황만 벌어져도 위급함과 초조함을 느낍니다. 이대로 마음의 싸움에서 지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기어코 위급함과 초조함에서 벗어나는 승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을 조금씩이라도 더 가지는 새사람의 삶이 이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